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347화 (235/356)

< 낭만필드 - 347 >

“좋았어! 역시 피를로!”

“그렇지! 피를로가 페널티킥을 놓칠 리 없지!”

하루 먼저 결승 진출을 확정한 벨기에 선수단은 선수단 숙소에 모여 이탈리아와 독일의 준결승전을 시청했다.

승부차기 마지막 키커로 나선 피를로의 슈팅이 독일의 골망을 갈랐을 때, 벨기에 선수단은 일제히 만세를 부르며 이탈리아의 결승 진출에 환호했다.

“독일보다는 이탈리아가 쉽지. 꾸역꾸역 이겨서 올라오는 팀도 무섭긴 하지만, 그래도 독일은 부담스러우니까.”

펠라이니의 말에 다른 선수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독일과 이탈리아 중 한 팀을 골라서 상대할 수 있다면 백이면 백 이탈리아를 고를 것이었다.

이탈리아의 전력이 전성기와 비교하면 많이 떨어지기도 했고, 그만큼 독일의 전력이 강하기도 했다.

“경기하는 것만 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과연 이탈리아가 그렇게 쉬운 팀일까?”

하지만 반 바이텐과 시몬스 등 경험 많은 선수들과 코치, 빌모츠 감독 등은 이탈리아를 쉽게 생각하지 않았다.

독일보다는 낫다, 까지가 끝이었다.

토너먼트에서 보여주는 이탈리아의 저력은 설명이 불가능한, 미스터리의 영역에 있었다.

“좀비. 이탈리아는 토너먼트의 좀비와 같은 팀이지. 경기 전 예상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성배 역시 그들과 같은 생각이었다.

월드컵에서 브라질과 함께 연속 우승을 차지한 유일한 팀.

실력과 성과는 물론이거니와 카테나치오로 대표되는 수비 전술을 확립하고 80년대 후반부터 이미 공간 활용과 전방위 압박을 실현하는 등 전술적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선구적인 국가.

그리고 토너먼트에서 극강의 생존력을 보여주는 국가.

그것이 바로 이탈리아의 대표팀이었다.

“토너먼트에서의 이탈리아는 어떻게 보면 가장 까다로운 팀이지. 조별예선에서 아무리 헤매도 토너먼트만 올라오면 어떻게든 살아남으니까.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언제나.”

빌모츠 감독의 말대로였다.

이탈리아는 세계적인 강호라는 이름값에 어울리지 않게도 조별예선마다 헤매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토너먼트로 올라오기만 하면 이야기가 달랐다.

70년 월드컵 이후 토너먼트에서 패배한 것은 78년과 86년, 2002년까지 단 세 번에 불과했다.

우승은 못 해도 최소 승부차기까지는 경기를 끌고 갔다는 이야기였다.

“이탈리아가 무서운 건 바로 그것 때문이야. 스타가 아무리 없어도, 전력이 아무리 약해도 그냥 이때쯤 우승할 때가 되었는데, 하면 우승한다고.”

브라질의 펠레나 호나우두, 호나우지뉴, 독일의 베켄바워, 프랑스의 지단이나 네덜란드의 크루이프 등과 같은 전설적인 선수가 없어도 이탈리아는 때가 되면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이런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 대회가 2006 남아공 월드컵.

평가전에서 연이어 졸전을 펼치며 국민들조차 포기한 상황이었는데, 꾸역꾸역 올라가더니 승부차기 끝에 우승을 차지해버렸다.

“그래도 우리에게 한 가지 좋은 소식이 있다면, 이런 이탈리아도 유로컵에서는 딱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거겠지. 월드컵을 네 번이나 우승한 팀이 유로컵에서는 겨우 한 번밖에 우승하지 못했으니까. 그것도 1968년에.”

하지만 어쨌든 독일보다 이탈리아가 쉬운 건 확실했다.

벨기에가 젊다고 하기도 민망한 어린 선수들로 국가대표팀을 채우며 세대교체를 시도했던 초창기에 이탈리아를 잡아내며 인상 깊은 모습을 보여준 적도 있었다.

“그래도 너무 쉽게 생각하지는 말라고. 우스갯소리이긴 하지만, 6년 징크스라는 것도 있으니까.”

1982년 월드컵에서 우승한 뒤, 유로 1988에서 3위, 1994년 월드컵 준우승에 유로 2000 준우승, 2006년 월드컵 우승까지.

이번 유로 2012에서도 결승에 진출하며 6년 징크스는 징크스가 아니라 과학임을 입증한 이탈리아 대표팀이었다.

“뭐, 결승 진출 정도면 충분하죠. 준우승만 해도 만족할 겁니다.”

하지만 그런 가십거리에 겁먹을 벨기에가 아니었다.

이번 대회 4연승에 이어 세계 최강 스페인까지 꺾어낸 벨기에 대표팀의 기세는 이미 하늘을 뚫은 상황이었다.

***

“내가 뭐랬어. 이번에도 결승전 가서 억지로 데려올 거라고 했지?”

[와... 진짜 축하는 하는데 뭔가 얄밉다아... 오빠, 내가 진짜 약하게 때릴 테니까 나한테 축하빵 한 대만 맞아줘. 진짜 살살 때릴게.]

성배는 벨기에 대표팀을 이끌고 유로 2012 결승전에 진출했다.

발롱도르 시상식에서 처음 이 말을 내뱉을 때만 하더라도 모두가 현실로 이뤄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성배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인터뷰 스킬일 뿐이라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성배는 자신의 말을 실현했고, 유빈이는 또 한 번 우크라이나로 끌려오게 되었다.

“안돼. 너한테 한 대 맞는 건 얼마든지 버틸 수 있는데, 그러다가 몸에 문제 생겨서 결승전에 못 나가면 어떡하냐. 네가 보상해주려고? 한두 푼이 아닐 텐데?”

[아, 진짜... 너무 컸어. 적당히 하지, 뭘 그렇게 열심히 해서 날 이렇게 귀찮게 하는 거야?]

말은 그렇게 해도 누구보다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의 동생임이 학교에 알려졌던 날, 뭐라 불평하면서도 입가에 머금었던 미소를 기억하고 있었다.

“시끄럽고, 내일 와서 응원할 생각이나 해. 어머니, 아버지 못 오셨으니까 그 몫까지 네가 다 하라고.”

아쉽게도 부모님은 이번에 휴가를 내지 못하셨다.

불과 한 달 전에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위해 휴가를 내고 날아오셨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참석하지 못한 것이었다.

덕분에 유빈에게는 3인분의 응원을 해야 할 특명이 내려졌다.

[아오... 엄마 몫은 첼시한테 하라고 하면 안 될까? 나는 아빠 몫까지만 할게.]

투덜대면서도 안 하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남매고 가족이었다.

“요즘 살만해? 하고 싶었던 공부, 하니까 재미있어?”

[뭐야, 갑자기? 공부가 재미있냐고? 그걸 말이라고 해?]

갑자기 전생의 유빈이가 떠올랐다.

하고 싶었던 미술 공부를 접고 남들 다 하는 것처럼 공무원을 준비해서 남들처럼만 살아가던 유빈이의 모습.

과연 자신이 바뀌면서 함께 변한 지금의 유빈이는 행복해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 이런 대답을 원한 건 아닌 것 같고... 갑자기 간지럽게 이런 건 왜 물어보는지 모르겠지만, 재미있어. 하고 싶은 거 다 하는 오빠가 부럽고 멋있어서 시작한 것도 있지만, 어쨌든 내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거니까. 가끔 힘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재미있어. 항상 오빠한테는 고마워하고 있어.]

유빈의 대답을 들은 성배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다행히 유빈이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전서보다는 행복한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봐? 간지럽게.]

“그냥. 나만 행복하면 미안하잖아. 다행히 너도 행복하다니까 마음이 좀 놓이네.”

회귀 후,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계획대로 착착 굴러가고 있었지만, 딱히 행복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소속팀과 국가대표팀이 모두 승승장구하고, 개인적으로도 EPL 최고 주급을 받아내는 등 모든 일에서 성공하고 정점을 찍자, 위로만 향했던 시선이 슬슬 정상적인 눈높이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리고 과거로 돌아오면서 우선순위로 잡아두었던 것들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었다.

‘자스민도 지금이 더 행복할까.’

얼마 전 찾아본 자스민의 스트리밍 채널은 꽤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중이었다.

전생과 마찬가지로 스트리밍 채널을 운영하기 시작한 자스민은 영화와 스포츠 등의 컨텐츠를 다루면서 벨기에를 넘어 유럽에서도 떠오르는 채널이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뭐야? 오빠 내일 죽어? 갑자기 왜 이상한 소리를 하고 그래.]

성배의 상념을 끊은 것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한심하다는 듯한 유빈이의 목소리였다.

“안 죽어, 이 자식아. 그냥 요즘 일이 너무 잘 풀리는 것 같아서, 나만 행복하기 미안해서 하는 소리다, 이것아. 됐고, 응원이나 열심히 해. 3인분 못했다는 소리만 들려봐, 아주. 용돈 없을 줄 알아.”

[와... 우리 사장님보다 더하네, 진짜. 아오, 유전무죄, 무전유죄! 나는 왜 유죄인가!]

성배는 유빈이의 절규를 들으며 전화를 끊었다.

유빈이와 한바탕 수다를 떨고 났더니, 그리고 유빈이가 행복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났더니 뭔가 유쾌해지는 기분이었다.

이탈리아와의 유로 2012 결승전이라는 거대한 경기를 앞두고 이런 기분이 될 수 있다는 것에 성배 본인도 놀랐다.

‘자. 그럼 이대로 이어가서 앙리 들로네 트로피까지 한 번 들어 올려볼까.’

뭔가 분위기가 좋았다.

결승전을 앞두고 이렇게까지 가벼운 기분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놀란 성배는 이대로라면 우승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에 입꼬리를 올렸다.

***

“벨기에의 축구팬 여러분, 드디어 날이 밝았습니다! 오늘입니다! 벨기에가 드디어 오랜 침묵 끝에 날아올라 유럽 최정상의 자리를 노리게 되었습니다!”

중계진은 아직 경기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흥분해있었다.

그 정도로 벨기에 축구팬들에게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우크라이나가 그리 가까운 나라도 아니건만, 엄청난 숫자의 벨기에 팬들이 우크라이나를 찾았다.

“드디어 오늘이네요. 오늘 한 경기만 더 이기면 유럽 최강이지 않습니까? 포르투갈에 스페인까지 꺾고, 마지막으로 이탈리아까지 꺾으면 그 누구도 벨기에가 유럽 최강임을 의심하지 못하겠죠! 2004년의 그리스와는 달라요!”

벨기에의 돌풍을 그리스와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일반적으로 두 팀을 비교할 수는 없다는 게 정설이었다.

그리스가 깜짝 우승을 차지했던 유로 2004에서는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등 유럽에서도 최고 수준의 강팀이 모두 1라운드에서 탈락했고, 네덜란드도 1승 1무 1패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겨우 8강에 진출했었다.

개최국 포르투갈을 두 번이나 잡아낸 것도 대단하긴 했으나, 극단적인 수비와 역습 전술을 앞세운 그리스는 우승을 차지하고도 언더독이라는 이미지를 벗지 못했다.

“벨기에는 모든 강팀과 정면으로 부딪혀서 승리해왔죠. 그리스와는 달라요. 언더독이 아닌 동등한 입장에서 경기를 치러 승리했고, 이미 스페인, 독일 등 유수의 강팀들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다는 걸 증명해냈어요.”

단 한 번의 대회, 다섯 번의 경기에 불과했지만, 벨기에는 이미 유럽의 내로라하는 강팀들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다는 평가를 끌어냈다.

대회 전까지만 해도 다크호스 이상의 평가를 받지 못했던 벨기에가 어느새 그 정도 위치까지 올라선 것이었다.

실제로 도박사들 역시 벨기에를 탑독으로, 이탈리아를 언더독으로 평가하며 벨기에의 우승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것을 인정했다.

“반가운 얼굴들이 보입니다. 벨기에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자, 유로 1972에서 벨기에를 유럽 3위로 이끈 폴 반 힘스트, 유로 1980 준우승과 1986년 월드컵 4강을 이끈 ‘용감한 주장’ 얀 쾰레만스, 마찬가지로 1986년 월드컵 4강의 주역이었던 ‘작은 펠레’ 엔조 시포, 유럽 최고의 골키퍼로 군림했던 장-마리 파프와 미셸 프뢰돔, 주가 등장하기 전까지 벨기에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였던 ‘플랜더스의 사자’, 에릭 게레츠 등 벨기에의 전설적인 선수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저 친구들도 굉장히 오랜만에 보네요. 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건 정말 꿈에서나 가능했던 일이었는데요. 저 전설적인 선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자신들의 현역 시절에도 해내지 못했던 업적을 달성한 후배들을 지켜보고 있네요. 얼마나 자랑스러울까요? 아마 저와 같은 마음이겠죠.”

새로운 전설이 쓰여지는 모습을 두 눈에 담기 위해 과거의 전설들 역시 한자리에 모였다.

자신들을 뛰어넘게 될 후배들의 모습을 두 눈에 직접 담기 위해서였다.

이미 벨기에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 타이틀과 최고의 주장 타이틀을 가져간 성배는 물론이고 콤파니, 아자르, 루카쿠 등 현 벨기에 국가대표팀 선수들은 이들과 비교해도 크게 밀리지 않았다.

이런 엄청난 재능들이 한 시대에 쏟아져 나왔으니 벨기에가 유럽 최고의 자리를 노리는 것도 당연한 일일 터였다.

“우리는 역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새로운 역사가 과연 쓰여질 것인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벨기에의 역사가 새로 쓰여질 수도 있는 날이었다.

이제 두 시간만 지나면 그 결과나 나올 것이었다.

벨기에의 축구인들과 축구팬들은 한자리에 모여 역사가 세워지는 순간을 두 눈에 담기 위한 준비를 끝냈다.

< 낭만필드 - 347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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