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278 >
“나한테 응원 같은 건 기대하지 마세요.”
경기를 앞두고 만난 임채영은 장난기 어린 말투로, 하지만 진지하게 통보하듯 말했다.
“왜. 이왕이면 응원은 좀 해주지? 경기는 열심히 뛰어야겠지만.”
“난 인진이 형 응원하는데요? 아무래도 우리 주장을 응원해야죠.”
가까운 곳에 연고를 둔 클럽에서 뛰고 있었기에 자주 만나기도 하고 친분도 깊은 편이었지만, 아무래도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에서 함께 뛰는 박인진에게 마음이 기울 수밖에 없었다.
“서운한데? 우리도 나름 직장동료인데 말이야.”
성배와 같은 알랭 에이전시에 속해있는 임채영이었다.
처음에는 버크만이 담당하지 않았지만, 훌륭한 활약을 선보이게 되면서 이번 여름 이적을 목표로 버크만이 직접 나서는 중이었다.
“그렇죠. 직장동료죠. 인진이 형이랑은 직속 선후배 관계고.”
직장동료는 직장동료일 뿐.
국가대표팀 선후배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너무하네. 뭐, 네가 응원 안 해줘도 우리가 우승할 거야.”
당연한 일이긴 했다.
벨기에 선수들은 자신을 응원해주고 있었으니까.
프리미어리그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 그러니까 같은 팀의 콤파니는 물론이고 베르마엘렌, 펠라이니, 뎀벨레 등도 자신과 맨체스터 시티를 응원해주었다.
한국 선수들의 응원 정도는 양보할 수 있었다.
***
맨체스터 시티는 예상대로 볼턴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였다.
전반기 한때 리그 4위까지 올라갔던 돌풍을 유지하진 못했지만, 리그 10위에 올라 최근 가장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는 볼턴이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맨체스터 시티는 근 두 달 동안 보여준 경기력 중 가장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며 그런 볼턴의 골문을 두드렸다.
“전반전이 다 끝나가는 상황에서 맨체스터 시티는 아직 득점을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얼마 떨어지지 않은 올드 트래포드에서는 이미 선취 골이 터졌습니다.”
하지만 선취 골을 먼저 터뜨린 것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다.
같은 그레이터 맨체스터 주에 속한 볼튼과 트래포드에서 경기가 펼쳐지고 있었는데, 마지막 경기를 홈에서 치르는 맨유가 먼저 앞서나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맨시티도 골이 필요해요. 몰아붙이기만 해서는 아무 소용 없습니다. 시즌 후반기에는 경기력이 좋은 것도 필요 없어요. 조금 아쉬운 경기력이었어도 어떻게든 꾸역꾸역 승리를 챙겨왔던 최근의 모습이 필요한 시점이죠?”
마지막 라운드 경기는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펼쳐졌기 때문에 방송사들은 거의 이원생중계 수준으로 마지막 라운드를 중계하고 있었다.
가장 많은 방송사에 배정된 것이 맨유의 경기였고, 그다음이 맨시티의 경기였다.
강등권 싸움도 20위 웨스트햄을 제외하고 15위 블랙번부터 19위 위건까지 승점 1점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등 엄청나게 치열했지만, 유례없이 치열한 우승 경쟁 때문에 살짝 뒤로 밀려버렸다.
“투레! 기습적인 슈팅! 야스켈라이넨 골키퍼의 선방! 코너킥입니다.”
그리고 전반 종료 직전, 맨체스터 시티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벌써 네 번째 코너킥이네요. 앞선 세 번은 별다른 소득 없이 끝났지만, 이번 코너킥은 꼭 살려줘야죠? 주의 킥이 완전히 물올랐거든요? 최근 리그 네 경기에서 코너킥으로만 두 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으니, 대단하죠.”
드디어 원톱으로 나서서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는 제코와 항상 훌륭한 제공권을 뽐냈던 콤파니, 보아텡까지.
여기에 킥이 물이 올라있는 성배의 코너킥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압도적인 위력을 보였다.
‘빨리 선취 골 넣고 마음 편히 가야 돼.’
일방적으로 신나게 몰아붙이던 것도 30여 분, 선취 골이 터지지 않으면서 슬슬 조급한 모습을 보이는 동료들이었다.
아무리 일방적인 경기를 펼쳐도 골이 나와야 할 때 나오지 않으면 조급함에 자멸할 수 있었다.
맨유의 선취 골 소식을 들은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골키퍼 위치가...’
그때, 야스켈라이넨의 위치와 자세가 거슬리게 느껴졌다.
제코와 콤파니, 보아텡의 제공권을 지나치게 의식한 것인지, 살짝 몸이 앞으로 쏠려 있었다.
‘튀어나올 생각만 하는 건가...’
스멀스멀 욕심이 올라왔다.
지금이 오늘 경기와 우승 트로피의 향방을 가를 수 있다는 건 성배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험을 시도하면 성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안전하게 가는 게 옳을 수도 있겠지.’
성배는 원래 중요한 순간일수록 기본을 충실히 따르는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새로운 기회를 얻어 지금 위치까지 빠르게 올라온 기반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프리미어리그 정도 수준의 리그에서는 이럴 때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모두 예상할 수 있는 기본은 상대편 선수들도 충분히 눈치채고 막아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좋아. 한 번 해보자.’
성배는 생각을 끝냈다.
모험 수를 던져보기로 했다.
지금의 자신은 이 정도 모험 수를 성공으로 연결할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오른쪽에서 코너킥! 어, 어!!”
성배가 모험 수를 던지기로 한 이유 중에는 오른쪽 측면 코너킥이라는 것도 있었다.
오른발도 왼발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활용할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왼발이 조금 더 편하기도 했고, 심적으로 자신감도 있었다.
“안쪽, 안쪽으로! 야스켈라이넨,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습니다!! 골! 골입니다! 그대로 골문 안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그리고 성배의 모험은 제대로 적중했다.
킥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앞으로 뛰쳐나온 야스켈라이넨은 예상과 달리 골문 안으로 향하는 볼에 당황했고, 급하게 뒷걸음질 쳐 볼을 따라가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첫 반응부터 너무 자신 있게 앞으로 뛰었던 것 때문에 역동작이 너무 크게 걸려버린 것이었다.
“와! 우와! 와우! 이게 들어갔어요! 이걸 넣었어요! 역시 킥은 주성배! 엄청난 킥이에요!!”
골이 들어간 이후, 성배는 코너플래그 근처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들어 올리며 골 세리머니를 펼쳤다.
언제나처럼 과하지 않은 세리머니였다.
하지만 표정은 평소와 달랐다.
거의 포효하기 직전의 표정, 평소보다 훨씬 상기된 표정이었다.
“세리머니가 보이십니까? 전혀 당황하지 않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의도된 슈팅이었습니다!! 이걸 의도해서 넣을 수 있다는 것, 주의 킥이 얼마나 정교하고 정확한지 보여주는 겁니다!”
성배의 발이 또 한 번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렇게 기다려온 선취 골을 만들어냈다.
조금은 늦었지만, 맨체스터 시티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었다.
“트래포드의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찰리 아담의 골이 터졌습니다! 맨유, 블랙풀과 1-1 동률입니다!”
성배의 골이 나오기 2분 전, 찰리 아담이 골을 터뜨렸다는 소식이 동시에 전달되었다.
상황이 바뀌었다.
이제 맨체스터 시티의 페이스였다.
“놀라운 코너킥으로 첫 골을 만들어낸 주가 다시 한 번 코너킥을 준비합니다.”
성배의 선취 골이 터진 이후, 맨시티는 템포를 좀 더 끌어올려서 볼턴을 몰아붙였다.
후반전 들어서도 맨시티의 기세는 줄어들 줄을 몰랐다.
“맨유는 지금 블랙풀의 테일러-플레처에게 한 골을 더 허용하면서 2-1로 뒤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골 더 넣고 확실하게 벌려야 합니다!”
맨유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맨시티가 바짝 따라붙은 상황이었기에 최소한 두 골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맨시티와 볼턴의 경기가 한 골 차이로 끝날 거라 확신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까지 감안하면 최소한 세 골이 필요했다.
“왼쪽 측면에서 코너킥! 제코, 제코!! 머리로 또 넣었습니다! 에딘 제코! 시즌 10호 골! 기어코 열 골을 채웁니다! 시즌 10호, 리그 7호 골! 제코가 막판에 와서 팀을 살립니다!”
성배의 코너킥이 제코의 머리를 노렸고, 제코는 최근의 좋은 분위기를 증명하며 또 한 번 머리로 골을 기록했다.
비난의 대상이었던 제코가 시즌 막판에 화려하게 날아오르고 있었다.
“주도 어시스트 하나를 더 추가합니다! 리그 10호 어시스트! 프리미어리그 입성 후 리그 10호 어시스트를 돌파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리고 성배는 언제나처럼 중추적인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리그에서만 열 개째 어시스트.
프리미어리그 입성 후 처음이었다.
“맨유도 동점 골을 기록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는데, 거기도 이제 급해졌습니다! 이 소식을 맨유가 모를 리 없고, 남은 30분에 두 골이 필요한 상황! 맨유, 이대로 트로피를 내줍니까?”
첫 골을 넣었던 박인진이 이번에는 안데르손의 득점을 어시스트, 동점 골을 만들어냈다.
박인진과 성배가 나란히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의 멱살을 잡고 끌고가는 상황.
지금까지는 맨시티의 상황이 훨씬 더 좋았다.
***
“볼턴, 영 힘을 쓰지 못합니다. 전력이 이 정도로 약한 팀은 아니지 않습니까?”
잿 나이트와 개리 케이힐의 국가대표급 센터백 듀오, 케빈 데이비스, 요한 엘만더라는 두 명의 떡대 스트라이커로 구성된 피지컬 투톱, 여기에 임채영의 창의적이고 기술적인 플레이까지.
볼턴은 결코 약한 팀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의 볼턴은 맨시티를 상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가드너, 오른쪽의 임채영에게 볼을 넘깁니다. 킥 앤 러시 전술밖에 없었던 볼턴에 새로운 옵션을 만들어준 선수가 바로 임아니겠습니까? 지금은 임이 뭔가 해줘야 하는 상황입니다.”
맨시티는 오늘 다득점이 필요했기 때문에 라키티치와 투레를 동시에 투입, 공격적인 역할을 맡겼다.
데 용이 있기는 하지만, 평소보다는 중원 장악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콤파니와 보아텡이 평소보다도 훨씬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데이비스와 엘만더를 꽁꽁 틀어막았다.
볼턴은 양 측면의 임채영과 스터리지, 특히 임채영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임이 지금 상황을 타개하는데 가장 어울리는 선수라는 건 맞아요. 하지만 좋은 선택인지는 모르겠네요.”
그때, 임채영의 돌파가 성배의 태클에 걸리며 저지되었다.
“이렇게 되거든요? 임채영은 분명 좋은 선수지만, 아직 주를 상대하기엔 무리예요. 차라리 왼쪽의 스터리지에게 넘겨서 사발레타와 붙이는 게 효율이 더 나아 보이네요.”
스터리지와 임채영이 맡은 양 측면은 중위권 클럽치고 나쁘지 않았지만, 오늘은 별로 힘을 쓰지 못했다.
볼턴 자체가 맨시티에게 완벽히 밀리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아직까지는 맨시티가 유리한 상황이지만, 언제 이 순위가 바뀔지 모르거든요? 당장 맨유가 한 골만 더 넣으면 바로 맨유의 우승이에요.”
트래포드에서 펼쳐지는 경기는 여전히 2-2였지만, 아직 20여 분의 시간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아직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맨유가 한 골만 더 넣어도 골 득실이 동률이 되어 1위가 바뀌는 것이었다.
“어! 터졌습니다! 블랙풀의 자책골이 터졌습니다! 블랙풀 센터백, 이안 에바트의 자책골로 맨유가 3-2! 리드를 잡았습니다! 아울러 리그 1위 자리도 다시 찾았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맨유의 득점 소식이 전해졌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블랙풀 수비수의 자책골로 맨유가 다시 1위 자리를 탈환한 것이었다.
맨시티가 걱정하던, 그리고 제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맨유의 득점이었다.
< 낭만필드 - 27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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