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302 >
프리미어리그의 악명높은 박싱데이 일정도 맨체스터 시티의 질주를 가로막진 못했다.
연말과 연초로 이어진 바쁜 일정 속에서도 맨시티는 무패 행진을 이어나갔고, 참가한 모든 대회에서 승승장구했다.
그리고 1월 8일, 프리미어리그 클럽들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FA컵 3라운드 경기가 치러졌다.
“또 맨유네. 불쌍하니까 이번에는 한 다섯 골만 넣어줄까?”
FA컵 첫 경기부터 맨체스터 더비가 이뤄진 것이었다.
4부 리그에 해당하는 리그 2 소속의 클럽들과 붙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는데, 프리미어리그 클럽끼리 붙은 데다가 결승전에서나 이뤄질 대진이었기에 모두의 시선이 맨체스터 더비로 쏠렸다.
“다섯 골? 에이, 그것도 너무 불쌍하지 않아? 한 세 골만 넣어주자고.”
리차즈와 데 용의 대화처럼 맨시티 선수들은 맨유를 상대로 자신감이 넘쳤다.
지난 맞대결에서 8-0으로 승리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말은 일단 세 골 넣은 다음에 해. 아직 경기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다 이긴 것처럼 하지 말고.”
어느새 나타난 성배가 두 선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오, 깜짝이야. 기척 좀 내고 다녀.”
“그런 건 그라운드 위에서 수비할 때나 하라고. 왜 평소에도 눈에 안 띄게 다니는 거야.”
리차즈와 데 용은 성배의 손이 어깨에 올라올 때까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인지 깜짝 놀라며 심장을 부여잡았다.
“그 정도로 마음이 풀렸다는 거지, 무슨. 평범하게 걸어왔는데 이걸 모르고 놀라? 얼마나 방심했으면 바로 옆에 올 때까지 눈치를 못 채. 정신 좀 차려.”
확실히 지난 시즌 유럽 챔피언인 바르셀로나와의 두 경기를 포함, 30경기에 가까운 많은 경기를 치르면서 무패 행진을 달리다 보니 선수들이 좀 해이해진 감은 있었다.
다행히 성배를 비롯한 주장단과 코칭스태프들이 잘 잡아준 덕분에 아직 큰 문제는 없었지만, 경계할 필요는 있었다.
“우리가 맨유한테 8-0으로 이겼던 과거는 빨리 잊어버려. 오늘은 다른 경기니까. 맨유도 그 날의 맨유가 아니고, 우리도 그 날의 우리가 아니야. 맨유 정도의 클럽이라면 언제든지 우리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고. 그런데 이렇게 방심하고 있어서 되겠어?”
챔피언스리그를 최우선 순위로 두고 차순위는 리그, FA컵은 그다음이었다.
가용 가능한 100%의 전력으로 나선 맨유에 비해 맨시티는 골키퍼 판틸리몬과 데 용, 밀너를 투입하며 백업 선수 몇 명을 섞은 상태였다.
벤치 명단에도 유망주들을 대거 포함시킨 맨시티였기에 주전 선수들이 더욱 잘해주어야 했다.
“방심이라니. 자신이 있을 뿐이라고. 주, 선수한테 자신감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너도 잘 알지?”
말이나 못 하면.
씨익 웃으며 말하는 리차즈와 고개를 끄덕이는 데 용의 모습에 성배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쓰게 웃었다.
혹시나 모를 상황에 대비해 자신이 정신을 차리는 수밖에 없었다.
***
맨유의 최근 기세도 나쁜 것은 아니었다.
분위기를 따지자면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17승 3무의 맨시티가 말도 안 되는 성적을 올리고 있을 뿐, 맨유 역시 14승 3무 3패의 훌륭한 성적으로 리그 2위를 달렸다.
그런 맨유였으니 맨시티를 잡아낸다고 해도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밀너의 패스가 끊깁니다! 캐릭, 위로 올라가면서 나니에게 찔러주고, 콤파니의 태클! 적절히 끊어줍니다!”
전반 초반, 양 팀은 팽팽한 경기를 펼쳤다.
점유율도, 분위기도 5:5였고, 어느 한쪽으로 균형이 무너지지 않았다.
캐릭은 역습 상황에서 비어있는 공간을 향해 파고 들어가는 나니의 앞으로 패스를 찔러주었다.
하지만 나니에게 연결되기 전에 콤파니가 먼저 태클로 볼을 걷어냈다.
“나니, 바로 콤파니에게 따라붙습니다! 아, 그런데 휘슬 울렸습니다.”
나니가 볼을 소유한 상황도 아니었고, 콤파니의 태클로 신체 접촉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주심은 휘슬을 불어 맨시티의 파울을 선언했다.
“퇴장!! 퇴장입니다!! 크리스 포이 주심, 콤파니에게 퇴장을 선언합니다!”
맨유 선수들과 원정 서포터들을 제외한 사람들은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화들짝 놀랐다.
누가 볼을 소유하지 못한 경합 상황이었고, 접촉도 없었다.
물론, 콤파니의 태클이 양발 태클처럼 들어간 감은 없지 않아 있었지만, 너무 가까이 붙어서 태클하느라 그런 것일 뿐, 나니보다 뒤에 놓였던 왼발은 나니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엄격한 판정인데요? 개인적으로는 경고 정도를 예상했습니다만, 퇴장까지 나오네요.”
콤파니의 태클은 정확하게 볼만 건드렸다.
양발 태클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양 발바닥이 완전히 땅에 붙은 낮은 태클이었고, 볼만 건드리면서 나니와의 접촉도 전혀 없었다.
태클을 당한 나니는 넘어지지도 않았고, 그대로 몸을 돌려 콤파니에게 따라붙었다.
심지어 휘슬이 울렸을 때는 자신의 파울이 선언된 줄 알고 주심에게 항의하려 했을 정도였다.
“정확한 판정입니다. 저 친구 양발 태클, 완전 위험했습니다.”
“와, 루이스. 큰일 날 뻔했네. 어디 다친 데는 없어?”
맨유 선수들은 포이 주심의 옆으로 바짝 붙어 퇴장 판정이 옳았다고 주장했다.
가장 먼저 어필했던 루니는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퇴장입니까! 볼만 건드리지 않았습니까!”
“아니, 이게 말이 돼? 도대체 뭘 본 거야! 볼만 건드렸고, 저 친구랑은 닿지도 않았는데!”
반대로 맨체스터 시티 선수들은 포이 주심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퇴장 판정이었다.
경고가 나왔어도 불만이 있었을 텐데, 퇴장이 나왔으니 당연히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거 잘못하면 경고 몇 명 받겠는데.’
반대편 측면에 있었기에 조금 늦게 도착한 성배는 동료들이 지나치게 흥분해있음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퇴장으로 인한 수적 열세에 선수단의 어수선한 분위기까지 더해지면서 우르르 무너질 수 있었다.
“다 비켜!”
생각을 마친 성배는 동료 선수들을 거칠게 떼어내면서 포이 주심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성배의 표정과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는지, 당당한 표정으로 서 있던 포이 주심도 움찔하는 모습이었다.
“이게 뭐하자는 겁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판정이 어디 있습니까! 경고까지는 좀 엄하지만, 나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솔직히 퇴장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성배는 평소와 다른 거친 말투와 몸짓으로 항의를 시작했다.
평소였다면 단호한 말투와 논리정연한 어조로 조용히 항의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조금 더 말이 심해지면 자네에게도 카드가 나갈 수 있어.”
포이 주심은 주심의 권위를 앞세워 성배의 항의를 멈추려 했다.
하지만 성배는 멈추지 않았다.
“말이 심합니까? 이게? 당신의 판정이 훨씬 더 심합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판정이 어디 있습니까? 볼만 건드렸고, 신체 접촉은 아예 없었고, 양쪽 발이 다 뻗어지긴 했지만, 왼발은 나니보다 뒤에 있었습니다! 당사자인 나니도 플레이를 재개했는데, 퇴장이라니, 이런 판정이 어디 있습니까!”
성배의 항의가 점점 격해지자, 당황한 동료들은 성배의 몸을 붙잡으며 말리기 시작했다.
조금 전, 흥분해서 주심에게 달려들던 모습은 없었다.
“아, 주에게도 경고가 주어집니다. 어필이 과했다는 것 같습니다.”
결국, 성배도 경고를 받아들었다.
충분히 경고가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성배의 어조는 지나치게 날카로웠고, 단어 선택 또한 공격적이었다.
“주, 진정해. 너무 흥분하... 응?”
경고를 받아든 뒤, 오른손을 하늘로 털어내면서 어이가 없음을 표시한 성배는 뒤돌아 자리로 돌아갔다.
성배가 흥분했다고 생각한 보아텡이 달려와 진정시키려 하다가 표정을 보고 말을 멈췄다.
“뭐야? 화난 거 아니었어?”
성배는 살짝 미소 짓고 있었다.
“이리 와, 자식아.”
당황한 보아텡을 끌고 수비진영으로 향한 성배는 동료 선수들을 모았다.
이제는 세 명이 된 수비수들과 밀너, 데 용, 판틸리몬까지.
수비를 담당하는 선수들을 모두 모은 것이었다.
“어때. 이제 진정했어?”
성배가 평소와 다르게 지나치게 흥분한 모습으로 항의한 것은 동료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동료들까지 우르르 무너지겠다는 생각에 총대를 멘 것이었다.
“와, 연기 잘하네. 식겁했잖아.”
“어쩐지 평소랑 너무 다르다, 했어.”
밀너와 리차즈는 갑자기 확 바뀐 성배의 분위기에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항의하고 분노하는 건 내 역할이야. 내가 이걸 괜히 차고 있는 줄 알아?”
성배가 자신의 왼쪽 어깨에 메인 주장 완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주장의 역할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필요한 순간, 동료들을 대신해 주심에게 항의하고 그것도 적절히 이용할 줄 알아야 좋은 주장이라 할 수 있었다.
“자, 됐지? 이제 어느 정도 가라앉았지?”
그리고 성배의 그런 행동 덕분에 동료들의 분노는 가라앉았다.
나중에는 성배가 화를 참지 못해 같이 퇴장당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느라 분노할 정신도 없었다.
“항의는 내가 했고, 화도 내가 냈으니까, 남은 시간 동안 집중해서 뛰어. 10 대 11? 그까짓 것. 작은 핸디캡일 뿐이지.”
콤파니가 수비라인에서 맡은 역할은 작지 않았다.
측면에 위치하기 때문에 수비진을 조율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성배를 대신해 수비 조율을 맡아주었고, 성배가 수비라인이 아닌 팀 전체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짐을 덜어주었다.
그리고 본인 기량 자체도 프리미어리그 탑클래스였다.
그런 콤파니의 이탈로 성배 역시 불안함을 느꼈지만, 겉으로는 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수 한 명 부족한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미소 지을 뿐이었다.
‘꼬이는군. 첼시의 마음을 알겠어.’
포이 주심은 유명한 주심이었다.
원래도 유명했지만, 이번 시즌에는 그야말로 가장 핫한 심판이 되었다.
8-0 스코어가 나온 지난 9라운드에는 이변이 일어났던 첼시와 QPR의 경기에서 말도 안 되는 판정들로 첼시를 이변의 희생양으로 만들어버렸다.
오늘과 마찬가지로 심해야 경고였던 플레이 두 개를 퇴장 선언하며 첼시를 아홉 명이 뛰도록 만들었고, 퇴장당한 두 선수와 골키퍼를 뺀 모든 첼시 선수에게 경고를 주었다.
스토크 시티와 토트넘전에서는 스토크의 핸들링 파울 두 개를 모두 봐주었고, 그 두 개 모두 골로 연결되었다.
그 외에도 수십 가지 오심들로 두 강팀에게 이변을 선물해주었다.
‘이번엔 우리 차례인가.’
사실, 포이 주심이 오늘 경기의 주심으로 배정되었을 때, 성배는 그때부터 불안함을 느꼈다.
크리스 포이가 맨유 경기의 주심을 맡은 17경기에서 맨유는 무패행진을 달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터무니없는 퇴장 선언으로 이 기록은 18경기 연속 무패로 늘어날 확률이 높아졌다.
***
“보아텡, 헤딩 클리어! 밀너, 바로 전방으로!! 아게로!”
수적인 열세에 빠진 맨시티는 어쩔 수 없이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수비에 집중하며 간혹 날카로운 역습을 보여주었고, 지금도 좋은 기회를 만들어냈다.
“아게로, 빠르게 전진합니다! 아, 긱스! 위험한 태클!”
아게로의 앞에는 맨유 포백라인밖에 없었다.
중앙 미드필더로 출전한 긱스와 캐릭, 두 선수가 양옆에서 따라붙었지만, 노쇠한 두 선수가 아게로의 스피드를 따라잡기엔 무리였다.
긱스가 몸을 붙여오자, 아게로는 볼을 몸으로 가리며 움직였고, 긱스는 급했는지 백태클을 시도했다.
“주심, 카드! 카드!”
맨시티 선수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포이 주심에게 카드를 요구했다.
백태클이 들어간 데다가, 아게로가 몸으로 가로막으며 태클을 피하자, 긱스는 다리를 ㄱ자로 꺾어 아게로의 종아리를 감아버렸다.
일이 잘못되었다면, 다리가 부러질 수도 있는 끔찍한 태클이었다.
“아, 카드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포이 주심, 프리킥으로 경기를 진행시킵니다.”
하지만 카드는 없었다.
맨시티 선수들이 흥분해서 포이 주심에게 달려들 무렵.
“그만. 주심이 아니라면 아닌 거야. 억울하고 더러워도 참아.”
성배는 동료들을 진정시켰다.
본인도 분노했지만, 억지로 그 분노를 삭이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것을 참고 자신들을 저지하는 성배의 목소리에 맨시티 선수들도 분노를 참아냈다.
‘이 경기, 무조건 이긴다.’
솔직히 성배는 이 경기에 큰 미련이 없었다.
FA컵보다 중요한 대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성배는 오늘 경기의 승리를 다짐했다.
< 낭만필드 - 30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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