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327 >
“투레, 이번에는 왼쪽으로! 다비드 실바! 조제 보싱와! 터치라인 바깥으로 걷어냅니다! 오늘 집중력 좋습니다, 보싱와!”
이바노비치를 대신해 오른쪽 풀백으로 출전한 보싱와는 2009/10시즌까지 월드클래스 라이트백으로 찬양을 받던 선수였다.
하지만 2009/10시즌 중반, 복귀까지 1년 가까이 소요된 장기 부상을 당한 이후, 2010/11시즌 중반에야 돌아왔고, 돌아온 보싱와는 안구 건강을 위협할 정도로 폼이 떨어진 모습이었다.
“보싱와가 이렇게만 해주면 첼시의 걱정이 줄어들죠! 이게 지난 시즌의 그 선수가 맞나요? 완전히 다른 선수가 되었어요!”
지난 시즌이 끝나고 전문가와 팬 모두에게 방출 예상자로 꼽혔던 보싱와는 유리 지르코프의 이적과 이바노비치의 부상을 틈타 오히려 주전 자리를 꿰찼다.
하지만 역시나 경기력은 형편없었고, 차라리 노쇠화가 심각한 파울루 페레이라나 리저브의 샘 허친슨, 혹은 다비드 루이즈라도 쓰자고 할 정도였다.
“이건 거의 신데렐라급 스토리입니다! 시즌 내내 비난을 한몸에 받았던 보싱와가 그 어떤 경기보다 중요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주인공급 활약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오른쪽의 조제 보싱와가 기대 이상의 활약으로 각성하면서 말이 필요 없는 왼쪽의 애쉴리 콜, 라인을 내리면 통곡의 벽이 되는 개리 케이힐 - 다비드 루이즈 콤비로 이루어진 첼시 수비진은 EPL 최고의 골키퍼, 페트르 체흐와 함께 골문을 단단하게 지키고 있었다.
‘정말 많이 뛰는구나. 이렇게 되면 우리가 더 많이 뛰는 방법밖에 없겠어.’
성배는 전반전에 득점하는 것을 거의 포기했다.
골을 넣으면 좋겠지만, 골보다도 공략 방법을 찾는 것에 주력하기로 한 것이었다.
모든 것을 걸고 미친 듯이 달려드는, 경기가 끝나고 바로 쓰러져 며칠을 일어나지 못해도 좋다는 각오로 달려드는 첼시 선수들을 상대로 골을 넣으려면 지금과 다른 뭔가가 필요했다.
“뛰어. 더 많이 뛰어. 우리가 이기려면 그 방법밖에 없어.”
하프타임, 라커룸에 모인 선수들 앞에서 성배가 가장 먼저 꺼낸 말이었다.
“지금도 다들 열심히 뛰고 있는데? 활동량도 다들 평소보다 많아. 이것보다 더 많이 뛰면 오버페이스로 다들 퍼져.”
성배의 말에 콤파니가 반론을 제기했다.
실제로 맨체스터 시티 선수들 역시 평소보다 더 많은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라는 마약은 선수들을 흥분시켰고,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오버페이스를 하게 만들었다.
“일단 어느 정도는 괜찮아. 사람은 원래 흥분하면 평소보다 더 큰 힘을 내기 마련이지. 오늘 같은 날은 원래 살짝 오버페이스다, 싶게 뛰어야 해.”
승격 플레이오프를 치르던 로얄 앤트워프 역시 그랬다.
그 때의 경험을 참고해 생각하면 평소보다 살짝 오버페이스인 지금 페이스로 경기를 치러도 아마 경기가 끝나고 나면 평소와 비슷하게 지칠 것이었다.
인간은 생각보다 대단한 종족이었고,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면 평소보다 훨씬 강한 힘을 낼 수 있었다.
“그건 너무 추상적인데. 확신할 수 없는 불확실한 예상으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치를 순 없어.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경기인지 잘 알잖아.”
“뱅상의 말이 맞아. 지금도 우리가 유리한 상황인데, 굳이 우리가 먼저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고 봐.”
콤파니에 이어 야야 투레까지도 성배의 제안에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확실히 골이 들어가지 않았을 뿐, 경기를 지배하는 쪽은 맨체스터 시티였다.
안정적으로 지금 페이스만 유지하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원래는 정상이었다.
“지금처럼 하면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저 미친놈처럼 달려드는 첼시 친구들이 과연 지칠까?”
하지만 성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첼시는 지금 합법적인 도핑을 하고 경기에 나선 것과 마찬가지의 상태였다.
그리고 원래 저렇게 미친놈을 제정신으로 상대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미친놈들한테 이기려면 우리도 미치는 방법밖에 없어. 첼시가 미친 것처럼, 우리도 미쳐야 해.”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상대할 땐, 일찌감치 격의 차이를 알려주어야 했다.
지금은 경기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어서 느끼지 못하겠지만, 맨체스터 시티가 한 골 두 골 차이를 벌리게 된다면, 페이스를 억지로 끌어올린 여파가 그들을 덮칠 것이었다.
즉,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던 도핑의 효과가 끝나고, 그 부작용이 그들을 괴롭히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아니, 그래도...”
“아니, 주의 말이 맞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 말이야. 정확히 맞췄어.”
콤파니는 가만히 성배의 주장을 곱씹었고, 투레는 다시 반박하려 했다.
하지만 뒤이어 나타난 만치니는 투레의 말을 끊으며 성배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원래 이렇게 중요한 경기만 되면 팀 차원에서 미치는 경우가 있지. 그렇게 되면 아무리 불리하다는 평가를 받았더라도 이변을 일으키는 경우도 많아.”
만치니 감독은 까다롭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감독 입장에서는 예상치 못한 변수의 개입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팀 차원에서 미친 걸 상대하려면 우리도 같이 미치는 방법밖에 없어. 주가 말한 것처럼 뛰어. 미친 듯이 뛰어. 경기가 끝나면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고, 피가 목으로 역류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까지 뛰어. 그래야 이길 수 있어.”
만치니 감독의 이야기는 결국 성배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친놈들은 제정신으로 상대할 수 없다. 같이 미쳐라.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는 이야기였다.
“단, 여기서 끝이라면 감독직 내려놔야겠지.”
근거는 있다지만, 여기서 끝이라면 아시아권의 근성론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세계적인 명장 반열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만치니는 근성론의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첼시보다 유리한 부분은 굉장히 많아. 공격력, 수비력, 중원 장악력 등 모든 부분에서 우리가 앞서지.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으로 유리한 게 있어. 그게 뭘까?”
만치니는 주위를 돌아보며 질문을 던졌다.
성배는 알고 있었지만, 만치니의 눈빛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동료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 만치니의 의도를 이해한 것이었다.
“음... 체력입니까?”
“아, 체력! 벤치 멤버 싸움에서 우리가 압도적으로 유리하겠네요.”
공격력과 수비력, 선수들의 개인 기량 등 다양한 부분이 언급되었다.
사실 첼시보다 불리한 부분을 찾기가 더 어려웠기에 모든 대답이 정답이었지만, 만치니는 실바와 콤파니의 대답을 듣고 정답이라는 듯 미소 지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선수들의 체력과 교체 선수의 질에서 첼시는 절대 우릴 따라올 수 없지.”
이 부분이야말로 맨체스터 시티가 가장 유리한 부분이었다.
맨체스터 시티의 스쿼드 두께는 전 유럽에서도 경쟁자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반면, 첼시는 전성기를 이끈 1기 아브라모비치의 선수들이 나이가 들면서 과도기를 맞은 상황이었고, 자연히 선수단의 스쿼드도 얇아져 있었다.
게다가 경고 누적과 부상으로 주전 선수 네 명이 출전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겹쳤다.
첼시의 벤치 멤버는 이미 노쇠화로 인한 기량 저하가 심각한 마이클 에시앙과 파울로 페레이라, 지난 시즌 전반기의 뛰어난 활약이 회광반조였던 플로랑 말루다, 6개월짜리 장기 부상에서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오리올 로메우, 아직 성장이 필요한 다니엘 스터리지, 골키퍼 로스 턴불.
설명이 필요 없는 먹튀 중의 먹튀, 페르난도 토레스였다.
“미친 듯이 뛰어. 그러다가 첼시도, 우리도 지치면 교체 카드를 꺼내 들어야겠지. 첼시에서 나올 수 있는 선수는 뻔해. 반면 우리는 저들의 베스트 멤버보다 뛰어난 선수들이 쌩쌩한 체력을 유지한 채 투입되는 거지.”
대략 후반 20분 정도까지는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첼시에 보조를 맞춰 대응하며 체력을 빼놓는 것에 집중한다.
당연히 골을 노리겠지만, 그건 두 번째 목적이고, 첼시 선수들의 체력을 최대한 빼놓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다.
그리고 후반 20분 이후, 오버페이스로 체력이 바닥난 선수들이 하나둘 교체되기 시작할 때, 맨체스터 시티의 본격적인 역습이 시작될 것이었다.
“저 친구들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어. 그 시간이 끝날 때까지만 적당히 놀아주다가 그다음에 지옥을 보여주라고. 아주, 지옥으로 보내버려. 알아들었지?”
“예! 알겠습니다!”
“맡겨만 주시죠! 아주 지옥으로 보내버릴 테니까!”
만치니 감독과 성배가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주면서 뭔가 요상하게 진행되던 경기의 공략법을 깨닫게 된 선수들은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확실히 알아들은 것 맞지!! 조금 더 크게 대답하라고!!”
“알아들었습니다!!!”
“제대로 한 번 미치면 되는 거 아니야!! 벤치에서 마음 편히 지켜보시라고!!!”
“축구만 잘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미치는 것도 더 잘하죠! 아무 걱정 하지 말라니까요? 하하!!!”
맨체스터 시티 선수단에 활기와 함께 자신감이 돌아왔다.
“주. 맡겨도 되겠지?”
만치니 감독은 마지막으로 신뢰 가득한 표정으로 성배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 그런 말은 이제 안 하셔도 된다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습니까.”
자신감이 넘치는 눈빛으로 신뢰를 주며 성배가 대답했다.
“다른 친구들이 말한 것처럼 그냥 벤치에서 편하게 계시면 됩니다. 정 지루하시면 맥주라도 한잔 하시던가요.”
“이런. 난 이탈리아 사람이라고. 와인이나 샴페인으로 하지.”
현시점에서 누구나 다 인정하는 유럽 최강의 클럽, 맨체스터 시티에 자신감이 돌아왔다.
***
“맨체스터 시티의 활동량이 갑자기 늘어났습니다! 전반전부터 미친 듯이 달리던 첼시보다도 오히려 더 많이 뛰는 것 같습니다.”
마음먹고 달리기 시작한 맨체스터 시티 선수들의 활동량은 첼시 선수들을 오히려 압도했다.
맨체스터 시티가 훨씬 젊은 팀이었고, 그 덕분에 기본적으로 체력도 더 좋은 편이었다.
게다가 첼시는 전반전부터 달렸고, 맨시티는 후반전부터 달리기 시작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안 그래도 전력이 더 강하다고 평가되던 맨체스터 시티가 활동량까지 더 많이 가져가니 자연스럽게 흐름도 맨체스터 시티 쪽으로 옮겨가고 있어요. 전반전에는 맨시티가 주도하긴 했지만, 뭔가 기묘한 분위기였는데, 이제는 맨시티가 분위기를 확실히 가져가는 느낌이네요.”
무시무시한 활동량과 거침없이 몸을 던져서라도 막아내는 투지, 가지고 있는 기량 이상을 발휘하는 정신력.
첼시가 전반전을 그나마 잘 버텼던 이유들이었다.
하지만 맨체스터 시티도 같은 무기들을 들고나오자, 첼시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케이힐, 가까스로 걷어냅니다! 미켈, 가슴으로 트래핑하지만, 라키티치의 강력한 압박에 뒤로 패스!”
기량과 피지컬, 체력까지 앞서는 맨체스터 시티가 마음먹고 압박을 가하자 첼시 선수들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주전 선수들의 이탈로 대신 출전하게 된 백업 선수들이 빈틈을 노출했다.
“콜이 가까스로 걷어내는데, 리차즈!!”
미켈의 패스는 콜에게 정확히 연결되지 못하고 뒤쪽으로 향했다.
산체스가 빠르게 달려들자, 콜도 급하게 볼을 처리했다.
콜의 패스는 버트란드 쪽으로 날아갔지만, 버트란드는 뒤에서 달려드는 리차즈를 확인하지 못했고, 리차즈가 머리로 념겨주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 이거 뭐죠!! 아게로! 들어갑니다!! 세르히오 아게로, 선취 골!! 멋진 발리 슈팅으로 드디어 첼시의 골망을 흔듭니다!”
그리고 후반전 13분, 맨체스터 시티는 드디어 간절히 기다리던 선취 골을 만들어냈다.
< 낭만필드 - 32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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