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332 >
“폴란드는 별거 없어. 도르트문트에서 뛰는 세 명이 제법이긴 하지만, 그 세 명으로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지.”
경기 전날, 가볍게 몸을 풀면서 마지막으로 전술을 점검한 벨기에는 한곳에 모여 폴란드전 대비 브리핑 시간을 가졌다.
폴란드는 FIFA 랭킹 60위권의 팀으로, 이번 대회에 참가한 팀 중 랭킹이 가장 낮은 팀이었다.
대회를 개최하게 된 덕분에 출전한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유로컵 출전 자체가 힘들었을 것이었다.
“폴란드에서 그나마 조심해야 하는 건 도르트문트 소속 선수들이라고 했지? 얘네가 다들 오른쪽에 몰려있단 말이지. 라이트백 우카쉬 피스첵, 라이트윙 야쿱 블라시치코프스키, 그리고 최전방의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중요한 건 이 세 명인데... 토마스. 문제 없지?”
“당연하죠. 그 친구들이 아무리 잘 뛴다고 해봤자, 저 프리미어리거입니다. 하하. 쿠바나 피스첵이나 좋은 선수지만, 최소한 수비만 따져서는 저를 뚫기 힘들죠.”
폴란드의 장점은 오른쪽 측면이지만, 벨기에의 레프트백은 베르마엘렌이었다.
풀백으로서 뛰어난 선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수비에서만큼은 이번 유로컵 최고의 레프트백이었다.
센터백으로도 프리미어리그 최정상급의 선수인데, 발이 빠른 센터백이기에 측면으로 빠지면 비교적 몸이 약한 윙어들을 압살할 수 있었다.
“네가 올라가질 않으니까 그렇지. 좀 올라가라, 자식아.”
시몬스의 등짝 스매시가 베르마엘렌의 등에 작렬했다.
단연 유럽 최고의 수비력을 갖추고도 센터백으로의 평가에 비해 레프트백으로서의 평가가 낮은 이유는 결국 공격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버래핑을 거의 시도하지 않는 베르마엘렌 덕분에 블라시치코프스키, 통칭 ‘쿠바’와 우카쉬 피스첵의 오른쪽 측면은 어느 정도 죽을 수밖에 없었다.
“뱅상, 다니엘. 레반도프스키... 완전 애송이잖아? 그렇지?”
폴란드의 에이스는 레반도프스키였다.
지난 시즌까지 도르트문트의 주포, 루카스 바리오스가 워낙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레반도프스키는 분데스리가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기에 백업으로 뛰었지만, 이번 시즌 드디어 잠재력을 폭발시켰다.
바리오스의 부상을 틈타 시즌 초반 주전으로 출전한 레반도프스키가 대폭발, 주전 자리를 완벽히 빼앗아내며 리그 22골로 리그 득점 3위, 시즌 30골을 넘기고 도르트문트의 에이스가 되었다.
덕분에 바리오스는 자리를 잃고 중국 이적 이야기가 나오는 중이었다.
“레반도프스키요? 하하, 원톱 스트라이커가 애초에 동료 도움 없이 혼자서 뭘 할 수 있답니까? 쿠바만 잘 막아주면 레반도프스키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분데스리가에서 레반도프스키와 여러번 붙어보았던 반 바이텐은 자신감을 보였다.
도르트문트의 레반도프스키가 무서운 이유는 완벽한 오프 더 볼 무브먼트, 볼이 없을 때의 움직임에 있었다.
포스트 플레이와 패싱 플레이도 좋은 선수지만, 레반도프스키를 이 자리까지 올려놓은 장점을 한 가지만 꼽으라면 역시 볼이 없을 때의 움직임이었다.
“폴란드 2선이 리부스에 오브라니악, 쿠바였죠? 토마스가 쿠바만 잘 막아주면 레반도프스키도 경기장에서 완전히 지워질 겁니다.”
그 이야기는 2선 공격수들의 도움이 없으면 위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벨기에의 뛰어난 수비진을 폴란드의 공격진이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기에 콤파니 역시 레반도프스키를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폴란드의 공격진은 벨기에의 수비진에게 부담을 주기 힘든 전력이었다.
“뭐, 주야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거고... 미드필드는 뭐. 다들 알아서 잘할 수 있지?”
“와... 우리한테 너무 관심 없으신 거 아닙니까?”
벨기에도 수비적인 팀이라 평가되고 있었는데, 폴란드는 벨기에보다도 훨씬 더 수비적인 팀이었다.
중앙 미드필더 두 명이 전부 수비형 미드필더였는데, 유일한 장점인 장악력마저 중앙 미드필더 세 명을 앞세운 벨기에를 감당할 수 없었다.
폴란드 미드필더들의 창조성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고, 장악력마저 밀리면 큰 활약을 보이긴 힘들 것이었다.
“너희가 제일 중요해. 수비랑 미드필더는 어차피 우리가 압도적이지만, 폴란드의 수비는 그리 만만하지 않으니까.”
폴란드의 수비진이 네임밸류가 높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전력이 약한 폴란드에서 그나마 장점이라 꼽히는 수비 조직력은 절대 쉽게 볼 수 없었다.
“에이, 아무리 수비력이 뛰어나다고는 해도 거기까지죠. 벨기에는 이미 그 정도 팀에게 고전할 수준을 벗어났죠.”
하지만 성배는 물론이고 다른 선수들도 자신이 있었다.
고작 1, 2년 만에 FIFA 랭킹 40위권에서 10위권 진입을 눈앞에 둔 벨기에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조직력이 아무리 좋아도 요즘 그 정도 조직력은 다 가지고 있어요. 그 이상의 기량이 있어야죠.”
에당 아자르의 자신감이었다.
이번 시즌 최강의 클럽 맨체스터 시티에서 데뷔 시즌에 10대의 나이로 20골 넘게 기록한 루카쿠도 루카쿠지만, 아자르 역시 이번 시즌 센세이션을 일으킨 선수였다.
리그앙이라고는 하지만, 리그 38경기에서 무려 20골 22어시스트를 기록, 리그앙을 초토화시킨 것이었다.
이번 여름 이적시장 최대어이기도 했다.
“열심히 해볼게요. 에당은 피스첵이랑 붙어야 하니까, 제가 좀 더 힘써보겠습니다.”
그리고 벨기에의 마지막 고민이었던 오른쪽 측면의 주인 자리를 차지한 드리스 메르텐스 또한 이상하게 관심에서는 좀 밀려있지만, 뛰어난 선수였다.
PSV 에인트호벤에서 활약 중인 메르텐스는 이번 시즌 리그 21골 16어시스트, 시즌 27골 24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에레디비지에를 정복했다.
활약상에 비하면 높지 않은 인지도가 의아할 정도였다.
“그래, 뭐. 솔직히 이렇게 말하고는 있지만, 고작 폴란드에게 잡히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니지. 일단 첫 경기고, 그리 어려운 상대는 아니니까 너희한테 한 번 맡겨본다. 절대 내가 편하게 있으려고 하는 건 아니고. 하하하.”
조금 아쉬운 부분이지만, 빌모츠 감독에게 전술적인 무언가를 바라긴 힘들었다.
하지만 빌모츠 감독은 처음부터 벨기에 국가대표팀의 갈등을 해결하는 역할을 맡았고, 그 역할을 다해준 것만으로도 감독직 수행에 대해 합격점을 받을 수 있었다.
조금 아쉬운 부분은 성배와 다른 선수들이 나눠 맡아주어야 했다.
“편하게 있고 싶지 않은 건 알겠는데, 마크. 완전 편하게 해드리죠. 벤치에서 한숨 자도 되고.”
성배는 벨기에 대표팀의 전력에 대해 자신감이 있었다.
그리고 주장의 자심감은 동료들에게도 전해졌다.
일반적으로 다른 유럽 팬들은 기껏해야 8강 정도 가면 성공하는 거라고 벨기에를 평가했지만, 벨기에 선수단 내부적으로는 그 이상을 노렸고, 자신감도 충만한 상태였다.
물론, 경험의 문제가 터질 수 있어 실전에 들어가 봐야 알겠지만, 일단 대회 전 분위기는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10년 만에 벨기에의 메이저 대회 중계로 인사드립니다.”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2012년 6월 8일, 벨기에는 폴란드 바르샤바에 위치한 PGE Norodowy 경기장에서 개최국 폴란드와 조별리그 1차전 경기를 가졌다.
“하하, 드디어 이날이 왔네요! 제 나이 마흔다섯이던 10년 전 월드컵 중계 이후 꼭 10년 만에, 쉰다섯이 되어서 벨기에의 메이저 대회 경기 중계를 하게 되었어요. 정말 감회가 새롭네요.”
“저는 처음입니다, 하하. 제가 축구 중계를 시작한 지도 어느새 7년이 지났는데, 이 자리까지 오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습니다.”
중계진 역시 묘한 감상에 빠져 경기 시작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80년대에 벨기에 국가대표로 활동했던 해설자는 2002 월드컵 이후 10년 만에 메이저 대회 중계에 나섰고, 2006년 독일 월드컵 진출에 실패한 이후 선수단과 함께 세대 교체되어 나타난 캐스터는 메이저 대회 중계가 처음이었다.
“계속된 부진을 겨우 극복하고 10년 만에 메이저 무대에 복귀한 벨기에지만, 그 저력은 절대 약하지 않아요. 오히려 전성기의 끝물이었던 2002년, 아니, 한창 전성기를 달렸던 90년대 후반의 벨기에보다 지금에 벨기에가 더 강해 보이기까지 해요.”
벨기에 팬들은 이번 유로 2012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했고, 상당히 많은 숫자가 폴란드를 찾은 상태였다.
실제로 벨기에는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팀임에도 불구하고 8강 진출이 유력하다는 예상을 받으며 운이 좋을 경우 그 이상도 노려볼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 10년의 기다림을 보상받으려는 벨기에 팬들은 당연히 8강 이상의 성적을 기대했다.
“충분히 가능합니다. 주를 중심으로 똘똘 뭉친 우리 벨기에 대표팀은 스페인이나 네덜란드, 독일, 잉글랜드 등의 강팀을 상대로도 충분히 해볼 만한 전력으로 보입니다.”
유로 2012를 향한 벨기에 팬들의 기대감은 캐스터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벨기에 팬들은 독일이나 스페인을 만나도 패배하지 않고 만족스러운 위치까지 올라가는 벨기에의 모습을 기대했다.
만족스러운 위치가 어디가 될지 아무도 모르지만, 어쨌든 8강 이상인 것만은 확실했다.
“어쨌든 벨기에의 축구팬 여러분, 이제 곧 시작합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됩니다. 그럼 잠시 뒤에 뵙겠습니다.”
벨기에 거리의 유동인구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었을 정도로 이번 유로 2012에 쏠린 벨기에 국민들의 관심은 대단했다.
2011년 12월 6일, 드디어 새로운 내각이 출범해 기존 기록을 거의 두 배 가까이 경신한 무정부 상태 541일 기록이 끝났지만, 여전히 벨기에 사회는 뒤숭숭한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번 벨기에 국가 대표팀의 어깨가 무거웠다.
***
“폴란드가 동전 앞면, 벨기에가 동전 뒷면. 폴란드, 선축.”
경기 시작 직전, 성배는 하프라인에서 폴란드의 주장인 블라시치코프스키와 페어 플레이를 약속하며 악수를 나누었다.
주심이 던진 동전은 앞면을 내보였고, 폴란드의 선축이 결정되었다.
“페어 플레이하자고.”
“그러지. 그쪽도 잘 부탁한다.”
폴란드의 주장, 야쿱 블라시치코프스키와 성배는 서로 자신들의 국가대표팀 엠블럼이 새겨진 작은 깃발 모양의 페넌트를 교환하며 페어 플레이를 다짐했다.
[와아아아아!!!!!!]
페넌트 교환을 끝으로 양 팀 주장은 각자 자신의 진영으로 향했다.
개최국 폴란드의 홈팬들은 블라시치코프스키와 폴란드 대표팀을 향해 아낌없는 박수와 함성을 보내주고 있었다.
‘완전 악역이네, 악역이야.’
성배는 폴란드 관중들의 압도적인 응원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확실히 경기장의 분위기는 벨기에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뭐 하고 있어!? 지금 저거 안 보여? 소리 안 지를 거야? 지금 저 친구들 하는 거 안 보여?”
[와아아아아!!!]
“더! 더 크게!!”
[[와아아아아!!!]]
성배는 벨기에 서포터가 모여있는 스탠드 쪽으로 걸어가 호응을 유도했다.
수적으로 상대가 안 되는 폴란드 팬들의 응원 소리를 이길 순 없겠지만, 그래도 그 절반 수준까지는 올라가야 했다.
팬들이 성배의 행동에 열광해준 덕분에 벨기에 선수단의 사기도 어느 정도 올라왔다.
“우리 팬들 멋진데?”
“그러게. 저렇게까지 해주는데 꼭 이겨야겠지?”
성배와 콤파니는 팬들의 함성을 들으며 승리를 다짐했다.
원정 경기의 분위기가 부담스럽긴 하지만, 일당백의 서포터를 등에 업은 이상 조금 전처럼 움츠러들진 않을 것이었다.
< 낭만필드 - 33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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