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349 >
‘제발 닿아라. 아직 너무 빠르다고.’
수만 명의 관중, 아니 지금 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수십, 수백, 수천만 축구팬 모두의 시선이 성배와 볼에 집중되었다.
통통 튀면서 굴러가는 볼의 궤도는 골대 안쪽을 향했다.
이대로 굴러간다면 무조건 골이 되는 궤도였다.
마지막까지 쫓아 달려가는 성배가 볼을 걷어내지 못한다면, 이탈리아가 리드를 잡고 앞서나갈 수 있었다.
‘닿아라! 닿아!’
여기서 더 지체하면 볼이 골라인을 넘어갈 상황이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전력 질주해 최대한 볼에 접근한 성배는 그제야 몸을 날리며 발을 뻗었다.
“주, 주가 마지막까지! 아!! 걷어냈습니다!! 벨기에의 수호신, 벨기에의 상징, 주성배가 카사노의 골을 막아냅니다! 한 골을 막아내는 주성배!”
“닿았어요! 닿았어! 주가 볼을 대신해 자신이 직접 그물을 흔들고, 그 대신 볼은 골대 바깥으로 걷어냈어요!!”
닿았다.
몸을 날리며 발을 뻗은 성배는 오른발로 볼을 걷어냈고, 혹시나 골대가 아쉬워할까봐 볼 대신 자신이 골망을 흔들었다.
완벽한 한 골을 막아낸 것이었다.
“나이스! 역시 주성배!”
“좋아, 끝내줬어! 역시 완벽한 수비수야!”
실점을 직감했던 메뇰레와 반 바이텐이 성배에게 달려들어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콤파니 역시 등판을 거세게 때려대며 슈퍼 세이브를 칭찬했다.
“정신 차려! 패스 한 방에 흔들리면 경기 전체가 흔들린다고! 이탈리아는 언제든 이런 패스를 찔러줄 수 있는 팀이니까 공격수 마크 항상 신경 쓰고!”
안타까움에 땅을 치는 카사노를 흘깃 바라본 성배는 슈퍼 세이브에 취하지 않고 동료들을 질책했다.
수비수 입장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경기는 여러 차례의 슈퍼 세이브가 나온 경기가 아니었다.
단 한 번의 슈퍼 세이브도 나오지 않은 경기였다.
슈퍼 세이브가 나왔다는 것 자체가 상대에게 기회를 내주었다는 이야기였고, 슈퍼 세이브는 항상 나올 수 없는, 어느 정도 운에 좌우되는 것이었기에 실점과 다를 바 없었다.
“공격수 둘만 막으면 되는데 그걸 왜 못해! 측면이고 중앙이고 둘이 다 하는데!”
윙어가 없는 이탈리아의 전술상 카사노와 발로텔리의 투톱이 번갈아 좌우 측면으로 빠져야 측면 공격이 이루어졌다.
이 둘만 마크하면 이탈리아의 마무리 작업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정신 똑바로 챙겨! 마지막에 후회하지 말고!”
성배의 일침은 벨기에 선수들을 일깨웠다.
자신도 모르게 흐트러졌을지도 모르는 마음을 다잡은 벨기에 선수들의 눈빛에서는 엄청난 기백이 뿜어져 나왔다.
“다시 한 번 피를로에게 연결하는 이탈리아, 비첼이 곧바로 강력한 압박 시도! 결국, 다시 뒤로 돌립니다.”
성배의 질타에 정신무장을 다시 한 벨기에 선수들은 엄청난 투지를 보이며 이탈리아를 몰아붙였다.
엄청난 활동량으로 120분 내내 뛰어다녔던 스페인전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은 활동량이었다.
“이탈리아, 벨기에의 압박에 고전합니다. 안 그래도 팀 컨디션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벨기에의 이런 움직임은 이탈리아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역시 노인정이라 불렸던 선수단을 재편, 상당히 젊은 선수단을 만들어냈지만, 8강에서 잉글랜드, 4강에서 독일과 연달아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을 펼치며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안 그래도 정신력으로 뛰고 있는데, 벨기에가 이런 식으로 경기를 펼치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탈리아 역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주고 있어요. 지난 일주일 동안 두 번의 승부차기를 경험해 체력적으로 힘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그걸 감안하면 굉장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중이죠.”
체력적으로 문제가 없을 수 없는 이탈리아였기에 안 그래도 수비적이었던 전술을 더욱 수비적으로 운용하고 있었다.
이탈리아가 운용할 수 있는 최선의 전술이었다.
그 증거로 경기의 주도권은 벨기에가 잡고 있었지만, 이탈리아 역시 실점은 물론 결정적인 기회도 내주지 않고 잘 버텨내는 중이었다.
“메르텐스, 다시 한 번 돌파 시도합니다.”
“사실, 이번 대회에서 벨기에 공격의 핵심이 되어줄 선수는 아자르라고 봤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렇지 않았거든요? 아자르를 대신해 공격을 이끄는 메르텐스가 이제 뭔가 해줘야 해요. 키엘리니가 절대 쉬운 상대는 아니지만,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에요.”
대회 전까지만 해도 아자르에 비해 메르텐스의 인지도는 상당히 떨어지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 생각보다 부진했던 아자르와는 달리 매 경기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인지도를 끌어올렸다.
메르텐스는 1골 3어시스트를 기록 중이었는데, 3어시스트를 기록한 아자르와 공격 포인트에서는 큰 차이가 나지 않았으나, 경기 내 영향력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아직 아자르의 인지도를 넘어설 순 없었지만, 덕분에 격차를 꽤 많이 좁힐 수 있었다.
“빠르게 측면을 파고들지만, 아. 키엘리니... 정말 단단합니다. 오늘의 키엘리니는 뚫릴 것 같지 않은 난공불락의 요새입니다.”
하지만 그런 메르텐스도 아직 키엘리니를 상대로는 역부족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날’을 맞이한 키엘리니를 상대로는 그 어떤 선수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무패 우승을 달성한 유벤투스가 자랑하는 스리백을 그대로 이식한 뒤, 오른쪽에 아바테를 박아둔 것이 이탈리아의 포백인 만큼, 동료들과의 호흡마저 완벽했다.
“유벤투스와 아주리의 버팀목이라 할 수 있는 선수죠. 역시 아주리 군단이 위기에 빠지니 전면에 등장했네요.”
맨체스터 시티에 비견될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비진을 보유한 유벤투스의 핵심 센터백이자 비안코네리, 유벤투스의 부주장인 키엘리니는 이탈리아의 자존심과 같았다.
“일단 이탈리아의 수비가 물샐 틈 없이 단단해 보이죠? 이런 수비진을 뚫어내기 위해서는 이들이 예상을 벗어난 공격이 필요해요. 예상할 수 있는 공격으로는 이탈리아의 수비진을 흔들리가 쉽지 않아 보이네요.”
카테나치오의 종주국, 이탈리아는 시대마다 세계 최고의 수비수를 보유하고 있었다.
지아친토 파체티, 가에타노 시레아, 프랑코 바레시, 파올로 말디니, 알레산드로 네스타로 이어지는 계보가 대표적이었다.
비록, 네스타 이후 이 명맥은 끊겼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지만, 이탈리아의 축구팬들은 키엘리니를 그 후계자로 밀어주었다.
그리고 그 키엘리니와 비교해도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바르잘리와 보누치까지 합세한 이탈리아의 수비진은 벨기에의 공격을 잘 막아내고 있었다.
벨기에는 공격하고 이탈리아는 수비하는 경기 양상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공격하는 벨기에도, 수비하는 이탈리아도 딱히 인상적인 장면을 보여주지 못하는 경기였다.
양 팀이야 엄청난 긴장감 속에서 경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팬들이 보기에는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주, 직접 볼을 몰고 하프라인까지 올라갑니다. 역시 스피드가 뛰어난 선수입니다.”
잘 풀리지 않는 공격에 답답해진 성배는 수비 진영에서 볼을 잡고 직접 전진했다.
드리블이 뛰어나다고는 볼 수 없지만, 스피드만큼은 뛰어난 성배였기에 순식간에 하프라인 근처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런 성배를 향해 몬톨리보와 피를로가 앞뒤에서 달려들었고, 성배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중앙에서 대기하던 메르텐스에게 연결합니다. 메르텐스, 이탈리아 진영을 향해 몸을 돌립니다.”
이번에는 데 로시와 마르키시오가 메르텐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네 명의 중앙 미드필더는 유기적으로 한 몸처럼 움직여주면서 벨기에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 세웠다.
‘이거 잘하면 되겠는데?’
메르텐스에게 볼을 넘겨준 성배는 수비진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성배는 키엘리니와 바르잘리 사이의 넓어진 공간을 눈에 담고 있었다.
잘하면 저 사이로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았어. 일단 한 명.’
성배는 순간적으로 가속을 시작해 전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키엘리니의 옆을 바람처럼 지나쳤다.
키엘리니가 생각보다 너무 쉽게 나가떨어졌지만, 좋으면 좋았지, 나쁠 일은 없었다.
“그래. 계속 드리스만 보고 있으라고.”
키엘리니를 제쳐낸 성배의 다음 목표는 바르잘리와 보누치 사이의 공간이었다.
바르잘리는 데 로시와 함께 메르텐스에게서 나올 패스를 막아야 했기 때문에 성배에게 크게 신경 쓸 수 없었다.
보누치가 성배를 대신 마크하기 위해 올라오고 있었지만, 정점에 이른 성배의 스피드는 그보다 먼저 두 선수 사이를 뚫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메르텐스, 찔러주는 침투 패스! 뚫렸습니다!”
“뚫렸어요! 연결됐죠! 주! 주에게!”
한발 빠른 메르텐스의 패스는 태클을 시도한 데 로시의 발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했다.
성배의 침투를 뒤늦게 알아챘지만, 메르텐스를 견제하기 위해 그를 따라갈 수 없었던 바르잘리가 뻗은 발도 볼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래! 이거지!’
마지막으로 보누치는 성배보다 한 타이밍, 아니 반 타이밍 정도 늦어버렸다.
그리고 그 반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절묘한 패스를 찔러준 메르텐스의 패스 역시 환상적이었다.
성배가 패스를 받았을 때, 그 앞에는 부폰밖에 없었다.
“그대로 슈팅!! 고--올! 골! 골! 골! 벨기에, 선취 골을 터뜨립니다! 선취 골의 주인공은 벨기에의 캡틴, 주성배입니다!”
“역시 하이라이트의 사나이죠! 오늘 같은 날은 주가 뭔가 해줄 줄 알았어요! 이런 날 뭔가 해줄 선수가 주밖에 더 있나요? 하하하!”
아무리 부폰이라도 완벽한 일대일 상황에서 실점을 막아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보누치가 성배의 앞을 막아서지 못하고 옆에서 따라붙었을 때, 이미 결과는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가속이 완료되어 최고 속도로 달리는 성배를 뒤늦게 따라붙기 시작한 보누치가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성배에게 볼이 연결된 시점에서 보누치는 이미 성배를 견제할 수 없을 정도로 밀려나고 말았다.
“엄청난 침투였습니다! 하프라인 부근에서 메르텐스에게 패스한 이후, 그라운드의 절반을 전력으로 질주했습니다! 주의 폭발적인 질주에 키엘리니, 바르잘리, 보누치, 유벤투스와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세 명의 센터백이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성배가 한 일은 그저 달리는 것밖에 없었다.
아무리 스피드가 빠른 선수라지만, 그냥 달리는 것만으로 월드클래스의 수비수들을 떨쳐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선수도 아닌 성배라면 단지 그것만으로 세 명의 선수를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타이밍과 공간 포착, 이 두 가지가 성배의 달리기를 보좌해주었고, 그냥 달릴 뿐인데 세 선수가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게 바로 예상할 수 없는 공격이죠! 풀백이 하프라인에서부터 골대 바로 앞까지 단독으로 질주할 거라 생각한 사람이 있을까요? 없어요! 주니까 가능한 거거든요!”
이탈리아의 수비진을 흔들 수 있는 예상이 불가능한 공격.
바로 이것이었다.
성배의 움직임은 이탈리아의 수비진을 아주 잠깐이나마 당황하게 했고, 결과적으로 선취 골을 가져왔다.
“어? 키엘리니가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어디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오늘 완벽한 수비력을 보이고 있었음에도 이상할 정도로 맥없이 뒤처진 키엘리니였다.
그 키엘리니가 그라운드 위에 누워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 낭만필드 - 34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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