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346 >
“드디어 마지막 키커, 주성배가 볼을 들고 페널티박스 안으로 들어갑니다.”
벨기에의 마지막 키커인 성배가 페널티박스 안으로 진입했을 때, 승부차기 스코어는 3-3이었다.
스페인은 다섯 번째 키커 파브레가스까지 모두 승부차기를 마쳤고, 성배의 승부차기 결과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우. 이래서 승부차기가 싫어.’
아무리 경험이 많고 어지간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는 성배라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눈에 힘을 주지 않으면 눈앞이 울렁거리고 하늘과 땅이 자신을 공격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도 있었다.
“정말 엄청나게 부담스럽겠죠. 하지만 주라면 이겨내 줄 것이라 믿어요. 누가 뭐래도 이런 상황에서 벨기에의 운명을 짊어져 줄 사람은 주밖에 없거든요?”
누구라도 엄청난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벨기에 선수들과 팬들, 중계진들까지도 성배에게 확고한 믿음을 보내주고 있었다.
성배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승부차기를 성공시키고 벨기에를 유로컵 결승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 믿었다.
‘그렇게 절실한 표정으로 쳐다보지 말라고.’
페널티 스팟에 볼을 내려놓은 성배는 스페인의 골키퍼, 카시야스와 눈이 마주쳤다.
양 팀을 대표하는 주장 완장을 차고 마주친 두 선수의 운명은 단 한 번의 슈팅으로 갈릴 것이었다.
카시야스 역시 비장한 눈빛으로 성배를 노려보며 어떻게든 막아내겠다는 각오를 불태웠다.
“자, 조금씩 뒤로 물러나고 있습니다. 이제 몇 초 남지 않았습니다. 몇 초 후면 벨기에가 세계 최강 스페인을 꺾고 유로 2012 결승전에 진출합니다.”
“꼭 넣어주었으면 좋겠는데요. 제발, 제발 넣어주었으면 좋겠네요. 자, 같이 기도라도 해야죠. 그거라도 해줘야 해요.”
페널티 스팟에 볼을 내려놓은 성배가 도움닫기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 과정에서 경기장은 완벽한 적막에 빠져들었다.
‘후우... 침착하자. 하던 대로만 하면 넣을 수 있어.’
성배가 이번 생에서 페널티킥을 시도한 횟수는 다섯 번.
수비수였기 때문에 승부차기를 포함해도 그 정도 숫자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페널티킥을 차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고작 다섯 번에 불과했지만, 성배의 페널티킥 성공률은 100%였다.
‘오른쪽 상단 구석. 멋지게 때려 박아주지.’
수준급의 킥력과 소름이 끼칠 정도의 킥 정확도를 앞세워 골문 구석 상단으로 때려 박는 성배의 페널티킥은 방향을 잡아도 막을 수 없었다.
카시야스라고 해도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신장이 작은 카시야스는 제대로 때리기만 한다면 절대 성배의 킥을 막을 수 없었다.
“자, 휘슬! 휘슬 울리고!”
“달려들죠! 주, 도움닫기 후 슈팅!!”
도움닫기를 위한 위치에 자리 잡은 순간부터 성배는 단 한 번도 골대와 카시야스를 바라보지 않았다.
볼에만 시선을 집중하고 볼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골대와 골키퍼를 보지 않아도 어디로 차야 하는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봐왔던 골대였다.
골대의 위치는 변함없이 항상 그 자리였다.
‘가서 박혀라!’
볼을 향해 달려든 성배의 다리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뭔가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볼이 골대를 향해 날아갔다.
좌우로 몸을 흔들며 대비하던 카시야스 역시 몸을 날렸다.
카시야스의 선택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텅!
다음 순간, 속이 빈 금속을 때리는 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아!!!!!!]
그리고 한 부류의 서포터들이 내뱉는 엄청난 환호성이 그라운드 전체를 흔들었다.
그라운드 위의 선수들이 발밑에서부터 흔들리는 땅의 진동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들어갔습니다!! 주의 킥이 크로스바 하단을 때리고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주성배!! 주성배입니다!!”
“결승!! 결승으로 가죠!! 자, 다 같이 결승으로 가요! 붉은 악마가 우리를 결승으로 데려다줬어요!!”
붉은 옷을 입은 두 서포터 집단의 희비가 극단적으로 엇갈렸다.
양 팀 모두 붉은색을 상징으로 유니폼을 만들었고, 자연스럽게 서포터를 상징하는 색도 붉은색이었는데, 한쪽의 붉은색은 타오르는 불꽃처럼 넘실거렸고, 한쪽은 토마토소스처럼 흐느적거렸다.
불꽃이 벨기에였고, 토마토소스는 스페인이었다.
“으악! 가자! 가자, 결승!!”
“우와아아악!! 우악! 으아악!!”
“으아아악!! 건들지 마! 으악! 으아악!!”
하프라인 근처에서 서로 어깨동무한 채 대기하던 벨기에 선수들은 일제히 성배를 향해 달려들었다.
같은 모습으로 벤치에서 대기하던 백업 선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타월과 물병, 져지 재킷 등은 흥분한 선수들 때문에 그대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
“결승 진출입니다! 결승 진출! 붉은 악마가 결승전에 진출했습니다!”
경기 종료 후, 그라운드를 빠져나가던 벨기에 선수단은 수많은 취재진에 둘러싸여 인터뷰에 응해야 했다.
벨기에에 존재하는 모든 언론에서 취재를 나왔고, 전 유럽의 취재진 역시 빽빽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스페인의 취재진은 반대편으로 몰려가 있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결승전에 갔습니다. 하하하.”
이번에도 마지막 차례는 성배의 몫이었다.
벨기에의 수장인 빌모츠 감독과 선취 골을 기록한 루카쿠, 승부차기에서 스페인의 실축 두 개를 끌어낸 미뇰레가 차례로 인터뷰에 응했고, 마지막으로 성배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것이었다.
“이런 성공을 예상하셨습니까? 지난 발롱도르 시상식에서 트레블과 유로 우승을 이뤄내고 다음 발롱도르 트로피를 노려보겠다고 하셨는데, 이렇게 될 거라는 확신이 있으셨던 겁니까?”
“하하, 사람이 어떻게 미래를 확신하겠습니까? 저도 그런 능력은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성배가 자신 있게 내뱉었던 말들이 모두 현실로 이뤄지고 있었다.
맨체스터 시티는 말도 안 되는 성적으로 유럽을 지배했고, 벨기에는 모든 전문가와 팬들이 예상을 깨고 유럽 최고의 자리까지 단 1승만을 남겨두었다.
이쯤 되면 Prophet, 선지자 혹은 예언자라는 성배의 별명이 단순한 별명으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주가 말해왔던 모든 것들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제 한 경기만 이기면 사람들이 가장 믿지 않았던 벨기에의 유로컵 우승까지 현실이 됩니다.”
“제가 그렇게까지 확신에 차서 이야기했던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벨기에를 우승후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벨기에의 가능성이 충분하다 믿었고, 한 사람이라도 우리에게 주목했으면 하는 마음에, 그리고 우리 자신을 채찍질하기 위해서 그렇게 말했던 겁니다. 결과적으로는 잘한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성배가 패기에 가득 찬 발언을 내뱉었을 때는 벨기에가 유럽 내 다크호스 정도 포지션에 불과했을 때였다.
그때는 그런 패기를 보여야지만 겨우 벨기에와 자신에게 관심을 끌어올 수 있었다.
지금은 유럽 최고를 가리는 마지막 무대에 진출한 강팀의 포지션이었고, 어느 정도 겸손함을 보여야 할 때였다.
분위기와 상황에 따라 태도를 바꾸는 능력은 밖으로 보이지 않는 성배의 강력한 무기였다.
“자, 어쨌든 이제 스페인까지 꺾어냈습니다. 스페인의 메이저 대회 3연패를 향한 꿈을 저지시켰는데, 세계 최강 스페인까지 꺾었으니, 다음은 우승입니까? 우승 확률은 어느 정도로 예상하십니까?”
“우승확률이라. 우리가 잘하면 100%고, 못하면 0%겠죠. 결국, 이기거나 지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니까요.”
우승확률이 90%라 여겨지던 팀이라도 결국 결승에서 패배하면 우승할 수 없었다.
우승확률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숫자일 뿐이었다.
“결승 상대는 어디가 될 거라 예상하십니까? 내일 독일과 이탈리아의 4강전이 열릴 텐데요.”
유로컵 우승을 노리는 벨기에를 마지막으로 막아설 팀은 독일 혹은 이탈리아였다.
두 팀의 승자가 결승에 올라와 벨기에를 막아서려 할 것이었다.
“글쎄요? 토너먼트까지 올라온 이상 예상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당일 컨디션이 더 좋은 팀이 올라오겠죠. 어느 팀이 올라오든 열심히 준비해서 우승을 노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독일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탈리아가 올라왔으면 좋겠다는 생각 역시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완벽한 세대교체로 세계 최강의 자리를 노리는 독일보다는 베테랑들의 힘과 토너먼트만 들어오면 강해지는 DNA의 힘으로 어찌어찌 버티고는 있지만, 세대교체에 실패한 이탈리아 쪽이 상대하기 편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결승전에서 뵙겠습니다.”
인터뷰를 마친 성배는 빽빽하게 모여있는 취재진을 향해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그라운드를 빠져나갔다.
“결승 진출 축하해. 꼭 우승해.”
“그래, 고마워. 꼭 우승할게.”
경기장을 빠져나가던 성배는 잉글랜드 취재진과 함께 서 있던 첼시와 가볍게 포옹하며 키스했다.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인 성배를 취재하기 위해 잉글랜드의 8강 탈락 이후 폴란드에서 우크라이나로 넘어온 것이었다.
“우승하면 그때 인터뷰해줄게. 시즌 시작하기 전에 독점으로 한 번?”
“그 약속 잊지 마. 후후. 벨기에, 맨시티 전부 다 제대로 써줄 테니까.”
이젠 성배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특종이 되는 수준이었다.
성배를 만나기 전부터 유망한 축구 칼럼니스트이자 아름다운 리포터로 유명했던 첼시 역시 그 덕에 인지도가 폭발적으로 상승하고 있었다.
***
[이탈리아, 승부차기 끝에 독일을 꺾고 결승 진출!]
[독일, 다시 한 번 이탈리아 징크스에 울다. 4강 탈락.]
[스페인과 독일의 양강이 무너지다. 새로운 유럽 최강은?]
이탈리아는 4강에 올라오는 동안 1승 3무에 그쳤고, 독일은 4전 전승을 거두고 있었다.
팀의 밸런스와 전력 역시 독일이 훨씬 우위에 있었다.
고메즈와 클로제가 버티는 최전방 공격진도, ‘애국자’ 루카스 포돌스키와 뮐러, 외질, 크로스, 로이스, 쉬얼레, 괴체 등이 버티는 2선 공격진, 케디라, 슈바인슈타이거, 귄도간, 벤더가 버티는 중원, 람, 바트슈투버, 훔멜스, 보아텡, 회베데스, 메르테사커, 슈멜처가 버티는 수비진에 노이어의 골문까지.
여기에 전통적으로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조직력까지 갖춘 독일이 이탈리아에게 밀릴 이유는 전혀 없었다.
아니, 있다면 단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아주리 징크스.’
일반적으로 서독 시절부터 독일은 이탈리아보다 반수 정도 더 강력하다는 평가를 받아왔지만, 정작 이탈리아와의 메이저 대회 맞대결에서는 단 한 번도, 정말로 ‘단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 4강전에서 처절한 혈투 끌에 3-4로 패배한 것을 시작으로 1982년 스페인 월드컵 결승전에서 1-3 패배, 유로 1988과 1996 조별 예선에서 만나 무승부를 기록했고, 2006년 독일 월드컵 4강에서는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안고도 연장 후반에 두 골을 얻어맞으며 탈락했다.
이런 식으로 이어진 것이 월드컵 5전 2무 3패, 유로컵 2전 2무의 기록이었다.
이번 대회 준결승에서도 승부차기 끝에 무너졌으니 메이저 대회 전적은 8전 5무 3패.
독일 입장에서는 이탈리아의 푸른 유니폼만 봐도 치가 떨릴 수밖에 없었다.
독일이 1인자라는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으니 이탈리아에 대한 인식이 좋을 리가.
4전 전승에 8강에서 쉬운 상대인 러시아를 만나 체력까지 안배해가면서 여유롭게 올라온 독일은 첫 경기부터 고전 끝에 무승부를 거두고 8강에서도 승부차기 끝에 올라온 이탈리아를 상대로 이번에야말로 징크스를 깨부수겠다며 이를 갈았지만, 결국 실패하며 다음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 낭만필드 - 34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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