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333화 (221/356)

< 낭만필드 - 333 >

“벨기에의 경기력은 지금 충분히 좋아요. 폴란드에서 가장 위협적인 선수인 레반도프스키는 콤파니, 반 바이텐 조합에게 완벽하게 막혀있고, 오른쪽의 쿠바 역시 베르마엘렌의 수비에 막혀있고요. 주가 수비하는 폴란드의 왼쪽은 당연히 꽉 막혀있죠.”

개최국 폴란드와의 경기에 긴장했던 벨기에 팬들은 경기를 지켜보며 일단 마음을 놓았다.

벨기에의 수비진은 폴란드를 응원하는 관중들의 뜨거운 열기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반 바이텐과 성배는 이 정도에 흔들리기엔 경험이 너무 많았고, 콤파니는 이번 시즌을 통해 큰 경기 경험을 많이 쌓았기에 흔들리지 않았다.

베르마엘렌은 나머지 세 선수가 차분히 중심을 잡아준 덕분에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폴란드의 공격도 훌륭히 막아주고 있고, 중원의 지배권은 초반부터 벨기에가 가지고 있는 상황이에요. 이제 남은 건 골밖에 없어요. 골만 넣으면 경기를 확실히 벨기에 쪽으로 가져올 수 있죠.”

시몬스와 펠라이니, 데푸르가 출전한 중원의 주도권 역시 벨기에에게 있었다.

폴란드의 미드필더, 무라프스키와 폴란스키는 둘 다 수비형 미드필더에 가까운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기에의 세 선수를 상대로 중원에서 우위를 점할 순 없었다.

“아, 정말 공격도 잘 이뤄지고 있는데, 마무리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공격수들의 움직임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이상하게 마무리가 안 됩니다.”

“아자르가 부진한 것이 좀 아쉽지만, 메르텐스와 루카쿠의 움직임은 좋아요. 하지만 아무래도 어린 선수들이라 그런지 마무리가 조금 흔들리는 모습이죠?”

에이스가 되어줄 거라 기대했던 아자르는 피스첵의 수비를 이겨내지 못하고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도 메르텐스와 루카쿠가 아자르의 역할까지 해주면서 인상적인 장면들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다만, 아직 어린 선수들이어서 그런지 일방적으로 폴란드를 응원하는 경기장 분위기에 흔들리며 마무리 슈팅이 부정확하게 흩날리고 있었다.

‘한 골만 넣을 수 있으면 쟤네들도 정신을 차릴 텐데.’

성배는 이번 대회에서도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히는 스페인과 스페인의 대항마로 꼽히는 독일, 지난 월드컵 준우승팀 네덜란드나 전통의 강호 잉글랜드, 이탈리아 정도가 아니면 벨기에가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다.

최약체 팀 중 하나인 폴란드를 상대로 이렇게 고전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첫 경기니까 그럴 수 있어. 이번 경기에서 확실히 적응하고 다음 경기부터 잘 넘기기만 하면 돼.’

아직 젊은 선수단이었기에 지금처럼 흔들리지만, 젊은 선수단이었기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한 경기 한 경기 치러 나갈수록, 심하면 경기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 젊음의 특권이었고, 대부분의 벨기에 선수들은 이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자, 천천히 만들어봐야죠. 시몬스에게 볼을 돌리면서 전체적으로 전진, 다시 한 번 침착하게 공격을 시도합니다.”

세 명의 미드필더 중에서도 수비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시몬스가 볼을 잡고 천천히 전진했다.

시몬스와 함께 호흡을 맞추는 펠라이니와 데푸르는 그 양옆으로 전진, 폴란드 진영으로 넘어가 공격에 참여했다.

“폴란드는 한껏 웅크린 채로 벨기에의 공격에 대비하는 모습입니다. 두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와 포백 수비수들은 물론이고 2선 공격수들까지 내려와 있습니다.”

폴란드와 함께 A조에 속한 팀은 체코와 러시아, 그리고 벨기에.

흔히 사람들은 A조를 이번 유로 2012에서 가장 쉬운 조라고 말하지만, 1 포트의 강팀만 없을 뿐, 2, 3, 4 포트에서는 나름 강팀이라 평가되는 팀들이 들어온 상태였다.

게다가 확실한 호랑이가 없고 세 마리의 늑대가 서로 할 만하다 생각하는 상황이기에 A조의 네 팀은 피가 말리는 상황이었다.

“폴란드는 최소한 벨기에를 상대로 무승부 정도는 거둬줘야 하는 입장이죠. 벨기에와 체코, 러시아 모두 폴란드에게는 어려운 팀들이지만, 어떻게는 1승을 거두고 나머지 두 경기는 최소한 비겨주는 게 폴란드의 목표거든요?”

덕분에 폴란드만 지옥이었다.

차라리 확실한 호랑이가 있다면, 나머지 늑대들도 한 번씩 상처를 입어 그 사이에서 어부지리를 노려보겠지만, 지금의 이 상황은 폴란드에게 최악의 상황이었다.

폴란드의 목표는 세 경기 중 한 경기에서 1승, 그리고 나머지 두 팀을 상대로 2무를 거둬 8강을 노려보겠다는 것이었다.

“오른쪽에서 주가 올라옵니다. 시몬스, 오른쪽의 주에게 넘겨줍니다. 벨기에 선수들, 폴란드 진영 안쪽에서 다시 한 번 득점을 노립니다.”

1, 2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벨기에를 상대로 텐백을 시전하는 팀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최근 1, 2년 사이에 벨기에도 텐백 상대 경험을 많이 쌓았고, 경기장 분위기에 흔들리고 있을 뿐, 폴란드의 텐백은 침착하게 잘 상대해주고 있었다.

‘마루앙, 로멜루. 높이로 따지면 우리가 한 수 위지.’

벨기에의 수비진은 스페인, 독일 등 유럽 최강의 팀을 상대로도 밀리지 않는다는, 오히려 조금이나마 더 나을 수도 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들과 같은 선상에 놓이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역시나 공격진에 있었다.

하지만 높이만큼은 그들보다 확실히 위에 있었다.

펠라이니와 루카쿠의 높이는 유럽 내 최고 수준이었다.

‘마무리는 흔들려도 높이는 흔들릴 이유가 없어.’

펠라이니와 루카쿠의 힘과 높이는 홈팬들의 어마어마한 응원을 등에 업은 폴란드가 아무리 몸을 날려 달려들어도 상대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마무리가 문제이긴 하지만, 높이에서의 압도적인 우위를 계속 활용하면 언젠가 폴란드의 골문을 열 수 있을 것이었다.

“주, 얼리 크로스를 시도! 펠라이니, 아! 폴란스키, 뒤에서 밀었습니다. 벨기에, 좋은 위치에서 프리킥 얻어내면서 기회를 잡습니다.”

결국, 높이에서 심하게 밀리며 고생하던 폴란드는 볼이 높게 떴을 때 거친 플레이가 나오기 시작했다.

펠라이니에게 자리를 완전히 내줘버린 폴란스키는 뒤에서 손을 사용해 펠라이니를 밀어버렸다.

펠라이니를 거쳐 박스 안으로 볼을 투입하려던 목적이었기에 펠라이니의 위치는 박스 가까운 곳이었고, 벨기에에게 결정적인 프리킥 찬스가 주어졌다.

“좋았어, 마루앙. 역시 넌 최고의 전봇대야.”

“뭐? 전봇대? 말이 심하네. 나 EPL에서도 알아주는 미드필더라고.”

역시 펠라이니는 성배의 믿을맨이었다.

공격 시 크로스를 주 무기로 하는 성배에게 뛰어난 제공권을 갖춘 선수의 존재는 굉장히 중요했다.

토트넘 시절을 제외하면 선수생활 내내 제공권이 뛰어난 선수와 함께했고, 성배는 이런 동료를 훌륭하게 활용해왔다.

“자, 벨기에. 절호의 기회입니다. 필드 플레이가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면 세트피스 기회를 살리면 됩니다. 제공권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한 상황에서 주라는 세계 최고의 키커까지 있으니 세트피스로 충분히 득점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벨기에의 세트피스는 세계적인 강팀들도 견제하는 공격 옵션이었다.

수비진은 완성되었지만, 공격진은 빈약했던 2008년부터 2010년 말까지 벨기에의 상승세를 이끌었던 것은 강력한 수비력과 세트피스를 통한 득점이었다.

‘오랜만에 세트피스에 올인하는 상황이네.’

최근 벨기에의 공격력도 많이 성장했고, 유로 예선으로 강팀과 경기를 가질 기회가 많이 없었기에 세트피스는 조력자 역할로 돌아간 상황이었다.

하지만 큰 대회에 참가하고 최소한 유로 예선 정도에서는 강팀으로 분류될 팀과 만나게 되자, 세트피스에 걸어야 할 상황이 펼쳐졌다.

‘상황이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좀 반갑긴 하네.’

세트피스는 커리어 초반, 아직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을 때 사활을 걸고 매진해 끌어올린 무기였다.

오랜만에 자신의 세트피스에 기대하는 동료들과 팬들의 모습을 보는 게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무조건 성공시켜야지.’

일단 상황은 굉장히 좋았다.

골대와의 거리는 대략 20m 내외, 이상적인 프리킥 위치보다는 살짝 골대와 가까운 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훌륭한 위치였다.

“주가 프리킥을 준비합니다. 여기서 꼭 한 골 넣어서 경기를 편하게 만들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주에게는 분명 충분한 능력이 있죠. 주의 프리킥은 세계에서도 알아주잖아요? 그리고 원래 주는 결정적인 경기, 결정적인 순간에 이상할 정도로 강한 선수이기 때문에 뭔가 하나 해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소속팀에서도, 국가대표팀에서도 성배는 항상 하이라이트 필름을 담당하는 선수였다.

우승이 걸리거나 예선 통과가 걸리는 등 중요한 순간이 되면 뭔가에 빙의된 듯 평소보다 더 엄청난 플레이를 보여주는 선수가 바로 성배였고, 이런 활약이 몇 년 동안 지속되자, 사람들은 이럴 때만 되면 성배에게 기대를 걸었다.

“자, 주. 마음에 드는 모양으로 볼을 내려놓고 뒤로 물러납니다.”

수만 명의 관중과 양 팀 관계자 수십 명의 시선이 성배에게 집중되었다.

볼을 내려놓은 성배는 뒤로 물러나 자세를 잡은 뒤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자, 한 골 넣어보자.’

주심의 휘슬이 울렸을 때, 성배는 이미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골대를 응시하며 목표지점을 확인한 성배는 골대에서 눈을 떼고 볼에 집중했다.

목표를 보면서 때리는 것보다 목표를 설정한 뒤, 임팩트 순간을 눈으로 지켜볼 때 더 정확한 킥을 날릴 수 있었다.

한두 번 때려본 게 아니기 때문에 의도한 대로 볼을 때릴 수만 있다면 정확도는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주성배, 프리킥! 아... 어! 흔들립니다, 아! 골! 골입니다! 주성배!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주의 프리킥이 골망을 흔들면서 1-0으로 앞서나가는 벨기에!”

성배의 프리킥은 중간까지만 해도 궤도가 너무 높아 실축인 것처럼 보였다.

평소 성배는 트레이드마크인 아웃사이드 프리킥을 포함해 낮고 빠르게, 날카롭게 휘어져 들어가는 프리킥을 자주 구사했기 때문에 프리킥이 높게 뜨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캐스터가 아쉬움의 탄성을 내뱉는 순간, 볼이 흔들리더니 급격하게 떨어지며 폴란드의 골망을 흔들었다.

“이거 무회전 프리킥 같은데요? 주가 무회전 프리킥도 때렸던가요? 저는 처음 보는 것 같은데요.”

무회전 프리킥의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높게 떴다가 불규칙적으로 이리저리 흔들리며 뚝 떨어져 골키퍼를 당황하게 하는 무회전 프리킥의 특징이 그대로 나타났다.

‘연습한 보람이 있네. 무기는 많을수록 좋지.’

성배는 개인적으로 무회전 프리킥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대중적인 인기에 비해 의외로 성공률이 높지 않았고, 키커마저 예상하기 힘든 궤적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프리킥으로만 한 시즌 10골 가까이 넣으면서 상대팀들이 성배를 분석하고 있었고, 그럴수록 다양한 무기가 필요했기 때문에 지난 시즌부터 익혀왔다.

그리고 첫선을 보인 경기에서 곧바로 성공하며 자신이 왜 프리킥 스페셜리스트라 불리는지를 증명해냈다.

“무회전 프리킥이 맞네요. 여하튼 대단한 선수네요. 이미 프리킥으로 일가를 이뤘다 평가받는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의 무기를 들고 나왔어요.”

“그러면서 벨기에가 간절히 기다렸던 선취 골까지 기록해줍니다. 역시 벨기에의 주장다운 활약입니다!”

현재 경기의 흐름을 봤을 때, 이 선취 골의 중요성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폴란드에게는 벨기에의 공격을 버틸 능력이 있었지만, 벨기에의 수비를 뚫어낼 능력이 부족했다.

선취 골을 통해 얻어낸 한 골의 리드는 벨기에가 경기를 편하게 이끌어나갈 수 있게 해줄 것이었다.

< 낭만필드 - 333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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