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348 >
“이탈리아는 분명 수비적으로 나오려 하겠지. 수비만큼은 세계 최고이기도 하고, 선수 구성도 수비에 더 어울리는 팀이기도 하고.”
이탈리아의 팀 컬러는 언제나 수비를 먼저 단단히 하고 그다음에 공격을 노리는 형태였다.
그것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피를로-마르키시오-데 로시에 모타까지 버티는 미드필드가 제일 문제야. 마루앙, 악셀, 스티븐. 그래도 버틸 수 있지?”
“당연하죠. 적어도 밀리진 않는다는 건 확실하니까요.”
“이겨보죠, 뭐. 벨기에가 유럽 최강으로 가는 이 시점에서 미드필드도 최강 한 번 찍어야지 않겠어요?”
“수비만 유럽 최강이면 자존심 상하니까.”
안드레아 피를로, 다니엘레 데 로시에 클라우디오 마르키시오까지 버티는 이탈리아의 중원은 세계 어느 팀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았다.
피를로는 말할 필요도 없었고, 데 로시는 피를로 은퇴 후 중원의 핵심이 되어줄 거라 기대받는 로마의 황태자였다.
마르키시오 역시 저평가의 아이콘으로 공수 모두 뛰어난 세계적인 육각형 미드필더였다.
약할 수가 없는 조합이었다.
“좋아. 그럼 너희가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이야기할 테니 잘 들어. 피를로를 봉쇄하면 데 로시를 중심으로 플레이할 텐데, 그러면 데 로시까지 마크하면 돼. 어때? 쉽지?”
이런 세 명에 백업으로 터프한 미드필더 티아구 모타까지 버티는 이탈리아의 중원은 유벤투스의 무패우승을 이끈 중원 조합 피를로-마르키시오에 데 로시와 모타를 더한 것이었다.
유벤투스의 약점은 피를로의 경기 조율에 지나치게 의존해 피를로가 막히면 경기 전체가 답답해진다는 것.
하지만 데 로시는 피를로 못지않은 월드클래스 미드필더였고, 피를로가 막히면 대신 공격전개를 맡아줄 수 있었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중원을 유벤투스 중원의 상위 호환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 그게 전부입니까? 자신은 있지만, 너무 아무 대책 없는 것 같은데.”
설마 이게 끝은 아니겠지, 하는 얼굴로 되묻는 펠라이니였다.
아무리 자신이 있다지만, 피를로-데 로시-마르키시오의 라인은 부담스럽지 않을 수가 없는 강력한 라인이었다.
“하하, 당연히 농담이지.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벨기에의 미드필더들 역시 어느 팀과 비교해도 크게 밀리지 않는 유능한 선수들이었지만, 월드클래스 미드필더만 세 명이 모인 이탈리아에게는 한 수 접어줄 수밖에 없었다.
펠라이니, 비첼, 데푸르, 뎀벨레 등도 월드클래스로 올라설 잠재력은 갖추고 있었지만, 이미 월드클래스에 올라선 지 한참 된 이들을 상대하면서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빌모츠 감독은 그런 선수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농담을 던졌다.
“오늘 티미 대신 악셀을 넣은 건 내게도 생각이 있어서라고. 티미의 체력이 떨어진 것도 있지만.”
“확실히 나이를 먹으니 힘들어요, 마크. 빼줘서 고맙다고요, 하하.”
서른다섯의 시몬스는 확실히 일정이 널널하지는 않은 토너먼트를 치르며 체력적으로 부담을 느끼는 모습이었다.
자신의 몸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아는 시몬스는 먼저 빌모츠 감독을 찾아가 이탈리아전에서 빠지는 게 낫겠다고 말했고, 빌모츠는 그런 시몬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 벨기에의 역사를 새로 쓸 기회인데 티미도 빠지고 싶진 않았겠지.’
팀을 위해 자신의 욕심을 버린, 숭고하기까지 한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
선수 개인의 퍼포먼스와 경력은 월드클래스 선수들과 비교하면 한참 미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벨기에 선수단의 상징이라 불리며 레전드 취급까지 받는 이유가 있었다.
“자, 체력과 활동량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티미가 이렇게 힘들어한다는 건 다른 말로 하면 뭘까? 피를로도 힘들 거라는 이야기겠지. 그걸 노린다.”
피를로의 나이도 서른셋으로 적지 않은 편이었다.
결승까지 정말 힘겹게 올라온 이탈리아는 주전 선수들에게 휴식을 줄 여유가 없었다.
유벤투스 소속으로 시즌 내내 혹사에 가깝게 많이 뛰었던 피를로의 체력은 바닥이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피를로가 아니더라도 이탈리아보다 조별리그 3차전에서 주전 선수들에게 휴식을 주었던 데다가 4강 이후 하루를 더 쉰 벨기에가 체력적으로 우위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중원의 거의 모든 플레이가 수비형 미드필더 포지션에서 이루어지니까 굳이 수비형 미드필더를 두는 것보다는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를 투입하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했고. 그러니까 셋 다 미친개같이 뛰라고. 활동량으로 중원을 가져와.”
이탈리아의 전술은 변형 4-3-1-2였다.
포백부터가 변형 포백으로, 센터백 출신 키엘리니를 레프트백에 두고 바르잘리, 보누치와 함께 쓰리백처럼 운용했다.
라이트백인 아바테만 오버래핑에 참여하는 식이었는데, 센터백인 베르마엘렌을 풀백으로 두고 라이트백 성배만 공격에 가담하는 벨기에의 포백과 세세한 부분은 좀 달라도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포백 위 수비형 미드필더 포지션에서 데 로시와 피를로, 마르키시오가 자리 잡았고, 그것보다 한 단계 위에 발로텔리, 카사노와 중원 선수들을 이어주는 몬톨리보가 있었다.
이탈리아는 공격 자원이 둘밖에 없다고 봐도 무방했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려면 수비형 미드필더보다는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가 효과적이었다.
“어차피 측면 공격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니까 풀백들은 공격 열심히 나가주고. 아마 오랜만에 우리가 주도적으로 공격하는 경기가 될 거야. 조별예선 이후 처음이겠지.”
어느 팀을 만나든 수비적으로 경기를 운영하는 팀이 이탈리아였기 때문에 이번 경기에서 벨기에는 오랜만에 공격의 주도권을 잡고 경기를 풀어나갈 것으로 보였다.
5년 전 이탈리아를 상대로 승리했을 때처럼 중원 장악을 우선으로 하겠지만, 공격도 적극적으로 펼칠 생각이었다.
“이탈리아의 수비가 강하긴 하지만, 너희라면 충분히 뚫어낼 수 있을 거야. 박스 투 박스라서 투입한 거니까 중원 싸움은 물론이고 공격에도 참여해주고.”
루카쿠, 아자르, 메르텐스와 세 명이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에 효율적인 공격력을 보여주는 풀백 성배까지.
이탈리아의 수비가 강력하다고는 하지만, 벨기에의 공격 역시 약하지 않았다.
“자, 이제 한 경기만 더 이기면 끝이야. 이기든 지든 오늘이 마지막 경기니까 다 쏟아부으라고. 다음 시즌이 걱정되기도 하겠지만, 어차피 이제 한 경기 남았고, 오늘 어떻게 뛰든 다음 시즌에 차이는 없어. 경험자로서 하는 말이니까 의심하지 말고 그냥 욕심껏 뛰어.”
유로 2012의 마지막 경기.
이기든 지든 이 경기가 이번 대회의 마지막 경기였다.
이미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지만, 벨기에 선수단은 더 만족스러운 결과를 원하고 있었다.
***
“4승 1무의 성적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벨기에와 1승 4무의 성적으로 올라온 이탈리아의 결승전이 드디어 시작되었습니다.”
이탈리아는 최근 이탈리아의 상징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변형 4-3-1-2 전술로 경기에 나섰다.
중원에 힘을 주는 벨기에의 4-3-3 전술과 이탈리아의 전술 모두 중원 장악에 초점을 둔 전술이었기 때문에 미드필드 진영에서 주도권 다툼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볼 잡고 뒤에서부터 올라오는 비첼! 데 로시가 그 앞을 가로막습니다.”
시몬스를 대신해 출전한 비첼은 경기 초반 꽤 인상적인 활약을 펼쳐주고 있었다.
터프함과 많은 활동량으로 유명한 펠라이니, 데푸르에 비첼마저도 그들과 함께 공격 진영과 수비 진영을 가리지 않고 신나게 뛰어주니 이탈리아도 정신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비첼, 중앙으로! 데푸르에게 연결!”
비첼의 패스가 데푸르에게 연결되었고, 마르키시오와 데 로시가 양옆에서 에워싸며 데푸르를 압박했다.
양 팀의 중원 싸움은 지금처럼 패스워크와 강력한 압박의 대결로 전개되고 있었다.
어느 팀이 볼을 소유하고 어느 팀이 수비하든 상관없이 같은 양상이었다.
“데푸르, 밀어주고 루카쿠의 리턴! 데푸르!”
마르키시오와 데 로시의 압박이 들어오기 전, 데푸르는 한 타임 빠르게 루카쿠에게 볼을 연결했다.
바르잘리와 보누치의 마크를 등으로 버텨내면서 굳건히 서 있던 루카쿠는 안정적으로 볼을 받아냈고, 패스 후 중앙으로 침투하는 데푸르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뒷공간 쪽에서, 슈팅!! 부폰! 잔루이지 부폰! 훌륭한 선방입니다! 역시 부폰!”
이탈리아의 전열을 순간적으로 흐트러뜨리고 파고들어 슈팅까지 시도한 데푸르였지만, 슈팅은 아쉽게도 부폰의 선방에 막혀버리고 말았다.
물론, 좋은 플레이이긴 했어도 득점까지 기대하기엔 무리인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부폰이 아니었다면 억지로라도 들어갈 수 있는 슈팅이었다.
“역시 부폰이네요. 전반 초반에 선취 골을 넣고 편하게 경기를 이끌 기회였는데, 부폰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어요.”
잔루이지 부폰, 혹은 ‘잔류의지’ 부폰.
“사실 축구는 매우 간단한 스포츠다. 내가 모든 슛을 막아내면 우리 팀이 지는 일은 없으니까.”라는 말을 남긴 불세출의 명 골키퍼였다.
축구가 근대와 과도기를 넘어 현대적으로 발전한 이후, 세계 최고의 골키퍼라 불리는 선수이기도 했다.
원래 독일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세계적인 골키퍼 강국이 바로 이탈리아였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에 걸쳐 황금시대가 열렸고, 카를로 쿠디치니, 지안루카 팔류카, 안젤로 페루찌, 크리스티안 아비아티, 프란체스코 톨도, 살베토레 시리구 등 월드클래스 골키퍼들이 우르르 쏟아졌는데, 이들 대부분이 부폰 한 명에게 앞길이 막혀 A매치에 10경기도 채 출전하지 못했다.
“이탈리아의 카테나치오는 부폰으로 완성되는 거거든요? 벨기에가 오늘 경기에서 승리하려면 부폰까지 뚫어내야 해요. 부폰의 방어를 뚫지 못하면 오늘 경기 어려워요.”
2001년, 11년 전에 무려 5,400만 유로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으로 유벤투스에 합류한 부폰의 이적료는 10년 뒤인 지금 시점에서 월드클래스 골키퍼라는 마누엘 노이어의 이적료 2,750만 유로보다 두 배 많은 골키퍼 역대 최고 금액이었다.
그런데 이 금액을 지출한 유벤투스가 열 배는 이득을 보았다고 할 정도로 부폰은 뛰어난 선수였다.
벨기에는 이 부폰을 뛰어넘지 못하면 우승을 꿈꿀 수 없었다.
“오늘도 부폰과 이탈리아의 카테나치오는 굳건한 모습입니다. 벨기에는 어떻게든 이 굳건한 수비벽을 뚫어내야 합니다. 그래야 앙리 들로네컵을 손에 들 수 있습니다.”
아주리의 수호신, 부폰을 필두로 키엘리니, 바르잘리, 보누치, 아바테 등 뛰어난 수비수들이 이탈리아의 골문을 지켰다.
벨기에의 우승을 방해하는 최종 보스들이었다.
“벨기에의 라인이 조금 더 높죠? 이탈리아보다는 벨기에가 공격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토너먼트 들어서는 처음 있는 일이네요.”
이탈리아가 워낙 라인을 낮게 잡아가다 보니, 벨기에 선수들은 자연스럽게 위로 올라가 경기를 펼치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움직임에 끌려가는 느낌도 없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를 세 명이나 활용한 덕분에 수비와 미드필더 사이 간격이 그리 넓지는 않았다.
“펠라이니, 전방으로 패스해준다는 것이 피를로에게 커트! 단번에 앞쪽으로 찔러줍니다!”
하지만 이렇게 중원에서 패스가 끊기면 이야기가 달랐다.
피를로, 데 로시, 마르키시오, 몬톨리보로 이루어진 이탈리아의 중원은 네 선수 모두가 세계적인 수준의 롱패스를 보유하고 있었다.
물론, 가장 뛰어난 선수는 피를로였고, 하필이면 펠라이니의 패스가 피를로에게 끊기고 말았다.
“한 번에 최전방 연결! 카사노! 빠르게 돌파합니다!”
볼을 커트한 뒤, 0.5초 후 패스 루트를 찾았고, 1초 후 바로 패스를 투입했다.
그리고 그 패스는 정확하게 카사노의 발밑에 도달하며 위력적인 역습의 시발점이 되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정확한 패스였다.
“카사노, 달리고! 콤파니가 따라갑니다!”
콤파니도 센터백 치고는 느리지 않았지만, 악마의 재능이라는 카사노를 따라가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나마 콤파니였기에 이 정도 따라붙어 주는 것이지, 반 바이텐이었으면 이미 승부가 끝났을 것이었다.
‘빌어먹을 축구 도인.’
눈을 감다시피 하고 플레이하는 주제에 저렇게 정확한 패스라니.
피를로를 향한 원망을 쏟아내는 성배 역시 반대편에서 미친 듯이 달려서 복귀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카사노는 성배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강력한 슈팅! 미뇰레, 손끝으로!”
그나마 콤파니가 옆에서 마지막까지 방해해준 덕분에 카사노의 슈팅도 완벽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악마의 재능’이라는 말이 괜히 붙은 것은 아니었고, 미뇰레도 살짝 건드리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미뇰레의 손끝을 스친 슈팅은 속도만 아주 살짝 떨어진 채 벨기에의 골문을 향해 굴러갔다.
< 낭만필드 - 34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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