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350 >
‘어쩐지. 이상할 정도로 못 따라오더라니.’
안 그래도 이상하게 생각하던 참이었다.
커리어 내에서 손에 꼽힐 정도의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던 오늘의 키엘리니가 이렇게 무력할 리 없었다.
안 그래도 월드클래스 수비수인 키엘리니였는데, 그날까지 왔으니 절대 이렇게 쉽게 제칠 수 없는 상황이었었다.
“키엘리니, 겨우 일어나긴 했는데... 아, 다시 주저앉습니다. 이거 이러면 오늘 더 뛰기 힘들 것으로 보입니다.”
쓰러졌던 키엘리니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동료들의 어깨에 기대 가까스로 일어섰지만, 금방 다리가 꺾이며 다시 주저앉았다.
고통으로 표정이 구겨진 것을 봐서는 아무래도 다시 복귀하기 힘들 것 같았다.
“어쩐지 오늘 움직임이 너무 좋다 싶었는데요. 결국, 원래부터 좋지 않았던 장딴지가 버티지 못한 것 같네요.”
지난 시즌 말에 당한 장딴지 부상으로 이번 유로컵 조별리그 초반 두 경기에 결장한 키엘리니였다.
조별리그 3차전에 복귀해 8강까지 두 경기에 출전했지만, 이 두 경기 모두 이탈리아가 마지막까지 온 힘을 쏟아내야 했던 경기였고, 키엘리니의 장딴지에는 적지 않은 부담이 가해졌다.
“오늘 컨디션이 너무 좋았어요. 지나칠 정도로. 아직 장딴지가 완벽하지 않았는데, 그것도 모르고 뇌에서 너무 빠른 반응을 요구했던 거죠. 그러다 보니 탈이 나고 말았네요.”
오늘 너무 좋았던 컨디션이 오히려 키엘리니의 발목을 잡았다.
몸이 완전하지 않은데 뇌에서는 몸이 완전할 때보다도 더 격하고 빠른 반응을 요구했고, 점점 부하가 걸린 키엘리니의 장딴지는 한계에 다다르며 무너졌다.
‘부상은 좋지 않은 소식이지만. 어쨌든 우리가 유리해진 건 사실이야.’
키엘리니의 부상은 이탈리아에게 심대한 타격이었다.
당연히 벨기에에게는 희소식이었다.
부상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알고 있는 같은 선수로서 상대편이라고는 해도 부상을 반가워할 순 없었다.
하지만 이걸 이용하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키엘리니가 부상으로 빠지고 발자레티를 투입한 이탈리아의 수비진은 평범한 포백으로 돌아갔다.
레프트백 자리에서 중앙과 측면 모두를 신경 쓰는 키엘리니가 없다면 이탈리아의 변형 포백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믿음직한 스리백을 가동하기 힘들어진 이탈리아는 어쩔 수 없이 라인을 한 단계 더 내리고 수비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피를로, 프리킥! 아... 피를로, 역시 이탈리아에서는 피를로가 하나 해줍니다.”
키엘리니의 부상 이탈은 이탈리아에게 분명 큰 타격이었다.
하지만 키엘리니의 부상 이후 첫 번째 득점을 만들어낸 팀은 벨기에가 아닌 이탈리아였다.
“벨기에에 주가 있다면 이탈리아에는 피를로가 있죠. 아, 기회는 정말 많지 않은데, 그 기회를 놓치지 않네요.”
이탈리아에는 피를로가 있었다.
경기 전체를 보았을 때, 오늘 피를로의 활약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했다.
체력적으로 부담을 느끼는 모습이 역력했고, 평소보다 몸이 무거워 보였다.
몇 차례 날카로운 패스로 기회를 만들어내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는 피를로입니다. 벨기에의 주, 이탈리아의 피를로. 각 팀에서 중심 역할을 해주는 두 선수가 한 골씩 기록하면서 결승전 무대를 뜨겁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결승전까지 왔으면 두 팀 모두 우승할 자격을 갖추었다고 봐야 했다.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가 우승컵을 들어 올리기 위해서는 해줘야 하는 선수가 자신의 역할을 해주고 예상치 못한 선수가 나타나야 했다.
“역습 상황에서 볼을 빼앗기지 않고 잘 지켜내며 프리킥을 얻어낸 디 나탈레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네요. 수적으로 절대적인 열세였기 때문에 파울을 얻어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을 텐데, 잘 버텨주었어요. 왜소한 체구로 전혀 밀리지 않았죠?”
키엘리니가 빠진 이후, 남은 10분을 잘 버티며 전반전을 끝낸 이탈리아는 후반 시작과 동시에 발로텔리를 빼고 안토니오 디 나탈레를 투입했다.
33세 시즌이었던 2009/10시즌, 29골로 득점왕을 수상한 데 이어 2010/11시즌에도 28골로 2년 연속 세리에A 득점왕을 수상한 선수였다.
“디 나탈레의 움직임이 나쁘지 않습니다. 물론, 이탈리아에게 공격 기회가 얼마나 주어질지는 모르겠지만,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디 나탈레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말까지 있었고, 오늘 극도로 부진했던 발로텔리를 대신해 이탈리아의 역습을 이끄는 중이었다.
선수로서 마지막을 준비해야 할 서른다섯의 나이지만, 이탈리아의 희망이라 불리는 발로텔리보다 나은 모습이었다.
‘차라리 마리오가 계속 뛰는 게 나았을 텐데.’
성배와 같은 맨체스터 시티 소속 선수인 발로텔리는 시즌 초반에는 에딘 제코와 세르히오 아게로에게 밀려 3옵션 스트라이커로 뛰었고, 중반부터는 로멜루 루카쿠에게까지 밀리며 4옵션으로 떨어졌다.
경기 감각이 떨어져 있다는 소리였다.
여기에 발로텔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성배와 콤파니의 수비까지 더해지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디 나탈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주고 있었다.
“어차피 프리킥이야! 이탈리아는 지금 프리킥이나 코너킥 말고는 방법이 없어! 지금 동점이 되었다고 해서 분위기까지 팽팽해진 건 아니니까 괜히 불안해하지 마!”
그러나.
디 나탈레가 카사노와 함께 무슨 짓을 하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미 경기는 벨기에 쪽으로 상당히 기운 상황이었다.
“그래! 괜히 다른 생각 하지 말고, 천천히 한 골만 더 넣자고! 이미 우리가 7할은 이겼어!”
이탈리아가 선택할 수 있는 전술은 이제 하나밖에 없었다.
비록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몇 번이나 날카로운 역습을 전개하고 있었지만, 시간은 벨기에의 편이었다.
여러 가지 불리한 점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팽팽한 경기를 펼치며 간혹 모골이 송연해지게까지 하는 이탈리아가 대단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분이었다.
“자, 여기서 한 골 넣는 사람이 영웅이다! 영웅이 되고 싶으면 한 골 넣으라고!”
성배와 반 바이텐이 벨기에 선수들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성배는 한 마디를 더 보탰다.
평소였으면 선수들이 들뜨는 것을 어떻게든 막으려 했겠지만, 지금의 성배는 오히려 선수들에게 바람을 넣었다.
자신감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만 철저히 해주면 시간이 흐를수록 흐름이 넘어올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가 동점 골을 기록했지만, 여전히 경기 분위기는 벨기에가 잡고 있었다.
벨기에에게 주도권을 내준 이탈리아는 억지로 주도권을 가져오려 하지 않고 라인을 내린 채 수비에 집중했다.
“데푸르, 펠라이니에게 볼 투입! 펠라이니, 우직하게 전진!”
이탈리아의 미드필더들이 벨기에 미드필더들의 활동량을 따라오지 못하면서, 세 명의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가 종횡무진 필드를 헤집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데푸르, 비첼, 펠라이니 세 명의 미드필더들은 활동량으로 이탈리아 미드필더들을 압살하고 경기를 지배했다.
“펠라이니의 중앙 돌파! 오른쪽의 메르텐스에게!”
피를로와 함께 터프한 데 로시까지 붙었지만, 펠라이니는 오직 힘으로 그들의 마크를 이겨내며 전진했다.
페널티박스 진입 직전까지 전진한 펠라이니는 오른쪽으로 벌려주며 기회를 이어주었다.
“페널티박스 안으로 진입! 수비 뒤쪽으로 돌아 들어가는 루카쿠를 봅니다!”
메르텐스가 천천히 내려와 박스 안으로 진입을 시도할 때, 루카쿠는 수비수들의 이목을 피해 조용히, 하지만 빠르게 메르텐스의 등 뒤로 돌아 들어갔다.
“메르텐스가 넣어주고, 루카쿠!! 루카쿠!! 한 번 접었습니다!”
이탈리아 수비수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루카쿠는 골대 바로 앞까지 전진했지만, 발자레티와 보누치, 데 로시가 모든 슈팅 코스를 차단한 덕분에 슈팅을 시도하지 못했다.
한 번, 그리고 두 번까지 볼을 접었지만, 이탈리아 수비수들은 끈질기게 그 앞을 막아섰다.
“로멜루! 뒤!”
그때, 박스 중앙에서 버티고 서있던 펠라이니가 루카쿠에게 소리쳤다.
펠라이니의 말대로 뒤를 돌아본 루카쿠는 지체하지 않고 뒤로 패스했다.
“뒤쪽으로! 주, 달려들면서 슈팅!”
이탈리아가 뒤로 물러난 만큼, 벨기에는 앞으로 전진해 있었다.
당연히 성배도 상당히 위로 올라왔고, 충분히 공격에 참여할 상황이 되었고, 능력도 있었다.
‘반대편!’
루카쿠가 볼을 내주었을 때, 성배는 오른쪽 측면에서 방향을 꺾어 중앙으로 달려들던 중이었다.
센스 있게 패스를 느리게 넘겨준 루카쿠 덕분에 성배가 볼과 만난 곳은 페널티박스에서 2m도 떨어지지 않은 지점이었다.
“그대로 슈, 한 번 접고 안으로!”
패스를 받아 논스톱으로 때려도 되겠지만, 몸을 날린 마르키시오의 태클을 피해 안 쪽으로 한 번 더 치고 들어갔다.
워낙 루카쿠가 깊게 파고들어 준 덕분에 이탈리아 선수들 대부분이 박스 안에 있었고, 한 번을 더 치고 들어갔음에도 성배에게 붙어주는 선수가 없었다.
“왼발로 강하게! 슈팅!! 골! 골입니다! 주, 오늘 경기 두 번째 골! 벨기에, 다시 한 번 리드를 잡아 나갑니다!”
강력한 왼발 슈팅이 터져 나왔다.
중력을 무시하듯 마지막까지 떠오른 성배의 슈팅은 이탈리아의 골망에 걸린 다음에야 그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다행이다. 역시 슈팅은 어려워.’
성배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멋지게 들어가긴 했지만, 역시 중거리 슈팅은 자신이 없었다.
물론, 워낙 킥이 좋은 선수였기에 어지간한 선수보다는 슈팅도 좋은 편이었다.
‘한 2년 만인가.’
한 시즌 두 자릿수 득점을 올려주는, 수비수라고 할 수 없는 엄청난 득점력을 보유한 성배였지만, 대부분이 프리킥 득점이었다.
필드골 상황에서, 그것도 페널티박스 바깥에서 중거리 슈팅으로 골을 넣은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여기서 주가 다시 한 번 득점을 기록하면서 벨기에에게 리드를 안겨줍니다! 오늘 경기 멀티 골! 역시 주장! 역시 우리의 믿음직한 주장입니다!”
“이걸로 득점 1위네요. 하하, 이러다가 수비수가 득점왕까지 차지하는 거 아닐까요? 그건 아니겠죠?”
성배의 득점은 다시 한 번 벨기에에게 리드를 안겨주면서 가까스로 동점 골을 기록한 이탈리아의 사기를 꺾을 수 있는 중요한 득점이었다.
그리고 이번 대회 세 골로 크로아티아의 마리오 만주키치, 독일의 마리오 고메즈, 팀 동료 로멜루 루카쿠와 함께 득점 1위 자리에 올라서게 되는 득점이기도 했다.
[IN - 5. 티아고 모타 / OUT - 18. 리카르도 몬톨리보]
“아, 이탈리아. 후반 11분에 벌써 마지막 교체 카드를 꺼내 듭니다.”
후반 11분, 이탈리아는 4-3-1-2에서 1의 자리에 위치한 리카르도 몬톨리보를 빼고 티아고 모타를 투입했다.
전반전에 키엘리니의 부상으로 발자레티를 투입하며 한 장, 후반 시작과 동시에 발로텔리를 빼고 디 나탈레를 투입하며 한 장의 카드를 사용한 이탈리아의 마지막 교체 카드였다.
“어쩔 수 없어요. 경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이탈리아의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거든요? 이미 주전 선수들 절반 이상이 체력적인 부담에 몸이 무거워져 있어요.”
조별리그 세 경기를 모두 전력으로 뛰었고, 8강과 4강에서는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을 연달아 펼쳐야 했다.
게다가 조별리그 세 경기는 폴란드에서, 8강은 우크라이나에서, 4강은 다시 폴란드에서, 그리고 결승은 또 다시 우크라이나에서 치르게 되어버린 일정 역시 이탈리아의 발목을 잡았다.
승승장구하며 체력을 안배하는 여유를 보였고, 조별리그부터 8강까지는 폴란드에서, 4강과 결승은 우크라이나에서 치르며 단 한 번의 이동에 그친 벨기에와 비교하면 체력적인 손해가 막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의 골킥으로 경기가 재개됩니다. 부폰, 앞으로 짧게 패스합니다.”
루카쿠의 슈팅이 골라인 바깥으로 벗어나면서 이탈리아에게 골킥이 주어졌다.
비록 득점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점점 벨기에의 공격 빈도와 점유율이 높아지고 있었다.
“우리 공격수들, 전방에서부터 강력한 압박을 펼쳐주면서 이탈리아의 수비수들을 괴롭힙니다.”
“저런 모습은 정말 좋아요. 세계 최고의 수비력을 보유한 이탈리아가 뒤로 물러나 있을 때, 저렇게 해주지 않으면 그 수비를 뚫기가 힘들죠.”
루카쿠, 메르텐스, 아자르 세 선수는 이탈리아의 수비진이 편하게 볼을 돌릴 수 없도록 전방에서부터 강력한 압박을 걸어주었다.
여기에 세 명의 미드필더까지 더해지니 이탈리아 선수들은 라인을 내렸음에도 어쩔 수 없이 볼을 앞으로 내보내야 했다.
“피를로, 전방의 모타에게.”
결국, 이탈리아는 볼을 앞으로 연결했다.
3선의 피를로 역시 강력한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벨기에가 열어준 루트로, 한 단계 위의 모타에게 연결되는 루트로 패스할 수밖에 없었다.
“앞뒤에서 압박! 모타, 피해 보려 하지만, 그대로 넘어집니다. 비첼과 주의 합동 수비에 무기력하게 볼을 빼앗기고 마는 티아고 모타!”
압박에 고전하는 것은 교체 투입된 모타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타가 볼을 잡은 순간, 중앙에서 비첼이, 오른쪽에서는 성배가 순식간에 그 주위를 에워쌌다.
두 선수의 압박이 완성되기 전에 빠져나가려던 모타는 결국 두 선수 사이를 뚫지 못하고 그대로 넘어졌다.
“흐르는 볼은 주가 잡아냅니다. 주, 전방을 살핍니다!”
볼을 잡아낸 성배는 다시 공격으로 전개하기 위해 빠르게 동료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런 성배의 눈에 한 선수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 낭만필드 - 350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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