< 낭만필드 - 353 >
“인기 좋은데?”
응원가까지 백그라운드에 깔리자, 마치 주인공인 성배를 나머지 동료들이 반겨주는 듯한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콤파니가 어깨를 두드리며 부럽다는 듯 말했다.
“인기는 응원가가 좋은 거겠지. 그 노엘이 직접 만든 곡인데. 과분한 곡이지.”
‘하늘색 유니폼’이라는 가사만 ‘붉은색 유니폼’이라고 고치면 ‘붉은 악마’ 벨기에 국가대표팀 주장 성배를 위한 훌륭한 응원가가 되는 곡이었다.
벨기에 국가대표팀 서포터즈 역시 노엘 갤러거와 시티즌들의 허락을 받아 정식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자, 이제 가자. 트로피 가지러 가야지.”
UEFA 관계자들은 시상식 준비를 거의 끝내고 벨기에 선수단을 부르고 있었다.
이제 앙리 들로네컵을, 유럽 최강을 상징하는 트로피를 가져올 시간이었다.
벨기에 선수단은 계단 근처에 양옆으로 늘어선 채 자리 잡았고, 그 사이를 걸어 이탈리아 선수단이 먼저 계단으로 향했다.
“수고했어요, 잔루이지. 수고했어요, 안드레아. 당신도 수고했어요, 다니엘레.”
성배는 앞을 지나치는 이탈리아 선수들에게 손을 내밀며 격려해주었다.
유로 2012 결승전에서 패배, 준우승을 차지한 이탈리아 선수들은 벨기에보다 먼저 경기장 스탠드 중앙에 만들어진 시상식 장소로 올라갔고, 벨기에 선수들은 양옆에서 그런 이탈리아 선수들에게 박수와 격려, 축하를 보내주었다.
“마리오. 너도 수고했어.”
“됐어, 건들지 마.”
맨체스터 시티 동료인 발로텔리는 성배가 내민 손을 거부하고 지나쳤다.
‘이게 내가 너한테 하는 마지막 말일지도 모르는데. 뭐, 네 복이지.’
이미 주전 경쟁에서 오래전에 밀려난 발로텔리는 다음 시즌에는 맨체스터 시티의 유니폼을 입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성배가 내민 손을 뿌리치는 장면이 방송에 나갔기 때문에 떠나는 게 심신에 좋을 것이었다.
시티즌들 역시 지금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자, 그럼 우리도 가자.”
이탈리아 선수들이 준우승 메달을 모두 목에 걸었을 때, 벨기에 선수들이 계단을 통해 시상식 장소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마워. 네 덕분에 이런 날도 다 오네.”
“주, 고맙다.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도 훨씬 잘 해줬어. 네 덕에 여기까지 왔다, 정말로.”
성배를 지나쳐 계단으로 향하던 시몬스와 반 바이텐, 두 명의 베테랑들은 진심을 담아 성배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이대로 다시 메이저 무대를 밟지 못하고 은퇴하는 것이 아닐까, 불안해하던 두 선수에게 유로컵 우승은 맹세코 단 한 번도 기대해본 적 없는 꿈과 같은 현실이었다.
“앞으로 우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네가 했던 말, 이제 나도 믿어보려고. FIFA 랭킹 1위. 까짓것 못할 것 없겠네.”
성배의 든든한 수비 파트너이자 가장 절친한 동료라고 할 수 있는 베르마엘렌과 콤파니 역시 성배에게 우승의 공을 돌렸다.
국가대표팀에 발탁되고 얼마 되지 않아 성배가 지나가듯 말했던 FIFA 랭킹 1위의 꿈은 두 선수의 가슴 속에 자리 잡았다.
“덕분에 열아홉에 여기까지 왔네요. 다 주 덕분이에요.”
“월드컵에서는 지금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맡을 겁니다. 이번에는 등에 업혀왔지만.”
로멜루 루카쿠, 케빈 데 브라위너 등 이제 막 기지개를 켜는 90년대생 유망주들 역시 가슴 속에 성배에 대한 믿음과 함께 자신감을 가득 채웠다.
이들까지 기대만큼 성장해준다면, 앞으로 벨기에의 황금기는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질 것이었다.
“네 덕에 유로 우승 감독 소리도 들어본다, 야. 하하, 고맙다. 역시 나는 축구와 함께 살아야 하는 사람이야.”
은퇴 후 잠깐 벨기에 클럽의 감독을 맡았다가 정계로 외도를 시도했던 마크 빌모츠는 성배 덕분에 벨기에 국가대표팀 감독직이라는 무거운 자리로 축구계에 복귀했다.
비록, 다른 명장들과 비교하면 한참 떨어지는 젊고 어설픈 감독이지만, 자신의 역할과 한계를 잘 알았고,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낸 데다가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은 성배에게 큰 힘을 실어주어 대신하게끔 한 지도력은 분명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내 차례인가.’
빌모츠 감독을 마지막으로 성배를 제외한 벨기에 선수단 모두가 시상식 단상 위로 향했다.
다음은 성배의 차례였다.
트로피를 하늘 높이 들어올려야 할 벨기에의 주장이었기에 가장 마지막에 단상으로 향한 것이었다.
“축하하네. 자네가 유럽 최고야. 그러고 보니 우리 한 달 정도 전에도 봤었지? 하하.”
한 달 반 전에 성배의 목에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메달을 걸어주고 빅 이어를 건네주었던 미셸 플라티니 UEFA 회장은 다시 한 번 성배의 목에 유로컵 우승 메달을 걸어주었다.
“저기 뒤에 단상이 보이나? 거기 올라가 있으면 우승컵을 주겠네. 그다음에는 앙리 들로네컵을 하늘로 높이 치켜들면 돼. 거기서부터는 벨기에 선수단이 알아서 하시고, 거기까지만 준비된 절차일세.”
성배는 플라티니가 이야기한 위치로 올라섰다.
그리고 그런 성배에게 앙리 들로네컵이 주어졌다.
“이게 바로 앙리 들로네컵이구나!”
“오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내 생애 이 트로피를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줄이야!”
성배의 바로 앞에 서 있던 선수들이 가장 먼저 앙리 들로네컵을 눈앞에서 보게 되었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동료들과는 달리 성배는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흥분한 상태였다.
‘하, 하하... 앙리 들로네컵이라. 한국 국가대표팀으로도 못 뛰었던 내가 황금세대 벨기에 국가대표팀의 주장으로 유럽 최고의 자리에 오르다니. 이게 무슨 코미디야.’
맨체스터 시티와 벨기에의 일원으로 최고의 자리를 연달아 차지하면서 부쩍 예전 생각을 자주 하게 된 성배였다.
성배가 이 자리에 올라서기까지 자신을 채찍질해왔던 원동력은 과거에 이루지 못했던 꿈과 미련이었는데,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서 꿈을 이루었고, 미련은 눈 녹듯 사라졌다.
그래서 그런지 성배에게 잊히기 전에 자신들이 성공을 이끌어주었다며 마지막으로 어필하려는 듯했다.
‘그래, 고맙다. 과거의 나. 네 덕에 이 자리까지 숨도 제대로 안 쉬고 노력해 올라왔으니까. 나, 참... 혼자 드라마를 찍고 앉아있네. 나한테 이런 쓸데없는 생각할 여유도 생겼구나.’
성배는 피식하고 미소 지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애써 감상에서 빠져나온 성배는 언제 트로피를 들어 올릴지 몰라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동료들의 얼굴을 보고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평균 신장이 180cm를 훌쩍 넘는 거대한 덩치들이 무슨 아기 새들 마냥 자신의 얼굴과 손, 우승컵만 바라보고 있으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가자! 우리가 챔피언이다!!”
““우, 우와아아아악!!!!!””
기습적으로 앙리 들로네컵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린 성배의 행동에 동료들은 잠깐 당황하더니 이내 목이 터져라 함성을 내질렀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팬들 역시 이들에게 부응해 엄청난 환호를 보내주었다.
“여러분, 보이십니까? 앙리 들로네컵입니다! 저게 우리 벨기에의 것입니다!”
“이제 며칠 뒤면 비행기를 타고 선수들과 함께 우리 벨기에의 땅으로 오게 될 트로피죠! 유럽 최강의 상징, 앙리 들로네컵이에요!!”
벨기에 중계진은 절규하다시피 외쳤다.
그들의 심정을 대변하듯 폭발음과 함께 화려한 불꽃들이 하늘로 솟구쳐올랐다.
우크라이나, 키예프의 하늘은 아름다운 불꽃들에 의해 화려하게 수놓아졌다.
“자, 그럼 이제 팬들에게 인사하러 가자고.”
시상식을 마치고 앙리 들로네컵과 함께 그라운드로 내려온 선수들은 기념사진까지 멋지게 찍었다.
사진 촬영 이후에도 우르르 모여 신나게 기뻐한 선수들은 손을 맞잡고 벨기에 원정 팬들이 모인 스탠드 쪽으로 걸어갔다.
가깝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 폴란드와 우크라이나까지 기꺼이 원정을 나와 응원해준 팬들이었다.
성배가 아무리 계산적인 인생을 산다고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영악할 뿐, 인성이 낙제점은 아니었다.
원래 성격을 생각하면 여기서 팬들을 끌어안고 엉엉 울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de Rode Duivels!! de Rode Duivels!! de Rode Duivels!!”
“les Diables Rouges!! les Diables Rouges!! les Diables Rouges!!”
“die Roten Teufel!! die Roten Teufel!! die Roten Teufel!!”
나란히 서서 감사를 표시하는 벨기에 대표팀을 향해 팬들은 목이 터져도 좋다는 마음으로 입을 모아 구호를 외쳐주었다.
세 가지 챈트가 터져 나왔지만, 모두 같은 뜻이었다.
벨기에는 세 가지 언어 공동체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각각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독일어로 붉은 악마를 단어였다.
“던져요, 그거! 빨리!”
“큰 것! 큰 거로 달라고! 그 조그만 걸 어디다 써!”
그리고 선수들은 팬들에게 달려가 손을 내밀었다.
팬들은 그런 선수들을 향해 본인들이 지니고 있던 물건들을 던져주었다.
바로 벨기에의 국기였다.
검정색, 노랑색, 빨강색의 삼색이 세로로 배치된 삼색기를 사용하는 벨기에의 국기들이 그라운드 위로 날아들었다.
“역시! 비율이 제각각이군! 이게 또 벨기에의 매력이지.”
“그럼, 그럼! 우리 벨기에는 자유로운 나라니까. 하하.”
벨기에 선수들은 국기를 하나씩 집어 들며 웃었다.
대부분의 국가가 가로 3, 세로 2 비율의 국기를 사용할 때, 벨기에는 15:13이라는 독특한 비율의 국기를 사용했다.
그런데 벨기에 당국도 왜 이런 비율을 채택했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통상적으로는 3:2 비율의 국기를 많이 썼고, 심지어 정부기관에서도 3:2 비율의 국기를 종종 쓰고는 했다.
당연히 시판되는 것들도 두 가지 종류였다.
““벨기에!! 벨기에!! 벨기에!!””
선수들은 두 가지 종류의 국기를 본인의 취향대로 두르고 그라운드를 돌았다.
머리 위로 히잡처럼 두른 선수, 등 뒤로 망토처럼 입은 선수, 머리 위로 높이 들어 흔드는 선수 등 다양한 모습이었다.
팬들은 그런 선수들과 함께 벨기에의 성공을 자축했다.
“음? 그거 줘봐요! 그래요, 당신!”
등에 망토처럼 두르고 그라운드를 뛰어다니던 성배는 무언가를 보고 멈췄다.
그리고 팬에게 그 물건을 달라고 요청했다.
“하하, 주성배 선수가 우리 대한민국 출신이어서 그런지, 간혹 태극기를 들고 있는 외국인 팬들이 보입니다. 유럽 축구 최대의 축제인 유로컵 결승전에 태극기가 보이니까 괜히 뿌듯한 것 같습니다.”
“아, 주성배 선수, 팬이 들고 있던 태극기를 받아 들었습니다. 등에는 벨기에 국기를 두르고, 손에는 태극기를 들고 그라운드를 활보하네요. 뿌리인 대한민국의 국기와 현재 자신이 뛰고 있는 벨기에의 국기로 자신을 설명하는 모습입니다.”
성배는 한 관중이 들고 있던 태극기를 건네받아 오른손에 들었다.
국경일이 되면 집 앞에 걸어놓는, 그 정도 크기의 태극기였다.
출신이 출신이다 보니, 한국에서 원정 오거나 유학 중인 한국인 외에 외국인 팬 몇 명도 태극기를 들고 경기장을 찾은 모습이었다.
“첼시! 유빈아! 이리 와! 빨리!”
벨기에 선수들은 각자의 아내, 자녀, 부모님, 여자친구 등을 그라운드 위로 불러 기쁨을 함께했다.
성배 역시 이제는 공인된 연인, 첼시와 이 자리에 유일하게 함께 한 가족 유빈이를 그라운드 위로 불러들였다.
“주!”
이미 한참 전부터 울고 있었던 첼시는 성배에게 빠르게 달려와 와락 하고 안겨들었다.
그 뒤에서 유빈이가 양옆을 두리번거리며 뻘쭘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뭔데? 왜 그래?”
첼시의 등을 토닥여주며 대충 물었다.
“... 이러다가 나 유명해지면 어떡해? 유명해지면 피곤한데.”
“푸하하하하!! 너, 너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같은데? 거울 보라고, 거울. 푸하하!!”
자신의 우승을 자기 일처럼 기뻐해 눈물까지 흘리는 연인.
자신의 놀림에 얼굴을 붉히며 펀치와 킥을 날려대지만,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고 인정해주는 여동생.
비록 지금 이 자리에는 안 계시지만,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도 항상 밀어주고 믿어주던 부모님.
‘행복하다.’
그리고 자신의 눈부신 성공까지.
정말 오랜만에 행복이라는 감정이 성배에게 찾아왔다.
어쩌면 이번 생에서 자신은 이 '행복'이라는 것을 느끼기 위해 이렇게 미친듯 달려온 것인지도 몰랐다.
앞으로의 나날이 오늘과 같다면, 그라운드에서 낭만을 찾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럴 리는 없겠지.'
당연한 이야기지만, 앞으로의 나날은 오늘과 같지 않을 것이었다.
축구계는 언제나 거친 정글이고, 오늘과 같이 평화로운 날은 아주 가끔 있는 특별한 날일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성배는 어느새 자신의 미소가 전생의 그것과 조금씩 닮아간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 낭만필드 - 35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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