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282 >
“후우...”
프리미어리그 우승 메달과 FA컵 우승 메달, 그리고 PFA 선정 베스트 일레븐에 올해의 선수 트로피까지.
이번 시즌에만 무려 네 개의 트로피가 성배의 진열장에 들어왔다.
처음 안더레흐트 시절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고 마련한 진열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성배도 자신이 이렇게 성공적인 커리어를 이어나갈 거라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내 손에 이게 들어오다니. 참...”
처음 성배가 생각했던 자신의 한계는 프리미어리그 상위권 클럽의 주전, 혹은 우승권 클럽의 백업 정도였다.
그래서 프리미어리그 우승은 어느 정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 PFA 선정 프리미어리그 최우수 선수 트로피는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프리미어리그에서 제일 빛났다는 건데...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최우수 선수라니.
포지션도 포지션이지만, 포지션을 떠나 애초에 이런 것은 자신과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이런 위치까지 올라왔다는 것에 기분이 묘했다.
“와, 오빠. 이거 꽉 찼네? 하나 더 사야겠다.”
축구와 성배의 커리어 관련 물품들로 정리해놓은 방에 들어온 유빈이는 어느새 꽉 찬 진열장을 보며 놀랐다.
달랑 한 개 있었던 전생에 비해 지금은 벌써 열 개가 훌쩍 넘어갔고, 작은 진열장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꽉 차 있었다.
“그러게. 언제 이렇게 모였을까.”
말도 안 되는 성공을 거두었고, 옆에는 가족들이 있었다.
부모님들에게는 자랑거리가 되었고, 동생인 유빈이에게는 가까운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유빈이는 자신 덕분에 꿈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고, 꿈을 향한 지름길을 달릴 수 있었다.
“나 꽤 성공했다. 그렇지?”
전생에 이루지 못해 한이 되었던 것들은 이미 대부분 이뤄진 상태였다.
가지지 못한 게 없었다.
새로운 사람, 첼시와의 인연도 이어졌다.
물론, 아직 가장 큰 한으로 남은 것 중 하나였던 엘리자베스의 빈자리는 채우지 못했지만, 그것도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 믿었다.
“와, 벌써 만족하는 거야? 그 나이에? 남자가 야망이 있어야지.”
벌써 감성에 빠지려던 성배를 바깥으로 끄집어낸 것은 유빈이의 한 마디였다.
고작 스물네 살에 불과한 오빠가 다 이뤄냈다는 듯 말하는 게 눈꼴이 셨던 건지, 걱정스러웠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어이없다는 듯 쏘아붙인 것이었다.
“하하하, 그렇지? 아직 이루지 못한 것도 많긴 하지.”
그리고 덕분에 성배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유빈이의 말에 헛웃음을 지은 성배였다.
유빈이의 말대로 고작 스물네 살인데 너무 일찍 만족한 것이었다.
아직 선수 생활은 10년 가까이 남았고, 이 어린 나이에 지금 이 정도면 선수가 이룰 수 있는 대부분의 것들을 노려볼 수 있었다.
“가끔 오빤 참 아저씨 같을 때가 있어. 인생 볼장 다 보고 슬슬 은퇴할 때가 된 아저씨.”
유빈이의 눈이 정확했다.
회귀한 지도 벌써 10년 가까이 되면서 많은 부분이 나이에 맞게 변했지만, 아직은 간혹 자신도 모르게 예전의 성격이 나올 때가 있었다.
“그래, 미안. 알았어. 야망을 한 번 가져볼게. 하하.”
어차피 이렇게 된 김에 인생 목표를 새로 설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과 같은 생각으로 살다가는 곧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슬럼프가 올 것 같았다.
이제는 위치가 달라진 만큼, 그에 어울리는 목표도 필요했다.
“뭐 그건 오빠가 알아서 잘하겠지. 지금까지도 혼자 잘해왔는데, 뭐.”
부모님과 유빈이에게 성배의 인식은 이랬다.
뭘 하든 알아서 잘할 거라는 믿음.
그리고 성배는 이번에도 알아서 잘할 것이었다.
“그것보다 나 독립하려고. 나가서 살게 집 좀 구해줘. 집 엄청 비싸더라.”
뜬금없이, 정말 집 앞 슈퍼에서 과자 사 오겠다는 말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을 꺼냈지만, 내용은 심상치 않았다.
갑자기 집에서 독립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응? 독립? 갑자기 무슨 소리야?”
바뀐 자신의 위상과 그에 따른 목표의 상향 조정을 고민하던 성배는 뜬금없는 유빈이의 폭탄 발언에 당황했다.
갑자기 집을 나가겠다니.
낯선 타지에서, 물론 1년 동안 잉글랜드 생활을 하기는 했지만, 아직 익숙하다고는 볼 수 없는 잉글랜드에서 20대 초반의 여자아이가 혼자서 살겠다니.
쉽게 허락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나도 한 번 혼자서 살아보고 싶어서. 이제 성인인데 오빠 집에서 이렇게 편하게 지내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확실히 유빈이가 편하게 살기는 했다.
스무 살까지는 한국에서 부모님과 함께 편하게 살아왔고, 스무 살이 되어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성배의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하게 살고 있었다.
요리는 요리사가, 차는 성배의 재규어 차량, 심지어 전담 의사까지 두고 사는 스무 살의 대학생은 전 세계를 뒤져도 얼마 없었다.
“네가 쉽게 살기는 했지. 성인이 되었으니 뭔가 직접 해보고 싶다는 것도 이해해.”
성인이 된 유빈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하게 해주는 게 맞다고, 성배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미 유빈이는 성인이었고,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해야 하는 것도 맞았다.
다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지? 나도 성인이니까 직접 세금도 내보고, 음식도 해보고, 이것저것 해보고 싶어.”
고등학생 때까지 부모님이 해주는 대로 살았던 아이가 성인이 된 뒤, 그 품에서 벗어나 자신의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
이것은 극히 정상이었다.
“그러면 돈도 네가 벌 거야?”
걱정은 되지만, 잡을 마음은 없었다.
무엇이든 경험해봐야 할 나이였으니까.
이미 유빈이의 마음은 굳어진 것 같았고, 그런 경험을 해보겠다고 하면 찬성이었다.
그리고 유빈이가 나가서 산다고 해서 성배가 도울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돈도 많고 인맥도 꽤 넓었기 때문에 유빈이의 인생을 도와줄 방법은 수도 없이 많았다.
“어...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긴 할 건데, 어느 정도 용돈은 좀 받았으면 좋겠는데? 헤헤...”
성배는 그냥 웃었다.
어차피 용돈을 끊을 마음도 없었다.
전에도 말했듯 성배는 유빈이의 경제 관념을 바꿔줄 생각이었다.
다만, 혼자서 돈을 벌어보는 것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하긴 했다.
“알았어. 아르바이트는 좋은 경험이 될 거야. 하지만 아르바이트로 돈 버는 것에 집중하지 마. 아르바이트의 목적은 돈이 아니라 경험이야. 용돈은 좀 줄이겠지만, 아르바이트 안 해도 충분할 정도는 될 테니까 돈에 부담은 가지지 마.”
유빈이의 독립은 이미 허락했고, 성배는 독립 이후에 대해 조언해주었다.
아르바이트는 필요하지만, 아르바이트가 생활의 필수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 유빈이는 미래를 위해 공부할 시기였고, 너무 어릴 때부터 돈 버는 맛을 들이면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와, 근데 오빠. 너무 쿨하게 허락해주는 거 아니야? 나는 오빠 설득하려고 별의별 생각을 다 했는데. 뭐라고 해야 오빠가 허락해줄까, 뭐라고 해야 오빠가 걱정하지 않게 할 수 있을까, 하면서.”
원하는 대로 허락을 해주고도 원망을 들었다.
성배가 너무 쉽게 허락해준 것이 섭섭한 듯했다.
자신을 걱정할까 봐 그런 성배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많은 이유들을 준비했는데, 유빈이가 준비한 그 이유들을 들어보지도 않고 성배가 너무 쿨하게 허락해준 것이었다.
어떻게든 허락을 받고 싶어하긴 했지만, 성배가 걱정하는 티가 나질 않으니 그것도 나름 섭섭했다.
“당연히 걱정이야 돼지. 그래도 네가 잘할 거라 믿고 네가 앞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허락해주는 거야. 그리고 네가 내 집에서 나간다고 해서 내 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어림도 없지. 네가 그 학교에 다니는 이상, 너는 항상 내 눈 안에 있어, 자식아. 그러니까 대충 살 생각하지 마. 알았어? 나는 다 알아.”
유빈이가 허락을 받기 위해 준비한 이유들이 많겠지만, 그건 성배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혼자 어떻게 살던, 시간을 알뜰하게 사용하면서 똘똘하게 지내도, 아니면 늘어져서 대충 지내도 그 나름대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많을 것이었다.
앞으로 자신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될 것은 분명했다.
그래서 성배도 반가운 마음으로 이를 허락해줄 수 있었다.
“치... 뭐, 그건 나도 알지만... 그래도 뭔가 서운한데? 기분이 이상해. 내가 요 며칠 동안 오빠한테 허락받으려고 얼마나 고민했는데.”
부모님이 한국에 계신 이상, 성배가 유빈이의 보호자였다.
그래서 유빈이도 정말 부모님에게 허락받는 것처럼 준비했을 것이었다.
예상보다 너무 쉬운 허락에 당황한 유빈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하하하, 집은 알아봤어? 알아보기 힘들면 내가 알아봐 줄 수도 있는데, 내 생각엔 그것부터 네가 직접 하는 게 좋을 것 같네. 그런 경험도 해봐야지.”
좋은 집을 구해주는 건 성배에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유능한 에이전시도 있고, 맨체스터 전문가인 클럽 직원들, 도와줄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이왕 독립을 결정한 김에 처음부터 모든 것을 직접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럴 생각이야. 봐둔 곳들은 많은데, 아직 시간은 좀 있으니까 자세히 봐두려고. 뭣보다, 오빠가 용돈을 얼마나 줄지 모르니까. 그렇게 많이 받을 생각도 없고.”
독립을 결정한 이유부터가 많은 것을 경험해보면서 그렇게까지 부유하지 않은 대학생들의 생활을 느껴보고 싶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용돈을 받을 생각이 없었다.
그 부분에 대해 성배와 이야기를 나눠봐야 했기 때문에 아직은 집을 구할 수 없었다.
“그건 앞으로 대화를 좀 해보자. 용돈을 얼마나 줘야 할지, 그런데 그렇다고 작은 집을 구하지는 마. 사람이 최소한 어느 정도 넓이는 되는 곳에서 살아야지, 안 그러면 우울증 걸려. 용돈으로 월세의 세 배는 줄 테니까, 최소한 15평 이상인 곳으로 구해.”
8평도 안 되는 원룸 아파트에서 생활해본 적이 있었던 성배는 집의 넓이에 민감했다.
사람이 쾌적하게 살기 위해서는 최소한 10평은 되어야 한다는 게 성배의 생각이었다.
“넵! 알겠습니다! 오빠 이사하기 일주일 전까지는 구해놓을게. 이사 전날쯤에 나가면 되겠지?”
맨체스터 시티 선수들을 위한 펜트하우스도 이제 완공이 되어 성배도 이사를 해야 했다.
어차피 이사하는 거, 함께 나가면 될 것 같았다.
“그래. 그렇게 해. 이사는 편하게 하든, 남들처럼 하든 네가 알아서 하고. 결정해서 알려줘. 사람 부를때 같이 말해야 하니까.”
유빈이는 묘한 표정으로 성배를 바라보았다.
뭔가 지금까지 나누던 대화와는 어울리지 않는 익살맞은 표정이었다.
“뭐야? 왜 그렇게 봐?”
“흐흐흐...”
갑자기 웬 아저씨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능글맞은 40대 아저씨 정도 되면 낼 수 있을까, 싶은 정도의 걸쭉한 웃음소리였다.
“뭔데? 왜 그렇게 웃는 건데? 소름 끼치게.”
“이제 나 나가면 좋은 시간 보내겠네? 후후... 그 좋은 집에서. 첼시랑. 오빠랑. 얼레리 꼴레리.”
유빈이는 귀가시간이 좀 늦은 편이었고, 성배는 경기가 없는 날이면 시간이 좀 많은 편이었다.
그래서 함께 산다고 해도 성배가 첼시와 보내는 시간이 그리 적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빈이의 눈치를 아예 안 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좋은 시간은 적당히 가져. 크크크. 그렇게 매일 체력 부족하다고 투덜거리면서 좋은 시간까지 많이 가져버리면 내년에 큰일 날 수도 있잖아. 후후...”
이건 무슨...
갑자기 나타난 또 다른 인격, 40대 아저씨 인격에 당황한 성배는 말을 잃고 말았다.
< 낭만필드 - 28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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