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344 >
‘쉽지 않네.’
튀어나오는 볼을 따내기 위해 바깥에서 대기하던 성배는 허리에 손을 얹고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았다.
쉽게 끝난다, 싶었는데 역시 스페인을 잡아내는 건 쉽지 않았다.
3년 전에도 그랬듯 오늘도 마지막까지 승부의 향방을 알 수 없었다.
“정말 아쉽네요. 역시 차비와 이니에스타는 한 번의 플레이로 득점을 만들어낼 수 있는 선수들이거든요? 우리 벨기에 선수들이 딱히 방심했다거나 한 건 아닌데, 차비의 돌파가 정말 좋았어요.”
스페인을 수렁에서 건져낸 선수는 역시나 이번에도 차비였다.
이니에스타와 실바에게 적극적인 움직임을 위임하고 2선과 3선에서의 볼 배급에 집중하던 차비는 위기가 다가오자 직접 돌파를 시도했고, 위력적인 돌파로 골을 만들어냈다.
“정말 만능열쇠입니다. 그냥 필요하다 싶으면 차비가 있습니다. 정말 대단한 선수고, 탐낼 수밖에 없는 대단한 선수입니다.”
이러니 스페인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 불리고, 세계 축구 역사상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것이었다.
현역 축구선수 중에는 단연 원탑 미드필더로 꼽혔다.
벨기에 선수들이 최근 들어 급속도로 성장한다고는 하지만, 클래스의 차이는 분명 있었다.
‘그래. 스페인이 이렇게 쉽게 무너질 리 없지.’
리드를 지켜내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후반 25분까지 1-1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대 이상이었다.
욕심을 비우고 보면 여전히 벨기에가 기분 좋은 상황이었고, 스페인이 아쉬워해야 했다.
“자, 자! 다시 정신 차리고! 아직 동점이야! 어차피 연장까지 갈 거 각오하고 시작했잖아! 고개 들어, 자식들아!”
성배는 박수까지 쳐가면서 동점 골을 허용한 이후 의기소침해 있는 선수들을 일으켰다.
아직 동점이었다.
남은 20분의 결과에 따라 결승 진출이 결정되는 상황이었기에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다.
[IN - 7. 페드로 로드리게스 / OUT - 8. 차비 에르난데즈]
“스페인은 두 번째 골을 만들어낸 차비를 빼주면서 페드로를 투입, 측면 공격을 강화합니다.”
“나바스 투입으로 재미를 톡톡히 봤기 때문에 측면에 힘을 주는 것 같네요. 확실히 측면이 살아난 덕분에 동점 골까지 나왔으니까 측면에 힘을 줄만도 하죠.”
교체 투입된 나바스의 맹활약으로 동점 골을 뽑아낸 스페인은 차비를 빼고 페드로를 투입하면서 왼쪽 측면 공격까지 강화했다.
서른두 살의 차비가 벨기에 선수들의 거친 플레이에 체력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기에 겸사겸사 교체한 것이었다.
“이번 시즌 리그에서는 좀 아쉬운 모습을 보였었는데, 과연 이번 대회에서 명예 회복에 성공할 수 있을지.”
시즌 내내 아쉬운 모습을 보였던 페드로는 이번 대회에서도 단 한 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다.
조별 리그에서는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고, 지난 프랑스와의 8강전에서 후반 막판 투입되어 한 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한 것이 전부였다.
“글쎄요. 프랑스전에 나서긴 했지만, 그렇게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거든요? 그래도 위협적인 선수인 건 분명하니까 놓치면 안 돼요.”
지난 8강에서의 어시스트도 한 골을 뒤지던 프랑스가 억지로 라인을 끌어올렸을 때, 역습에 숟가락을 얹어 기록한 것이었다.
페드로도 다음 시즌 주전 경쟁을 위해 이번 대회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IN - 11. 드리스 메르텐스 / OUT - 15. 토비 알데르베이럴트]
동점 골을 허용한 벨기에도 이제 공격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마침 스페인이 페드로를 투입해 왼쪽 측면 공격을 강화했고, 이에 대한 대응책을 겸해 알데르베이럴트를 빼고 메르텐스를 투입해 오른쪽 측면 공격을 맡겼다.
지금까지 윙어로 전진 배치되었던 성배가 알데르베이럴트의 자리로 내려오면서 본래 역할인 풀백으로 돌아왔다.
“자, 시몬스가 뎀벨레로 바뀐 것만 빼면 벨기에의 베스트 포메이션입니다. 이제부터가 진짜입니다.”
벨기에의 공격수 중 이번 대회에서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선수는 메르텐스였다.
3골을 기록한 루카쿠도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메르텐스의 임팩트가 워낙 컸다.
그런 메르텐스가 그라운드 위에 모습을 드러냈고, 빌모츠 감독은 안 그래도 체력적으로 많이 지친 스페인 선수들을 효과적으로 공략해줄 거라 기대했다.
“연장전으로 가게 되면 이틀을 더 쉰 벨기에가 유리하거든요? 너무 무리하지 말고 정상적으로 운영하면서 연장을 노려도 나쁘지 않아요.”
벨기에는 지난 8강전 이후 6일을 쉬었고, 스페인은 4일을 쉰 상황이었다.
비록 벨기에가 스페인보다 더 많이 뛰긴 했지만, 끊임없이 밀려 넘어졌다가 일어난 스페인 선수들의 체력소모 역시 적지 않았다.
체력전으로 가면 벨기에가 유리할 수 있었다.
“이니에스타, 왼쪽으로 연결합니다. 조르디 알바가 깊숙이 올라와서 받아줍니다.”
연장전까지 가기 싫은 마음은 스페인이 조금 더 컸다.
그렇다고 동점인 상황에서 무리해가면서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벨기에보다는 공격적으로 움직여주었다.
“알바, 다시 이니에스타에게. 이니에스타는 페드로에게 연결합니다.”
교체 투입된 나바스와 페드로에게 볼이 몰렸다.
아직 체력이 남아있는 두 선수를 활용해 추가 골을 만들어내려는 것이었다.
‘일단 측면 돌파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풀백으로 자리를 옮기고 첫 번째 수비였다.
성배가 윙어 자리에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준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20년 이상 뛰어온 풀백 포지션이 가장 편했다.
‘2선 침투는 알아서 잘 막아줄 거고. 나는 중앙으로 밀고 들어가는 것만 막으면 되겠지.’
측면 돌파는 결국 크로스에 이은 헤딩 슈팅으로 마무리 되야 하는 공격 옵션이었다.
크로스는 사실상 파브레가스를 원톱에 두고 있는 스페인 입장에서 그렇게 매력적이지 못한 공격 옵션이었고, 낮게 찔러줄 수 있는 위치까지 다가가지만 못하게 만들면 수비는 성공이었다.
“페드로, 이니에스타에게 내주고 침투!”
이니에스타에게 다시 볼을 돌려준 페드로는 성배의 어깨를 잡아채며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조금이나마 페널티박스에 접근하려는 것이었다.
‘그래. 일단 그것밖에 없지.’
성배도 예상한 플레이였다.
스페인은 패스가 정교하고 발재간이 좋은 선수들이 다수 포진해있는 팀이었기 때문에 좁은 공간에서 이런 식의 2대1 패스를 자주 활용했다.
한 경기에도 몇 번씩이나 비슷한 장면이 나왔고, 그러면서도 항상 위력적이었다.
‘그래도 따라잡는 건 힘드네.’
예상은 했지만, 순간적으로 빠져 들어가는 페드로의 움직임을 따라잡는 건 쉽지 않았다.
그래도 미리 움직인 덕분에 한 발자국 내의 간격으로 바짝 따라붙을 수 있었다.
“2대1 패스! 다시 페드로, 주! 태클로 먼저 걷어냅니다. 스페인의 코너킥!”
이니에스타의 패스가 다시 페드로에게 돌아왔을 때, 성배는 미리 몸을 날려 태클로 패스 루트를 막았다.
페드로에게 연결되지 못하고 성배의 발목에 막힌 볼은 그대로 골라인 바깥으로 흘러나갔다.
“자, 집중! 천천히 한 개만 하자! 그때까지 단단하게 막고!”
풀백으로 돌아온 성배는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단단한 수비를 보여주며 스페인의 공격을 막아 세웠다.
교체 투입된 페드로가 기세를 올릴 수 없도록 첫 번째 플레이부터 완벽히 막아낸 것도 훌륭했다.
“태클! 베르마엘렌이 나바스의 돌파를 끊었습니다! 옆으로 흐른 볼이 펠라이니에게! 전방의 뎀벨레에게 넘겨줄 때, 휘슬 울립니다! 경기 종료 휘슬! 전, 후반 정규 시간이 모두 지났습니다. 1-1로 정규시간 내에 승부를 가리지 못하면서 이제 연장전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결국, 벨기에와 스페인은 정규 시간 90분 동안 승자를 가리지 못하고 연장전으로 승부를 넘겼다.
세계 최강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대회 3연패를 노렸던 스페인 입장에서는 조금 아쉬운 결과였고, 벨기에 입장에서는 일단 최소한의 목적은 이룬 것이었다.
“경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경기가 좀 루즈해졌거든요? 월드컵과 달리 출전 국가가 열여섯 개 팀밖에 안 되기 때문에 경기 일정이 널널한 편인 것을 감안하면 양 팀 모두 연장전을 대비했다고 봐야겠죠.”
전반 초반부터 많이 뛰어다닌 벨기에와 그런 벨기에의 페이스에 말려 그라운드 위를 굴러다닌 스페인 모두 평소보다 체력 소모가 많았다.
하지만 경기 후반의 소강 상태는 체력이 떨어진 이유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연장전을 대비하는 모습이었다.
“일단 연장으로 가면 6일을 쉰 벨기에가 유리합니다. 4일 휴식이 짧은 건 아니지만, 리그 경기 중에도 4일 휴식으로 연달아 다섯 경기를 치르면 체력적인 문제가 나타나지 않습니까? 리그보다 부담감이 심한 유로컵에서는 더욱 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리그를 보면 4일 간격으로 세 경기만 치러도 선수들의 몸이 무거워지는 모습이 보였다.
유로컵은 세계적인 메이저대회였고, 토너먼트전이었기 때문에 38경기를 리그전으로 치르는 각국 리그보다 부담감이 심했다.
부담감이 심하다는 이야기는 체력 소모도 심하다는 이야기였다.
“자, 이제 연장이다. 연장으로 가면 우리가 유리해, 알지?”
벨기에 선수단 역시 이를 알고 있었다.
경기 시작부터 스페인과 체력전을 벌인 것 역시 그것 때문이었다.
진흙탕으로 끌려 들어온 스페인은 평소 자신들의 스마트한 플레이를 구사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면서 체력 소모를 피하지 못했다.
“이상 있는 사람 있어? 다리가 풀렸다거나, 경련이 일어나는 것 같다거나. 있으면 빨리 말해. 교체카드 남아있을 때.”
정규 시간이 끝난 뒤에는 라커룸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그라운드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빌모츠는 동그랗게 빙 둘러앉은 선수들을 보며 물었다.
뎀벨레와 메르텐스, 두 명의 선수를 투입한 벨기에는 아직 교체 카드 한 장을 남겨놓고 있었다.
스페인은 파브레가스, 나바스, 페드로 세 명의 선수를 투입하며 모든 교체 카드를 소모했기에 연장전에서 벨기에가 유리한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다.
“없습니다. 아직 멀쩡합니다. 이 정도 뛰었다고 경련이 일어나면 선수생활 접어야죠, 하하.”
“저도 아직 멀쩡합니다. 한창때 아닙니까.”
오늘 경기에서 가장 많이 뛰어준 펠라이니와 데푸르는 아직 충분히 더 뛸 수 있어 보였다.
확실히 벨기에를 대표하는 파이터다운 모습이었다.
“주, 너는 어때? 아직 뛸 수 있겠어?”
성배 역시 두 선수 못지않게 많이 뛰어주었다.
윙어로도, 풀백으로도 상당한 거리를 뛰면서 스페인의 공격을 버텨내는 데 큰 역할을 해주었다.
“아직 멀쩡합니다. 30분 정도는 충분히 뛸 수 있습니다. 후반 막판에는 오버래핑도 거의 안 나가고 쉬었는데요, 뭐.”
일단 벨기에 축구의 핵심이 되어주는 선수들은 연장전에도 충분히 제 몫 이상을 해줄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오케이. 그럼 남은 교체 카드 한 장은 상황 봐서 쓰지, 뭐. 나한테도 카드가 한 장 남네, 그럼.”
교체 카드 한 장을 아직 손에 쥐고 있다는 것은 연장전에 한 번은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는 뜻이었다.
체력방전이나 부상으로 인한 의도치 않은 상황 때문에 카드를 낭비하지만 않으면 한 번은 변수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자, 이제 마지막 30분이다. 다 털어내고 와. 경기 끝났을 때, 서 있는 친구들은 다시 국가대표 유니폼 못 입는다고 생각해라.”
30분이 지나면 결승 진출 팀이 가려지는 상황이었다.
양 팀 모두 지금까지 아껴놓은 마지막 힘까지 모두 끌어모아 마지막 30분에 쏟아부어야 했다.
< 낭만필드 - 34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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