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266화 (167/356)

< 낭만필드 - 266 >

“지금 뭐라고 했냐?”

테베즈의 표정이 굳어졌다.

“뭘 뭐라고 해. 들었잖아. 그런 식으로 흠잡을 거면, 원론적으로 따져보자는 거지.”

감정적인 대응이 돌아와도 성배는 이성을 잃지 않았다.

평소와 같은 크기, 억양, 높이로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내 역할은 수비와 측면 지원. 내가 그걸 못했나? 골은 나오면 좋고, 안 나오면 별수 없는 거지. 그런데. 카를로스. 너는 어땠는데?”

성배의 슈팅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보여준 움직임과 마지막 패스는 훌륭했지만, 테베즈도 그뿐이었다.

괜히 유럽 대항전 징크스가 있는 게 아니라는 듯 딱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진 못했다.

맨시티 공격의 절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테베즈의 침묵은 자연히 맨시티 공격의 침묵으로 이어졌다.

“지금 내 책임으로 돌리는 거냐? 우리 분위기가 언제부터 안 좋아졌는지 그 계기가 확실한데?”

물론, 맨시티가 본격적으로 레알 마드리드에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 계기는 성배의 슈팅이 빗나간 직후부터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맨시티 부진의 이유가 성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해서 너희 모두에게 미안한데, 프로 선수가 골 찬스에서 골 하나 안 들어갔다고 우르르 무너지는 게 말이 돼? 그게 힘들게 기회 만들어서 그나마 가장 위협적인 찬스까지 만들어준 수비수한테 할 소리라고 생각해서 하는 건가? 그래? 카를로스?”

골을 못 넣은 성배도 딱히 할 말은 없었다.

하지만 그거 하나로 우르르 무너진 거라면 프로 선수의 자격이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걸 핑계라고 대고 있는 테베즈의 말은 그만큼 설득력이 없었다.

“후우, 끝까지 당당하구먼, 아주. 할 말이 없어.”

할 말이 없어진 테베즈는 결국 정신 승리를 시도했다.

그리고 동료들은 조용히 눈치만 보거나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기세 싸움이 있긴 했지만, 전 주장과 현 주장의 갈등이 표면 위로 드러난 첫 사건이었다.

전부터 아슬아슬하다가 결국 터진 것이었다.

“전반전은 아주 형편없었어! 정확히 말하면 20분 정도부터는. 아니, 기회 놓치는 거 한두 번 보나? 한 경기에도 몇 번씩 나오는 건데, 그거 하나로 이렇게 우르르 무너진다고?”

만치니 감독의 심정도 성배와 같았다.

이해는 하지만, 용납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른 선수들도 아마 같은 생각일 것이었다.

“후반전이라고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건 없어. 레알은 우리가 상상한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잖아. 준비한 대로만 하면 충분히 잡을 수 있는 경기야.”

문제는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 스타일이 예상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럴 때가 가장 난감한 경우였다.

그 준비한 대로가 되지 않아 상대의 전술에 휘말리는 것이었으니까.

“우리도 열심히 준비했잖아. 전반전 20분까지만 해도 잘했다고. 다시 한 번 그렇게만 해보자. 알았지?”

물론, 레알 마드리드 정도 되는 팀이면 가장 자신 있는 전술을 한 시즌 내내 돌리는 게 정상이었다.

그렇게만 해도 대부분의 팀들이 힘들어했으니까.

비슷한 수준인 바르셀로나를 비롯한 한두 개 클럽과의 경기에서야 맞춤 전술을 들고 나가지만, 아직 맨시티는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자, 자! 레알 마드리드랑 붙어보니까 크게 뭐 없지? 우리도 충분히 잘했잖아? 안 그래? 다시 한 번 정비하고 제대로 한 번 붙어보자고.”

만치니의 등장으로 신경전을 끝내고 마음을 가라앉힌 성배도 동료들을 독려했다.

레알 마드리드가 강하다는 걸 느끼긴 했지만, 예상한 수준이었다.

아직은 담금질이 더 필요한 맨체스터 시티보다 강한 건 당연했고, 바르셀로나와 함께 라 리가의 신계를 구성하는 팀 다운 경기력이었다.

“그런데 우리 생각보다 꽤 하네. 그 레알을 상대로 이 정도라니.”

레알 마드리드는 분명 맨시티보다 한 수 위라는 평가를 받는 팀이었다.

맨시티가 승부를 걸고 있는 시점은 2012/13시즌 정도였고, 이번 시즌과 다음 시즌은 그 토대를 만드는 시즌이었다.

감정적으로는 분하고 실망스러웠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 시점에서 이 정도 경기력은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레알을 이기겠다는 생각은 버려. 우리가 언더독이야. 이기겠다고 생각하면 불리한 분위기가 발목을 잡으니까, 경기를 비슷하게 끌고 간다는 것에 만족하면서 뛰자. 그러면 좋은 결과를 받을 수 있을 테니.”

맨체스터 시티는 언더독의 입장이 익숙하지 않았다.

지난 시즌까지는 몰라도 이번 시즌부터는 언더독의 입장이었던 적이 거의 없었다.

인테르나 AC 밀란전은 다른 사람들이 불리하다고 이야기했을 뿐, 맨시티 관계자들은 모두 자신감을 가지고 경기에 임했다.

“그래, 좋아. 언더독이라... 그거 오랜만인데?”

콤파니가 성배의 말에 반응해주면서 동료들을 독려했다.

프리미어리그에도 맨유나 첼시 등 레알 마드리드에 크게 밀리지 않는 강팀들이 있었지만, 적어도 이번 시즌만큼은 맨시티와의 경기에서 탑독 위치를 가져가지 못했다.

맨시티의 성장도 성장이지만, 이번 시즌 프리미어리그가 혼돈에 빠져있어서이기도 했다.

“그래. 오랜만에 제대로 언더독스럽게 해보자고. 야야. 네가 가장 오랜만일 텐데, 베베런이랑 모나코 시절을 떠올리면서 입에서 단내날 때까지 한 번 괴롭혀줘.”

바르셀로나 시절부터 합하면 근 몇 년간 세계 최고 수준의 팀에서만 뛰었던 투레였다.

하지만 바르셀로나로 이적했던 것은 약팀에서 그만큼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하. 오랜만인가. 좋아. 옛날 생각 한 번 내보지, 뭐.”

투레는 사실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이기는 하지만, 공격에 치중하는 스타일이었다.

수비도 훌륭한 편이기는 한데, 선수 본인이 공격을 더 좋아해 수비를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아마 제대로 해줄 것이었다.

“니헬. 퇴장만 안 당하게. 알지?”

“아, 귀에 딱지 앉는다. 알았으니까 걱정하지 마.”

데 용은 탑독일 때도 터프한 선수였다.

그 거친 플레이만 좀 자제하면 언더독의 자세로 충분했다.

“그래. 주의 말이 맞아. 기본으로 돌아가자. 경기 전에 준비했던 것처럼 알론소랑 외질만 잡아.”

전반전 중반부터 경기의 주도권을 내줬던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역시 가장 큰 것은 알론소와 외질이 활개 칠 수 있는 상황을 억제하지 못한 것이었다.

경기에서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결국 이 두 선수를 다시 제압해야 했다.

“마이카. 호날두는 꼭 막아야 해. 알지? 완전히 지워버리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만 막아.”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가 분위기를 잡아낸 또 하나의 이유.

왼쪽 측면에서 맨시티의 오른쪽을 파괴중인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였다.

“어떻게든 한 번 해보겠습니다.”

맨시티의 믿음직한 라이트백, 리차즈가 오랜만에 힘들어하고 있었다.

리차즈도 나름 잘 막아주고 있었지만, 알론소와 외질이 살아난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도 리차즈 이상의 수비를 보여주기 힘들 것이었다.

‘모라타랑 디 마리아는 잘 막았어. 알론소, 외질만 다시 잡을 수 있으면 호날두도 같이 잡는다.’

호날두의 스타일이 득점기계 형태로 바뀌기까지는 아직 몇 년의 시간이 남은 상황이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호날두는 같은 신계의 메시에 비하면 동료의 도움이 좀 필요한 선수였다.

두 선수를 묶어두고도 실점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실점이니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

“후반전에는 맨체스터 시티도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초반과 비슷한 분위기로 경기가 이어집니다.”

하프타임에 분위기를 가다듬은 맨체스터 시티는 다시 경기 초반처럼 팽팽한 경기를 이어갔다.

일단은 나쁘지 않은 밸런스였다.

“실바의 측면 돌파! 중앙으로 다시 넘겨줍니다.”

리차즈, 밀너가 마르셀루, 호날두를 상대로 수세에 몰리면서 맨시티의 측면 공격은 왼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실바와 성배는 디 마리아, 라모스와 측면의 주도권을 놓고 팽팽하게 맞붙었다.

“왼쪽에서 올라오는 주에게 내주는 패스. 주, 그대로 속도 올립니다!”

디 마리아를 상대하는 게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보니 오늘 성배는 리차즈의 몫까지 적극적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자주 올라오는 만큼 한 건 해야 할 텐데.’

세계 최정상급의 센터백 페페, 그리고 무리뉴를 따라와 회춘한 카르발류.

그리고 부지런하고 다재다능한 미드필더 케디라.

맨시티가 중앙 미드필더들을 앞세워 중원을 장악하긴 했지만, 테베즈의 부진으로 상대 중앙 수비를 뚫어내진 못했다.

중앙이든 측면이든 활로를 찾을 필요가 있었다.

‘제길.’

하지만 성배가 측면에서 활로를 찾아주는 것도 쉽지 않았다.

옆에서 태클이 들어왔다.

그리고 성배는 그 순간 돌파를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라모스의 태클! 태클로 돌파를 저지합니다! 라모스, 오늘 움직임이 좋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성배의 역할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센터백과 라이트백을 모두 소화하는 라모스의 수비력은 동 포지션 최고 수준이었다.

공격력이 뛰어난 편인 것은 맞지만, 성배의 공격은 실바를 비롯한 다른 동료와의 연계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다른 동료들도 정신이 없고 상대하는 수비수도 만만치 않은 오늘 같은 경기에서는 성배의 영향력에 한계가 있었다.

“양 팀이 굉장히 좋은 경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수 위라고 평가받는 레알의 홈 경기였기 때문에 레알의 승률이 높아 보였는데, 일단 지금까지는 맨시티도 잘 버티고 있습니다.”

경기 종료까지 25분가량 남은 상황에서 스코어는 여전히 0-0.

생각보다 잘 버텨주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맨체스터 시티는 잘 풀려도 무승부 이상의 결과를 얻어내기 힘들 것 같거든요? 아무래도 선택권은 레알 마드리드 쪽에 있어요. 레알 마드리드도 홈경기를 놓칠 순 없으니까 이제부터는 좀 적극적으로 나가야 해요.”

무승부로 끝난다면 레알 마드리드가 손해일 수밖에 없었다.

벤제마, 이과인, 아데바요르의 이탈이 너무나 뼈아팠다.

맨체스터 시티가 한 수 아래로 평가받기는 했지만, 손쉬운 상대는 절대 아니었고, 시티즌이 내뿜는 열기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열기 못지 않았다.

레알 마드리드도 원정 경기는 부담스러웠다.

“페페, 왼쪽으로 내려주고, 마르셀루! 속도를 붙입니다!”

레알 마드리드의 공격 역시 왼쪽에서 시작했다.

오른쪽은 맨시티의 왼쪽을 상대로 크게 재미를 못 보고 있었고, 마르셀루와 호날두는 언제나처럼 강력했다.

“현란한 발놀림! 배리, 잡아내지 못합니다!”

레알 마드리드에 절대 없어서는 안 되는 선수.

성배와 비슷하게 수비수지만 공격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해주는 마르셀루였다.

특유의 개인기와 발재간, 스피드로 레알 마드리드 공격의 시발점 역할을 훌륭히 해주고 있었고, 지금도 마르셀루의 돌파부터 공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시저스, 그리고 오른발 크로스!”

호날두에게 패스할 것처럼 페인트를 걸고 헛다리까지 섞어주자, 리차즈의 중심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마르셀루는 바깥쪽으로 볼을 치고 나가면서 오른발 얼리 크로스를 올려주었다.

‘크로스는 딱히 위협적이지 않아.’

마르셀루의 돌파 자체는 굉장했지만, 모라타와 디 마리아에게 공중 볼을 빼앗길 확률은 높지 않았다.

맨체스터 시티에는 야야 투레, 레알 마드리드에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세트피스 상황이 아니면 공격 상황에서 헤더를 따줄 선수가 이 둘밖에 없었다.

“보아텡이 먼저... 어, 어어!?”

하지만 축구에는 항상 변수가 있었다.

< 낭만필드 - 266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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