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290화 (191/356)

< 낭만필드 - 290 >

“돌겠군, 진짜로.”

나란히 앉아 한숨만 푹푹 쉬던 네 명의 선수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의외로 평소 과묵한 성격의 실바였다.

그 정도로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러게요. 아무리 죽음의 조라고 해도 인간미는 있어야지, 이게 도대체 뭐하자는 건지...”

UEFA 리그 랭킹 1위 프리미어리그, 2위 라 리가, 3위 분데스리가, 4위 세리에A, 5위 리그앙.

여기서 4위 세리에A의 우승팀인 AC 밀란을 제외한 나머지 네 개의 팀이 한 조에 묶였다.

아무리 시즌마다 한 개 정도는 죽음의 조가 나온다고 해도 너무 심했다.

“허, 참. 말도 잘 안 나오네.”

평소 달변을 자랑하던 성배 역시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바르셀로나는 지난 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팀으로 디펜딩 챔피언이었으며, 현재 세계 최강에 가장 가깝다고 평가받는 클럽이었다.

릴은 아자르, 제르비뉴, 무사 소우 등을 앞세워 57년 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두 번째 전성기를 열었지만, 이 조에서는 최약체를 벗어날 수 없었다.

도르트문트는 지난 시즌, 무려 바이에른 뮌헨을 밀어내고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한 클럽으로, 이번 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 최고의 다크호스가 될 거라 평가되는 클럽이었다.

“음...”

콤파니는 신음성만 내뱉을 뿐이었다.

서로 절친한 네 명의 선수가 한곳에 모여있었지만, 대화는 없었다.

그 정도로 충격적인 조 편성 결과였다.

***

“아게로의 멋진 돌파! 환상적인 돌파, 그리고 이어지는 패스! 제코!! 들어갑니다! 이번 시즌의 제코는 완전히 미쳤습니다! 벌써 여섯 경기 연속 골에 리그 세 경기 만에 5호 골입니다!”

챔피언스리그 조 편성 이후 첫 경기인 리그 3라운드.

만만치 않은 클럽인 토트넘 핫스퍼, 그것도 토트넘의 홈구장인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맨체스터 시티는 토트넘을 그야말로 압살하고 있었다.

“적응은 끝났다는 건가요? 분데스리가를 정복했던 그 시절의 모습이 나오네요.”

제코는 FA컵 우승을 자신의 힘으로 결정지었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골을 기점으로 완벽하게 자신의 폼을 되찾았다.

‘에딘은 완전히 살아났어. 아니, 분데스리가 때보다도 더 강해졌어.’

분데스리가 시절 보여주었던 경기력을 완전히 회복한 데다가 프리미어리그에 적응하기 위해 피지컬까지 보강한 제코였다.

제공권은 그야말로 세계 최고 수준이었고, 위치 선정과 슈팅 능력, 연계 능력 등도 훌륭했다.

“후반전 10분도 안 된 시간에 해트트릭을 완성한 제코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긴 하지만, 맨시티의 공격력이 정말 대단합니다. 산체스가 두 개, 아게로가 한 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고, 공격 포인트는 없어도 실바와 투레의 움직임 역시 뛰어납니다.”

야심차게 영입한 에이스급 선수들은 만치니 감독과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선수 한 명 한 명이 어떤 클럽에서든 에이스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선수들이었다.

이번 여름의 최대어, 아게로와 산체스는 거액의 이적료와 주급을 받으며 맨시티에 합류했고, 지금까지는 거액의 이적료가 아깝지 않은, 오히려 부족해 보이는 활약을 펼쳐주었다.

“생태계를 파괴하는 수준인데요? 프리미어리그의 비공식적인 최강자로 꼽히던 맨유에게 3-0의 승리를 거두었고, 챔피언스리그 티켓을 호시탐탐 노리는 강호, 토트넘마저도 55분 만에 3-0으로 무너뜨렸어요. 맨시티를 누가 막나요?”

아직은 시즌 초반에 불과하지만, 그야말로 프리미어리그를 파괴하는 수준이었다.

분데스리가의 패왕이라 불리는 바이에른 뮌헨도 챔피언스리그를 노릴만한 전력의 다른 클럽들을 상대로 이 정도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다.

리그를 완벽히 제압한 라 리가의 두 거목,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가 생각날 정도의 기세였다.

“얼마 전, 챔피언스리그 조 편성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맨시티는 이번 챔피언스리그에서 역대 최고의 죽음의 조라 불리는 H조에 속하게 되었는데, 그 화풀이를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지난 시즌 챔피언스리그 4강 진출팀인 맨체스터 시티가 조별 리그에서 탈락할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일반적으로 H조에서는 바르셀로나와 맨체스터 시티가 16강에 진출할 거라 예상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하지만 분데스리가 우승팀, 도르트문트는 물론이고 LOSC 릴의 전력도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고, 이 정도 수준의 클럽들은 언제든 이변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하하, 그럴 수도 있겠네요. 맨시티는 이번 시즌에야말로 챔피언스리그 제패를 노리고 있을 텐데 첫 스텝부터 꼬여버렸거든요?”

확실히 챔피언스리그 조가 발표된 이후, 맨체스터 시티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시즌까지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지난 시즌까지는 팀 분위기가 나빠지면 경기력에 분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 시즌에는 그 분노를 경기력으로 전환해 상대방에게 풀어버렸다.

“맨시티 선수단이 완벽하게 정리된 느낌이죠? 분위기가 가라앉을 수 있는 상황인데, 오히려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이게 지난 시즌과는 다른 모습이에요.”

성배와 대립각을 세웠고, 팀 분위기를 흐리는 주범이었던 카를로스 테베즈는 결국 이번 여름에 이적하지 못했다.

밀담이 오간 듯 AC 밀란이 아니면 이적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테베즈에게 AC 밀란의 갈리아니 구단주가 터무니없이 적은 이적료를 제안했지만, 만수르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만족할만한 금액이 아니면 이적을 허가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테베즈는 리저브에 처박혔고, 다시 아르헨티나로 출국해 돌아오지 않았다.

“주를 중심으로 하나로 뭉쳐져 있다는 게 느껴집니다. 어린 나이에 화려한 스타군단 맨시티를 이 정도로 장악했다는 게 놀랍습니다.”

테베즈의 이탈은 팀 분위기를 다잡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성배의 장악력이 더 강해졌다는 것은 또 하나의, 그리고 핵심적인 이유였다.

콤파니, 보아텡, 사발레타, 실바, 배리, 야야 투레, 라키티치, 제코.

“주는 벨기에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루카쿠는 당연히 주의 편이겠죠. 그리고 산체스 역시 입단 인터뷰에서 주를 향한 일편단심의 마음을 고백했으니 마찬가지고요. 주가 완벽하게 팀을 장악한 것이 분명하죠.”

여기에 새롭게 합류한 루카쿠와 산체스.

확실하게 성배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선수만 헤아려도 두 자릿수였다.

여기에 성배를 호의적으로 생각하며 지지를 보내주는 선수까지 더하면 1군 선수단의 절반을 훌쩍 넘어갔고, 이들은 대부분 팀의 핵심이자 최소한 로테이션급 이상의 선수들이었다.

당연히 성배의 팀 장악력은 지난 시즌과도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강해졌다.

“말씀드리는 순간! 산체스가 침투 패스, 아게로!! 골! 골입니다! 순식간에 또 한 번의 골이 터졌습니다. 이번에는 세르히오 아게로! 아게로 역시 리그 세 경기 연속 골에 리그 4호 골입니다!”

산체스의 어시스트 해트트릭과 아게로의 세 경기 연속 골이 터지며 스코어는 4-0이 되었다.

맨체스터 시티의 경기력은 하늘을 뚫고 있었다.

“토트넘은 UEFA를 원망할 것 같네요. 괜히 맨시티한테 죽음의 조를 만들어줘서 애먼 토트넘만 영혼까지 탈탈 털리고 있어요.”

홈에서 4-0.

게다가 맨체스터 시티의 분노가 여기서 끝날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아무 죄도 없는 토트넘만 신나게 박살나고 있었다.

***

토트넘과의 경기에서 6-0의 대승을 거둔 성배와 콤파니, 루카쿠는 기분 좋게 잉글랜드를 떠났다.

유로 2012 예선 2연전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르메니아와의 원정 경기가 먼저, 그리고 다음이 러시아와의 홈경기였다.

“만약 내일도 아르메니아전처럼 형편없는 경기력을 보여준다, 그러면 진짜 각오들 해라. 내가 가만히 있어도 팬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좋았던 기분은 아르메니아와의 원정 경기가 끝나자마자 바로 사라졌다.

꼭 잡아야 하는 아르메니아를 상대로 무승부에 그친 것이었다.

아르메니아와의 무승부는 작지 않은 타격이었다.

“후우. 다들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한 번 더 말한다. 이번에 유로컵 진출 못 하면? 다시 2년 전으로 돌아가는 거야. 매번 예선을 치를 때마다 “이번에는 제발 믿어주세요.” 하는 것도 쪽팔리지 않아?”

유로 2012 예선 B조, 1위는 5승 2무를 기록하고 있는 러시아였다.

아르샤빈과 지르코프, 파블류첸코, 자고예프 등을 앞세워 무패 행진을 달리고 있었다.

2위는 4승 2무 1패의 벨기에.

그리고 3위는 4승 1무 2패의 아일랜드가 차지하고 있었다.

승점 17점의 러시아가 앞서나가는 형국이었고, 14점과 13점을 따낸 벨기에, 아일랜드가 그 뒤를 쫓았다.

“결론은 러시아만 잡으면 된다는 거잖아? 우리한텐 아직 기회가 있다고. 러시아만 잡으면 우리가 단숨에 1위로 올라갈 수 있어.”

콤파니의 말처럼 러시아만 잡을 수 있다면 벨기에에게 급격히 유리해지는 상황이었다.

3점이라는 승점 차이가 작지는 않았지만, 맞대결에서 승리하기만 하면 단숨에 그 차이를 0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와의 상대 전적에서 앞서면서 경쟁자인 두 팀 모두에게 상대 전적의 우위를 가져갈 수도 있었다.

승점이 같아지면 벨기에가 더 높은 순위를 차지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러시아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잡아야 해. 아르메니아와 비긴 게 아쉽긴 하지만, 러시아만 이기면 바로 만회할 수 있어.”

러시아전 이후로는 전패의 안도라와 안도라에게만 승점을 따낸 마케도니아가 벨기에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은 일정은 벨기에가 가장 좋은 상태였다.

그리고 벨기에에게 웃어주는 가장 큰 요소는 러시아와 아일랜드의 맞대결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맞대결의 승자가 가려진다면 패자는 경쟁에서 탈락할 확률이 높았고, 승자가 가려지지 않는다면 치열해지긴 하겠지만, 벨기에가 1위를 차지할 확률이 굉장히 높아졌다.

“무엇보다, 딕한테 한 방 먹여줘야 하지 않겠어? 그 꼬라지를 해놓고 냅다 튀어버렸는데?”

러시아에게 질 수 없는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딕 아드보카트.

벨기에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음에도 AZ의 감독을 병행하며 열정 없이 시간만 죽이다가 냅다 떠난 아드보카트에게 복수를 해줘야 했다.

***

러시아가 만만한 팀은 아니었다.

프리미어리그의 명문 클럽인 아스날과 첼시에서 활약하는 양쪽 윙어, 안드레이 아르샤빈과 유리 지르코프는 분명 좋은 선수였다.

하지만 아킨페프와 자고예프가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했고, 탄탄한 공격진에 비해 수비진이 아쉽긴 했다.

“장기 부상에서 돌아온 지르코프, 자신 있게 드리블 돌파 시도합니다.”

파블류첸코마저도 슈투트가르트에서의 부진으로 제외된 상황에서 지르코프와 아르샤빈의 역할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도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닐 텐데.’

말루다의 갑작스러운 각성과 본인의 장기 부상으로 커리어가 꼬인 지르코프였다.

당연히 첼시의 주전 레프트윙이 될 거라 기대받았던 선수인 만큼, 기본적으로 뛰어난 기량을 갖추고 있었지만, 큰 무대를 경험해야 할 전성기에 1년이 넘는 시간을 날려버린 건 꽤 큰 타격이었다.

“역시 주성배! 가볍게 막아냅니다! 지르코프, 너무 가볍게 막혀서 그런지 얼떨떨한 표정을 짓습니다.”

지르코프의 돌파는 생각보다 너무 쉽게 막혀버렸다.

러시아의 계산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 낭만필드 - 290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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