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341 >
“왜 거기서는 그렇게 헤매고 있어? 시티에서처럼만 하면 네가 에이스 아냐?”
“에이스는 무슨. 내가 끼어들기에는 너무 완성되어 있던 팀이라.”
돈바스 아레나에 도착한 성배는 한 달 만에 만난 실바와 대화를 나누었다.
맨체스터 시티의 플레이 메이커로 부동의 사령관으로 군림하는 실바지만, 스페인 대표팀에서는 조연으로 활약했다.
이니에스타와 차비, 알론소 등이 만들어놓은 대표팀의 질서가 벌써 오랜 기간 굳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좀 더 정신 차리고 뛰어야지. 너 때문에 스페인이 애매해졌다는 이야기가 왜 나와? 나바스 같은 윙어를 투입해야 한다고 난리들이잖아. 맨체스터 시티의 에이스가 그런 말을 들어서 되겠어?”
자기도 스페인의 약점 중 하나로 측면 공격의 부재를 꼽았으면서 말은 잘 하는 성배였다.
확실히 미드필더 다섯 명이 다 중앙에서 플레이하는 선수라는 점은 스페인의 약점 중 하나였고, 이니에스타나 차비를 뺄 순 없으니 실바를 빼고 나바스라도 투입하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뭐, 내가 더 열심히 해야지. 그들이 쌓아놓은 게 나보다 훨씬 많은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니까.”
유로 2008에서는 왼쪽 윙어로 활약하면서 우승의 주역이 되었고, 실바가 자신의 이름을 알린 대회이기도 했지만,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자신의 폼 부진에 페드로의 약진까지 겹치며 선발 자리를 내줬다.
2011년 9월, 평소 조용하기로 유명하고 거친 태클을 당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실바가 델 보스케 감독을 향한 항의성 인터뷰까지 가졌을 정도였다.
요지는 “내가 레알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에서 활약하는 선수였다면 무조건 주전으로 활약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당시에도 더블을 달성한 맨체스터 시티에서 에이스로 활약하던 실바였기에 그럴 만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래. 다음 경기부터는 좀 열심히 뛰어.”
“왜 다음 경기부터야? 오늘부터 열심히 뛰어야지.”
은근슬쩍 넘어가려던 성배였지만, 실바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이니에스타와 차비에게 살짝 밀려있기는 하지만, 실바도 지금까지 네 경기에서 1골 2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두 선수를 밀어낼 준비를 착실히 하고 있었다.
언론에서 뭐라 이야기하든 위협적인 선수임은 분명했다.
“좀 넘어가지, 안 속네. 살살해줘. 이번 경기까지만.”
“너나 살살해. 요즘 벨기에 무섭다.”
언론과 팬들에게는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상대 선수에게는 엄살을 떨어주고.
두 선수 모두 같은 태도를 보여주었다.
“속이 시꺼먼 친구들끼리 무슨 대화를 그렇게 하고 있어?”
“확실히 두 사람 다 파악하기 힘들긴 하죠.”
맨체스터 시티 동료인 콤파니와 루카쿠도 합류해 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수다를 떨었다.
벨기에의 성배와 콤파니, 루카쿠, 스페인의 실바, 이탈리아의 마리오 발로텔리와 독일의 제롬 보아텡까지.
맨체스터 시티 선수들은 유로 2012에서 4강에 진출한 네 팀에서 모두 주전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결승 진출 팀이 어디가 되든 맨체스터 시티는 유로컵 우승 주역을 배출하는 상황이었다.
“우리가 예상했던 거랑은 스페인의 선발 명단이 좀 다르네. 그래서, 부담스러워?”
파브레가스를 펄스 나인으로 중앙에 배치하는 포메이션을 예상했지만, 스페인은 이번 대회 내내 활용한 펄스 나인 전술을 들고나오지 않았다.
벨기에의 예상을 벗어난 선택이었다.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반갑죠.”
“오히려 편해졌습니다. 이 전술이면 더 편하죠.”
벨기에의 믿음직한 두 센터백, 반 바이텐과 콤파니는 빌모츠 감독의 물음에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예상하지 못한 전술이지만, 더 편하게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보인 것이었다.
“그렇지. 스페인에서 무서운 건 2선 미드필더들이지, 공격수가 아니거든. 평범한 원톱 전술로 나와준다면 우리야 고맙지. 스페인의 특별함이 사라지니까.”
조별리그와 8강전에서 보였던 득점력의 부진이 신경 쓰였던 것인지, 스페인은 제로톱을 포기하고 평범한 원톱 전술을 들고 나왔다.
“다비드 비야나 전성기의 페르난도 토레스가 있었으면 부담스러웠겠죠. 알바로 네그레도나 페르난도 요렌테는 좋은 선수지만, 앞의 둘이랑 비교하면 손색이 있죠.”
성배의 말대로 스페인의 스트라이커 자원은 스페인이라는 이름값에 비하면 아쉬움이 있었다.
스페인 역사상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하나인 다비드 비야가 부상으로 빠지고 전성기 때는 비야의 위치를 위협했던 페르난도 토레스는 극악의 부진으로 써먹을 수 없게 된 것이 치명적이었다.
“그렇지. 오늘은 네그레도가 나왔는데, 뱅상하고 다니엘을 상대로 네그레도가 뭘 하겠어? 힘으로 압도하지 못하면 자랑하는 테크닉도 무뎌지는 친구인데.”
스페인이 지금 상황에서 활용할 수 있는 스트라이커는 세비야의 ‘짐승’, 알바로 네그레도와 아틀레틱 빌바오의 ‘사자왕’, 페르난도 요렌테였다.
뛰어난 피지컬과 뛰어난 테크닉을 기반으로 한 네그레도, 마찬가지로 뛰어난 피지컬과 압도적인 제공권, 의외로 괜찮은 발재간을 앞세운 요렌테는 분명 뛰어난 공격수였다.
하지만 윙어를 활용하지 않는 스페인의 전술에서 활용하기에 좋은 선수들은 아니었다.
“스페인이 제로톱으로 나왔을 때 우리의 승률이 45% 정도였다면, 원톱으로 나온 지금은 50% 정도로 늘었겠지. 5 대 5 싸움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라.”
약점을 보완한다고 머리를 굴리다가 장점까지 애매하게 놓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았다.
아무리 스페인의 델 보스케 감독이 명장이라고는 하지만, 아무리 명장이라도 핵심 선수의 이탈을 커버할 순 없었다.
워낙 강력한 장점을 보유했기에 장점의 최대화를 포기하더라도 단점을 보완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뿐이었다.
“스페인이 원톱을 선택했다는 것까지 감안해서 5대5야. 우리한테 좋은 소식이 있다고 해서 건방 떨지 말고, 애초에 훈련했던 것처럼 연장전 갔다가 승부차기 간다는 생각으로, 철저히 수비적으로 뛰어. 그래도 스페인은 스페인이니까.”
벨기에의 상황이 조금 더 좋아졌다고는 해도 스페인의 전력이 더 강한 것은 변함없었다.
혹시나 이 상황에 선수들의 집중력이 떨어질까 성배는 한 마디를 보탰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우리도 꽤 경험이 쌓였다고. 그 정도 구분 못 하는 애송이는 아니야.”
“그래. 언제까지나 너한테 의지할 리 없잖아? 걱정하지 말고 이제 마음 편히 우릴 믿으라고.”
성배의 오른팔과 왼팔이라 볼 수 있는 주장단의 두 선수, 콤파니와 베르마엘렌이 걱정을 덜어주었다.
어린 선수들을 독려하며 멘탈을 관리해주던 습관 때문에 여전히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면 동료들의 멘탈을 신경 쓰기 바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여기 있는 친구들을 자세히 봐. 이젠 꼭 국가대표팀이 아니어도 리그나 유럽 대항전에서 얼굴을 볼 수 있어. 많이들 성장했다고.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는 마.”
콤파니의 말대로 처음 성배가 주장을 맡았을 때만 하더라도 어리고 경험이 적었던 선수들은 각자 자신의 소속팀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며 많은 경험을 쌓았다.
유럽 대항전 출전을 노릴 만한 리그 내 강팀에서 활약하며 유럽 리그 경험도 적지 않게 쌓아놓았다.
콤파니나 반 바이텐, 시몬스 등 몇몇 선수들만 믿고 나머지 선수들을 이끌어야 했던 수년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상황이 좋아졌다.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면 네들이 간섭 좀 해달라고 해도 안 해줄 거야. 그전까지는 듣기 싫어도 그냥 들어.”
딱히 동료들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소속팀과 국가대표팀 모두에서 주장으로 몇 시즌 활동하다 보니, 그리고 두 팀 모두 경험이 적은 선수단이었다 보니 습관이 된 것뿐이었다.
맨체스터 시티는 시즌 무패 트레블을 통해 최강팀의 반열에 올랐고, 벨기에도 이번 대회를 기점으로 강팀 반열에 오를 것이었다.
어쩌면 이제 진짜로 다른 동료들의 등에 업혀 갈 수 있을 것도 같았다.
***
“역시 예상대로 벨기에는 라인을 내리고 수비에 집중합니다. 그러면서도 왼쪽의 아자르와 중앙의 루카쿠가 전진 배치되어 역습을 노리는 모습입니다.”
벨기에의 최근 분위기가 아무리 좋아도 스페인을 상대로 맞불을 놓지는 않았다.
유럽 내에서 스페인을 상대로 맞불을 놓을 수 있는 팀은 독일 정도밖에 없었다.
“일단 오늘 벨기에 전술의 핵심은 오른쪽 윙어로 전진 배치된 주겠죠? 레프트백과 라이트백으로는 수도 없이 많이 출전했고, 데뷔 초반에는 수비형 미드필더로도 종종 출전했었지만, 윙어로 전진배치된 건 처음인데요, 과연 얼마나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도 되면서 걱정도 되네요.”
멀티 플레이어로 유명하고, 맨체스터 시티에서는 레프트백으로, 벨기에 국가대표팀에서는 라이트백으로 뛰면서 그 평가를 증명했던 성배지만, 윙어로 나오는 건 처음이었다.
비록 풀백일 때와 큰 차이가 없는 수비적인 역할이었지만, 기본적으로 윙어 포지션인 이상 공격을 아예 안 할 수는 없었다.
“아자르와 루카쿠가 역습을 전담해준다면, 아마 주는 두 선수에게 볼을 공급해 역습 기회를 만들어주는 역할일 거예요. 데푸르와 함께 볼 공급을 맡아주겠죠.”
수월한 볼 공급이 가능하다는 것도 성배가 전진 배치되면서 벨기에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이었다.
최후방 라인에서도 뛰어난 패싱 능력을 보여주었던 성배가 3선까지 전진했으니 그만큼 이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주가 전진 배치된 덕분인지 알바의 측면 공격이 좀 잠잠합니다. 스페인의 핵심은 어디까지나 중앙 공격이지만, 알바의 측면 공격이 받쳐주지 않는 중앙 공격은 막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성배가 전진 배치된 것은 알바의 측면 공격이 무섭기 때문이 아니었다.
포르투갈전에서 고민했던 것과는 이유가 달랐다.
그때는 호날두가 무서웠기 때문이었고, 지금은 측면 공격 자체가 아닌 스페인의 위협적인 중앙 공격을 무디게 하기 위해서였다.
“부스케츠가 차비에게. 차비, 이니에스타, 다시 실바에게! 수비 사이로 파고드는 이니에스타에게 이어졌다가 곧바로 차비! 알론소에게!”
스페인의 빠르고 유기적인 패스 플레이는 변함없었다.
수비력은 좀 부족해도 패싱 능력 덕분에 스페인의 주전 미드필더 자리를 차지한 부스케츠를 시작으로 차비, 이니에스타, 알론소, 실바가 보여주는 패스 플레이는 예술과도 같았다.
“알론소, 박스 안으로 투입! 네그레도, 네그레도. 아, 돌아서지 못합니다. 콤파니가 볼 빼내고 펠라이니가 바깥으로 걷어냅니다.”
하지만 마무리가 되지 않는 예술은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미완성 작품이 많기로 유명한 클래식 작곡가 프란츠 슈베르트나 모차르트, 베토벤의 미완성작 레퀴엠, 교향곡 제10번과 같은 것들은 미완성이어도 높은 가치가 있었다.
하지만 그라운드 위에서 펼쳐지는 예술은 골이라는 형태로 마무리되지 않으면 1원의 가치도 할 수 없었다.
“스페인의 패스가 유기적으로 아름답게 흐른다는 걸 부정할 순 없어요. 그런데 도대체 슈팅은 언제 할 건가요? 혹시 축구가 아니라 기계체조 같은 거라고 생각하나요? 예술 점수, 기술 점수 받아서 이기려고 하는 것 같네요.”
공격력이 없는 아르벨로아, 전진 배치된 성배의 수비에 옴짝달싹 못 하는 조르디 알바였기에 스페인의 측면 공격은 거의 봉쇄되었다.
결국, 중앙 공격이 강제될 수밖에 없었고, 센터백 네 명으로 포백라인을 구성한 벨기에가 마음먹고 중앙을 잠그자 스페인은 슈팅 한 번 제대로 때리지 못했다.
지금 스페인의 축구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빛 좋은 개살구’였다.
< 낭만필드 - 34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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