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298화 (199/356)

< 낭만필드 - 298 >

‘이 정도로 압도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성배는 심심했다.

맨유에게 절대 지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은 있었지만, 그래도 퍼거슨 감독과 맨유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경각심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맨유는 무기력했다.

“맨유, 통 앞으로 나오질 못하고 있습니다. 플레처, 패스할 곳을 찾지만, 압박에 밀려 다시 뒤로 돌립니다.”

플레처와 안데르손의 역할은 중요했다.

수비진과 공격진을 이어주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플레처는 궂은일을 도맡아 해주는 마당쇠 역할에 가까운 선수였고, 공격형 미드필더 출신으로 유럽 골든보이 상을 받았던 안데르손은 중원 장악력과 게임 조율 능력을 맞바꿔 어정쩡한 선수가 되고 말았다.

“에반스, 안데르손에게 주려던 볼이 실바에게 끊깁니다! 실바, 반대편으로 크게 열어주고, 밀너, 슈팅!! 데 헤아, 가까스로 막아냅니다!”

피지컬과 활동량을 기반으로 한 맨시티 선수들의 압박에 맨유는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맨유 중원의 핵심이자 공격 전개의 시발점, 레지스타 마이클 캐릭이 감기 증세로 출전하지 못한 것이 뼈아팠다.

컨트롤 타워를 잃은 맨유는 매번 전방 진출에 실패, 자잘한 패스미스를 연발하며 맨시티에게 주도권을 내주고 있었다.

“맨체스터 시티의 코너킥은 위력이 굉장하거든요? 역시 맨시티 세트피스의 핵심, 주가 코너킥을 처리하기 위해 올라오네요.”

여덟 경기에서 맨시티가 넣은 코너킥 득점은 무려 3득점.

프리킥 상황에서의 득점까지 더하면 4득점이었다.

한 시즌 코너킥 득점이 10골 근처면 유럽 전체에서도 최상위권이었다.

8경기 3득점, 세트피스 4득점은 굉장한 기록이었다.

“주의 정확한 킥과 제코를 비롯한 제공권 괴물들이 더해지니 그야말로 어마어마하죠. 맨유의 제공권이 나쁜 편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역부족일 수밖에 없어요.”

부상 끝에 복귀한 네마냐 비디치는 지난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 형편없는 경기력을 보여주며 아직 휴식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드러냈다.

라이트백은 항상 맨유의 고민거리였다.

공들여 키우는 수비 유망주, 조니 에반스와 크리스 스몰링을 센터백, 라이트백으로 출전시켰지만, 맨시티의 선수들을 막기엔 무리가 있었다.

‘어느 쪽을 노려볼까.’

지난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 비디치와 교체되어 훌륭한 활약을 펼쳐주면서 주전 센터백 자리를 따낸 에반스.

하지만 에반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선취 골도 에반스의 보이지 않는 실수 덕분에 얻어냈다.

‘아무리 그래도... 네가 비디치를 대신할 수 있을까.’

에반스는 보아텡과 동갑이지만, 비교하면 보아텡이 격하게 화낼 것이었다.

보아텡은 벌써 몇 시즌 째 빅리그 주전으로 활약 중인 선수이고, 에반스는 맨유 소속이라 손해 본 감은 있어도 한 번도 수비의 핵심이었던 적이 없었다.

수비수에게 경험이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산이었다.

“주, 코너킥 올라오고, 콤파니? 제코!!”

성배의 신호에 따라 맨시티 선수들은 바삐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콤파니와 제코가 에반스를 가운데 두고 앞뒤에서 떠올랐고, 에반스는 두 선수 중 누구를 막아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하고 타이밍을 놓쳤다.

그리고 제코의 강력한 헤더가 맨유의 골망을 갈랐다.

“아, 제코를 너무 자유롭게 놔주고 말았어요! 제코도 이걸로 시즌 8호 골! 맨시티의 투톱, 정말 엄청난 공격력이에요! 소름이 다 끼쳐요!!”

아게로와 제코가 나란히 골을 기록하면서 8골로 득점 공동 선두에 올랐다.

터져주어야 하는 선수들이 전부 다 터진 맨시티였기에 강력하기 싫어도 강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데 헤아와 에반스, 아쉬운 모습을 보여줬어요. 에반스는 콤파니와 제코 사이에서 결정을 못 하는 어리버리한, 아마추어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데 헤아는 여전히 공중볼 처리에 약점을 보였죠? 뛰쳐나올 거면 나오고, 자리를 지키려면 지켰어야 했는데, 이도 저도 아니었어요.”

맨유의 미래를 책임져주어야 할 두 명의 핵심 선수가 나란히 아마추어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전반 36분, 올드 트래포드에서 두 골을 실점한 맨유에게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

“후반 시작과 동시에 나니가 정말 오랜만에 볼을 잡습니다. 돌파를 시도하려는 것 같습니다.”

“나니가 뭔가 해줘야죠. 지금 맨유는 아무것도 제대로 이뤄지는 게 없어요. 이래저래 말은 많아도 나니의 개인전술은 맨유의 위협적인 공격수단 중 하나예요.”

플레처는 원래 공격 전개에 재능이 없던 선수였고, 안데르손은 기복이 심했는데, 오늘은 안 풀리는 날이었다.

에반스가 콤파니나 성배처럼 후방에서 볼배급을 해줄 수 있는 선수였지만,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결국, 루니가 중원으로 내려와 볼 배급을 담당했고, 거의 원톱처럼 되어버린 웰벡은 아직 역부족.

윙어인 영과 나니의 활약이 굉장히 중요한 상황이었다.

‘호날두도 이제 일대일 돌파는 피하는데...’

루이스 나니는 분명 잠재력이 있는 선수였다.

하지만 한 달 뒤면 스물여섯 살.

이제는 잠재력이 아닌 기량으로 증명해야 했고, 아직은 뭔가 아쉬운 감이 있었다.

“돌파 시도! 주, 따라가면서 어깨부터 집어넣습니다!”

중앙으로 파고드는 드리블 후 슈팅에 의존하던 나니는 2년 전 정도부터 ‘측면 돌파 후 크로스’라는 윙어들의 전가의 보도를 습득, 꽤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놈의 기복이 해결되지 않았고, 뛰어난 수비수를 만나 초반에 막히기 시작하면, 혹은 팀의 경기력이 좋지 않으면 바로 버로우를 타버렸다.

“먼저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대로 볼 따내면서 콤파니에게! 주, 간단하게 빼앗았습니다.”

맨유의 경기력 자체가 바닥을 기었기 때문에 나니가 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았다.

루니는 저 밑으로 내려가서 이제 올라오는 중이었고, 웰벡은 맨시티 수비수들을 상대로 완전히 묶여 있었다.

나니가 할 수 있는 것은 개인 돌파가 유일했고, 성배는 중앙 돌파냐, 측면 돌파냐, 그것만 파악해 수비하면 그만이었다.

“콤파니는 보아텡에게 다시 넘기고, 보아텡! 왼쪽으로!”

나니에게 볼을 빼앗은 성배는 바로 정면으로 뛰쳐나갔다.

깊숙이 파고들던 나니가 볼을 빼앗기고 쓰러진 뒤 아직 복귀하지 못했고, 중원을 완전히 장악당한 중앙 미드필더들은 성배를 마크하러 내려올 수 없었다.

‘스몰링이야 애송이지.’

고작 두 살 차이지만, 아직 유망주라는 꼬리표를 떼어내지 못한 스몰링은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풀백이자 벨기에와 맨시티의 캡틴인 성배와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지금은 끊임없이 몰아칠 때라 판단한 성배는 빠르게 라인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보아텡의 패스가 주에게! 주, 빠르게 위쪽으로 올라갑니다!”

성배가 위로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실바는 중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번 시즌 초반, 연일 상대의 골문을 폭격하는 아게로, 제코, 산체스가 스포트라이트를 가져갔지만, 성배와 실바의 왼쪽 측면은 이들을 묵묵히 지원하며 전문가들의 극찬을 받았다.

“주, 실바에게! 한 명, 두 명 제치는 화려한 드리블!”

성배의 든든한 수비는 실바가 하프라인 아래로 내려오지 않을 수 있도록 뒤를 받쳐주었고, 실바 역시 활동폭을 좁힌 대신 활동량을 늘려 상대 진영에서는 훌륭한 수비가담 능력과 공격력을 보여주었다.

나니를 꽁꽁 묶은 데에는 실바의 역할도 결정적이었다.

“아! 절묘한 패스가 아게로! 일대일, 아!! 에반스, 잡아끌었습니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실바의 가장 큰 무기는 항상 반짝이며 빛나는 창조적인 플레이였다.

수비수 두세 명 정도는 간단히 제치는 간결하지만 화려한 드리블에 허를 찌르는 예술적인 패스.

실바의 가장 큰 가치는 여기에 있었다.

“휘슬 울립니다! 아, 에반스. 볼을 강하게 걷어차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실바, 오른쪽 측면을 보면서 노룩 패스로 아게로에게 연결해주었어요. 아게로 역시 수비 라인을 완벽히 무너뜨리면서 침투했고, 그대로 두었으면 일대일 찬스였어요. 이거 잘못하면 레드 카드가 나올...”

실바의 환상적인 패스와 아게로의 절묘한 침투가 빛을 발한 장면이었다.

그대로 두었다면 100% 일대일 찬스로 이어지는 상황.

아게로를 놓친 에반스가 급한 나머지 팔로 아게로를 잡아챘고, 휘슬이 울린 이후 볼을 신경질적으로 걷어차며 매를 벌었다.

“수도 있다고 말씀드리려 했는데, 나왔네요, 레드 카드가. 에반스, 퇴장이죠?”

“그리고 페널티킥 주어집니다.”

에반스의 퇴장으로 안 그래도 불리한 상황에서 수적인 열세까지 떠안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심지어 0-2로 뒤지고 있는 와중에 페널티킥까지 허용하며 암운이 드리워졌다.

***

에반스의 퇴장 이후, 퍼거슨 감독은 왼쪽 측면에서 활약하던 영을 라이트백으로 옮기고 라이트백 스몰링을 중앙으로 이동시켰다.

아게로가 페널티킥을 득점으로 연결하며 3-0이 되었지만, 공격 자원을 빼고 포백 라인을 정비한 것이었다.

이미 승리를 포기하고 어떻게든 버텨보겠다는 의중이 담긴 움직임으로, 맨시티의 기세에 한 수 접은 것이었다.

“플레처의 전진 패스가 또 한 번 막힙니다. 투레, 특유의 무거운 드리블로 전진합니다!”

하지만 맨시티는 공격의 고삐를 늦출 생각이 없었다.

맨유에게서 왕좌를 빼앗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리고 지난 수십 년의 울분을 토해낼 기회이기도 했다.

“왼쪽으로 몰고 들어가는 투레, 주에게 내줍니다. 주, 논스톱으로 실바에게!”

투레는 성배에게 볼을 내주었고, 성배는 왼발 아웃사이드로 방향만 바꿔서 실바에게 연결해주었다.

안데르손을 떨쳐내고 침투한 실바는 페널티박스에 진입, 상대 수비수들을 끌어들였다.

‘조짐이 좋다.’

그리고 성배는 실바의 뒤를 따라 페널티박스 안으로 진입했다.

실바의 위치와 움직임, 맨유 수비진의 위치, 페널티박스 안의 공간과 공격수들의 움직임을 볼 때, 이건 9할 이상 득점으로 연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케이.’

골라인 방향으로 침투하는 실바를 보면서 중앙으로 횡적인 움직임을 가져가던 성배는 실바가 몸을 돌려 나오자, 다시 골라인 쪽으로 움직였다.

그러던 중, 실바와 눈이 마주쳤다.

‘100% 준다.’

눈이 마주친 순간, 두 선수는 다음 플레이에 대해 같은 그림을 그렸다.

물론, 실바의 머릿속을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힐패스로 연결! 주에게!”

성배의 생각대로 실바는 이번에도 노룩 패스, 그것도 노룩 힐패스로 성배에게 완벽한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앞은 텅 비었고, 한 번의 패스로 맨유 수비진은 완벽히 무너졌다.

완벽한 킥 능력을 보유한 성배에게 이런 기회가 왔다는 것은 이미 골과 다름없었다.

“중앙으로! 아게로!! 아게로가 가볍게 발을 가져다 대면서 해트트릭 달성! 아게로의 해트트릭! 주성배, 어시스트 두 개! 그리고 맨시티, 네 골을 폭발시키면서 4-0으로 앞서나갑니다!”

성배는 낮고 빠르게 크로스를 내주었고, 아게로는 스몰링을 간단히 떨쳐내고 성배의 크로스에 발을 갖다 대었다.

실바와 성배가 왼쪽을 초토화시키는 사이, 이들을 막기 위해 왼쪽으로 이동해있던 데 헤아는 반대편에서 발을 가져다 댄 아게로의 슈팅에 반응도 할 수 없었다.

“4-0입니다, 4-0!! 올드 트래포드에서, 맨유가 아닌 원정팀이 먼저 네 골을 기록했습니다!”

기록적인 스코어였다.

하지만 아직도 경기는 30분이나 남아 있었다.

< 낭만필드 - 298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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