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345 >
“연장전에도 경기 양상에 큰 변화는 없습니다. 벨기에는 단단한 수비와 우위에 있는 피지컬을 바탕으로 차근차근 경기를 풀어나가고 있고, 스페인은 그런 벨기에와 부딪히지 않기 위해 한 템포 빠르게 볼을 돌리고 있습니다.”
1-1 상황에서 연장전으로 접어들었지만, 경기 양상은 후반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양 팀 모두 득점을 노리기 위해 무리하지 않았고, 승부차기까지 흘러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신중하게 경기를 운영하면서 빈틈을 찾았다.
“아무래도 정규 시간에 비해서는 선수들의 몸놀림이 조금 무거워 보이네요. 특히나 스페인이 그런 모습이죠?”
평소보다 훨씬 많은 거리를 뛰었던 양 팀이기에 체력적인 문제가 아예 없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유로 2012의 치열한 토너먼트경기였기에 내일은 없다는 각오로 가능한 한 열심히 뛰어주고 있었다.
체력을 아낄 수는 없었다.
토너먼트의 잔인함은 두 번째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시간도 많지 않은 데다가 15분씩 둘로 나뉜 연장전에서는 실점의 타격이 정규 시간보다 훨씬 클 수밖에 없었고, 이는 조심스러운 경기 운영으로 이어졌다.
“어쩌면 지금부터 승부차기를 준비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그래 보이네요. 뭔가 골이 들어갈 기미가 보이지 않아요.”
조심스러운 두 팀의 움직임은 지켜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승부차기를 떠올리게 했다.
양 팀 모두 이렇다 할 기회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동안 시간은 계속 흘렀다.
미드필드에서는 여전히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졌지만, 공격을 전개하는 속도나 적극성은 정규 시간에 비해 많이 떨어져 있었다.
6일을 쉰 데다가 루카쿠를 벤테케로 교체해준 벨기에가 그나마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골을 넣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양 팀, 이제 슬슬 승부차기를 준비하는 모습입니다. 볼을 천천히 돌리며 숨을 가다듬습니다.”
이제 승부차기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시간대가 되었다.
굳이 무리해서 골을 노리다가 역습에 당할 위험이 있었고, 이제 한 골을 허용하면 사실상 따라가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결국, 양 팀은 중원과 수비진에서 천천히 볼을 돌리며 승부차기에 임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주심, 일찌감치 종료 휘슬을 불었습니다. 주어진 추가 시간을 20초가량 남겨놓은 상황에서 경기를 끝내며 연장 전후반의 종료를 알립니다. 승부차기! 양 팀의 승부는 승부차기에서 가려지겠습니다.”
경기 분위기를 읽은 주심은 20초 일찍 경기를 끝냈다.
어차피 승부차기로 접어들 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종료 휘슬이 울리자, 양 팀 벤치에서 대기하던 벨기에의 빌모츠 감독과 스페인의 델 보스케 감독은 빠르게 그라운드 위로 올라왔다.
“자, 고생했다. 이제 마지막 고비 하나만 남았어. 승부차기만 잘 마무리하면 결승이라고, 결승!”
경기를 마친 선수들은 빠르게 그라운드 중앙으로 모여 자리를 잡고 주저앉았다.
팀 닥터들은 자리 잡고 앉은 선수들에게 달라붙어 빠른 손놀림으로 마사지를 해주었다.
120분간의 혈투로 뭉치거나 풀린 선수들의 다리 근육을 마사지해 마지막 힘을 낼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주, 여기.”
“아, 고마워.”
성배는 쿠르투아에게서 물병을 받아들었다.
벤치에서 대기하던 백업 선수들은 물병을 들고 선수 한 명 한 명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물을 마시려 움직이는 그 최소한의 체력도 소모되지 않게 해주는 것이었다.
“지금 기분은 어때? 심장이 뛰거나 하지는 않아? 침착할 수 있겠어?”
코치진은 선수 한 명 한 명을 찾아다니며 지금의 상태를 점검했다.
혹시나 승부차기 돌입의 부담감에 짓눌리고 있지는 않은지, 이 선수가 승부차기를 맡아서 찰 수 있는 상황이 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결승 진출을 위한 마지막 관문을 팀 전원이 하나로 뭉쳐 돌파하려 하고 있었다.
“자, 자. 집중! 이제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순서가 어떻게 되는지 빠르게 말할게. 잘 들어.”
벨모츠 개인의 의견과 코치진의 의견, 선수의 의견에 평소 태도, 성격까지 고려해 승부차기 순번이 짜여졌다.
이제 곧 열한 명의 선수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들이 벤치로 빠져야 하는 시간이었기에 빠르게 순번을 발표했다.
“1번은 에당. 한 번 맡겨볼게. 언제나처럼 자신 있게 때려버려. 그물을 찢어버리면 더 좋고.”
“기다린 바입니다. 화성까지 날려버리죠, 뭐.”
기선 제압이 중요한 1번 키커 자리에는 항상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가끔 오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에당 아자르가 들어갔다.
자신 있게 골을 넣고 기선을 제압해야 하는 1번 키커였기에 자신만만하거나 대담한 선수가 어울렸다.
파넨카 킥이나 무지막지한 강슛을 꽂아 주는 것이 베스트였지만, 선수에게 강박감을 심어줄 수 있었기에 그런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좋아. 그럼 에당 다음에 2번으로 찰 선수는 무사. 걱정하지 말고 평소 하던 대로만 해.”
“알겠습니다.”
2번 키커는 시몬스와 교체되어 투입된 무사 뎀벨레.
비록 시몬스와 펠라이니, 데푸르에게 밀려 주전으로 출전하지는 못하지만, 벨기에 최고의 테크니션을 뽑으라면 무조건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선수였다.
그 아자르와도 충분히 경쟁할 수 있을 정도로 테크닉이 뛰어난 뎀벨레는 킥도 좋은 편이었다.
“자, 허리가 되어줄 중요한! 3번 키커는 다니엘. 너는 이 정도 부담은 줘야 긴장 좀 하겠지?”
“와, 너무하네요, 마크. 저도 이제 예전 같지 않아서 이렇게 부담스러운 자리는 좀 빼 달라고요. 건강에 안 좋아...”
승부차기의 반환점 역할로 이후에 찰 4번 키커와 5번 키커의 부담을 덜어줘야 하는 세 번째 키커는 다니엘 반 바이텐.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세계 최고의 클럽 중 한 곳이면서 스페인 못지않게 정확한 패스를 중요시하는 바이에른 뮌헨에서 활약하며 킥이 굉장히 많이 좋아진 선수였다.
거기에 선수생활이 10년을 훌쩍 넘은 노련한 선수였기에 충분히 이 부담스러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었다.
“자, 4번 키커는 뱅상. 센터백 둘 다 오늘 좋았으니까, 승부차기에서도 둘 다 넣어. 하하, 부담은 가질 필요 없지만, 부담 팍팍 가지고.”
“잔인하시네요. 못 넣으면 이거 죽는 거 아닙니까?”
부담감을 팍팍 심어주는 빌모츠 감독의 말에 콤파니는 나름 분위기를 풀어본다고 농담 한마디를 던졌다.
““그딴 불길한 소리는 하지 말라고!””
“오우, 미안. 이거 볼은 차보기도 전에 죽겠는데.”
일제히 반발하는 동료 선수들의 모습에 깜짝 놀란 콤파니는 몸을 웅크리며 투덜댔다.
어쨌든 다른 건 몰라도 심장의 강력함만은 뛰어난 선수가 콤파니였다.
4번 키커의 중압감을 충분히 떨쳐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뭐, 마지막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빌모츠 감독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5번 키커는 승부차기를 마무리하며 승부를 결정짓는 역할이었기 때문에 감독은 물론이고 코칭스태프, 동료에 팬들까지도 가장 신뢰하는 선수를 내보내야 했다.
벨기에에서 이런 선수는 정해져 있었다.
누구라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벨기에 선수단의 눈은 한 선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 5번 키커는 너야. 우릴 결승으로 보내달라고.”
5번 키커는 예상대로 성배의 역할이었다.
자신에게 5번 키커 자리를 정해준 빌모츠 감독의 말에 주변을 돌아본 성배는 자신을 바라보는 30여 명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거 은근히 부담스러운데?’
60개가 넘는 눈동자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벨기에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경기였다.
유로 1980에서 조 1위를 차지하며 결승전으로 직행했던 적은 있었지만, 현재의 체계로 바뀐 이후에는 처음으로 결승 무대를 밟을 절호의 기회였다.
결승에 가느냐 못 가느냐가 자신의 발에 달려있었다.
“어떻게 하면 카메라에 멋지게 잡힐지나 연구해. 괜히 어버버하면서 이상한 세리머니로 평생 창피할 흑역사 만들지 말고.”
지금 자신의 기분이 어떻든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성배의 자신감 넘치는 말투에 나머지 동료들은 이미 결승이라도 간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스페인의 1번 키커, 사비 알론소가 페널티박스 안으로 들어갑니다. 미뇰레 골키퍼, 몸을 풀면서 결의를 다집니다.”
동전 던지기에서 승리한 성배는 후공을 선택했다.
자연스럽게 스페인의 1번 키커가 볼을 들고 페널티 박스 안으로 들어갔고, 스페인의 1번 키커는 사비 알론소였다.
“자, 피 말리는 상황입니다. 지켜보는 저희들도 이런데, 직접 뛰고 있는 선수들은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하나만 막아주었으면 좋겠네요. 1번 키커의 킥을 막으면 남은 승부차기를 정말 유리하게 이끌 수 있거든요?”
지켜보는 사람들도 숨소리를 내지 못할 정도로 긴장했다.
여기서 이기면 유럽 최강의 자리에 도전할 수 있었다.
그런 중요한 경기에 승부차기라는 피말리는 상황.
도저히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알론소, 달려듭니다! 슈팅! 아!! 미뇰레!! 시몽 미뇰레!!”
알론소는 오른쪽으로 낮고 강하게 슈팅을 시도했다.
하지만 미뇰레가 미리 예상하고 몸을 날린 코스도 바로 그곳이었다.
“막았어요!! 시몽 미뇰레! 스페인 첫 번째 키커, 알론소의 슈팅을 막았어요! 시작부터 하나 막고 시작하네요!”
첫 번째 킥부터 골키퍼가 막아내자, 경기장 분위기는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벨기에 원정 팬들과 두 팀과 관계는 없지만, 내심 마음이 벨기에 쪽으로 기울었던 팬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당연히 스페인을 응원하던 팬들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좋았어, 시몽!! 바로 그거야!!”
“자식, 경기 끝나면 보자! 너 뒤졌어, 하하!!”
어깨 동무를 하고 일렬로 늘어선 벨기에 선수들은 미뇰레에게 달려갈 수는 없었지만, 그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흥분했다.
첫 승부차기를 막아냈다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선수들이 흥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자, 일단 진정하고 경기를 지켜보겠습니다. 벨기에의 첫 번째 키커는 에당 아자르입니다. 테크닉이 정말 뛰어나고 킥도 좋은 선수인데, 하나 넣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조건 넣고 한 골 앞서가야죠. 시작부터 심리적인 우위를 잡아나갈 기회예요. 최소한 분위기는 우리가 끌고 가야 승부차기를 유리하게 이끌 수 있어요.”
스물한 살의 어린 선수, 에당 아자르에게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큰 부담이 지워졌다.
단순히 1번 키커라는 그 자리만으로도 부담스러울 텐데, 앞선 스페인의 키커가 실축하면서 부담이 더욱 가중된 것이었다.
“아자르, 달려들면서 슈팅! 파넨카 킥! 파넨카 킥입니다!”
“아니, 이 선수! 도대체 심장이 뭐로 만들어진 건가요! 스물한 살의 어린 선수가 여기서 파넨카 킥이라뇨!”
하지만 아자르는 평범한 선수가 아니었다.
백전노장들도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한술 더 뜬 아자르는 침착하게 파넨카 킥을 시도, 세계적인 골키퍼이자 스페인의 주장인 카시야스를 무너뜨리며 승부차기를 성공시켰다.
“이 미친놈! 오늘부터 너는 미친놈이다!”
“이 자식은 도대체 뭘 먹고 컸길래 이렇게 된 거야!”
동료들에게 돌아온 아자르는 축하를 빙자한 구타를 당했다.
하지만 맞고 있는 아자르도, 때리고 있는 벨기에 선수들도 입가에 미소가 가득했다.
“이렇게 되면 벨기에가 한 골 앞서나가게 됩니다! 아직 경기가 끝나지는 않았지만, 유리한 고지를 먼저 점령한 벨기에입니다!”
스페인이 믿고 내보낸 알론소는 미뇰레에게 코스를 읽히며 실축했고, 벨기에의 슈퍼 탤런트 아자르는 대담한 파넨카 킥으로 승부차기를 성공시켰다.
아자르의 대담한 파넨카 킥은 스페인 선수단을 흔들었고, 벨기에 선수단의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이번 대회에서 생각보다 부진했던 아자르는 단 한 번의 승부차기로 다시금 유럽의 이목을 끌어왔다.
승부차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스페인의 이니에스타, 피케가 페널티킥을 성공시켰고, 벨기에에서는 반 바이텐과 콤파니가 침착하게 골망을 흔들었다.
벨기에의 2번 키커로 나선 뎀벨레의 슈팅이 카시야스에 선방에 막히긴 했지만, 스페인의 4번 키커 세르히오 라모스가 슈팅을 하늘로 쏘아 올리며 실축, 여전히 벨기에가 유리한 상황이었다.
이제 양 팀의 마지막 키커인 세스크 파브레가스와 성배의 차례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파브레가스, 달려들면서 슈팅! 아, 골 포스트를 때리고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이로써 3-3, 남은 키커는 한 명입니다.”
“이렇게 되면 스페인의 키커 중 바르셀로나 선수들은 모두 승부차기를 성공시켰고,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은 모두 실패하게 되었네요. 이거 스페인이 한창 시끄럽겠는데요?”
공교롭게도 승부차기를 성공시킨 이니에스타와 피케, 파브레가스는 모두 바르셀로나 소속의 선수였고, 실패한 알론소와 라모스는 레알 마드리드 선수였다.
스페인 대표팀은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로 구성된 거나 마찬가지였고, 스페인 국민들도 두 팀으로 나뉘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 여파가 작지는 않을 것이었다.
특히나 오늘 경기에서 패배한다면 두 패로 갈려 다시 반목할 확률도 높았다.
“주, 믿는다. 너만 믿을게.”
“야, 부담주지 마! 주라면 알아서 잘 할 거라고!”
그리고 벨기에의 마지막 키커, 성배가 경기를 마무리하기 위해 나섰다.
< 낭만필드 - 34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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