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262 >
성배의 선택은 패스였다.
이미 모든 슈팅 코스가 막혔는데, 억지로 슈팅으로 이어갈 생각은 없었다.
다만, 문제는 있었다.
모두가 슈팅일 거라 생각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아마 제코도 반응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제코가 반응할 수 있느냐가 가장 중요했다.
“다시 제코에게! 제코! 정강이에 맞고 들어갑니다! 체흐가 어떻게든 막아내려고 버둥거려보지만, 실패! 볼이 골라인을 넘어갑니다!”
조금 늦긴 했지만, 반응한 것만으로도 대단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패스임에도 본능적으로 발을 뻗은 제코의 정강이에 맞으면서 볼은 어쨌든 골대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동점을 만들기 위해 전력을 다했던 첼시, 오히려 맨시티의 역습에 추가 실점을 허용하며 두 골 차이로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남은 시간은 10분이 채 안 됩니다!”
드록바가 보아텡과 콤파니에게 밀리며 볼이 흘러나오고, 다시 램파드에게 투입된 볼 역시 콤파니와 데 용에게 밀리면서 소유권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역습 상황에서 테리가 제코에게 밀리며 공중 볼을 놓쳤고, 성배의 패스에 허를 찔린 체흐 역시 슈팅을 막아내지 못하고 버둥대다가 실점하는 굴욕을 겪었다.
“첼시의 전성기를 이끈 코어 라인, 드록바와 램파드, 테리와 체흐로 이어지는 이 라인이 모두 동시에, 한 번의 플레이에 무너져버렸어요! 첼시의 상징이 꺾인 거나 다름없죠!”
맨시티는 이번 한 번의 플레이로 첼시를 지탱해온 상징과도 같은 선수들을 모두 꺾어냈다.
프리미어리그의 신흥 강호인 맨시티가 2000년대 프리미어리그를 지배한 팀 중 하나인 첼시의 상징들을 모두 꺾어낸 것이었다.
신흥강호가 기존 강호의 핵심 선수들을 무너뜨리며 득점.
어딘가 의미심장한 플레이였다.
***
“첫 골을 넣은 악셀 비첼, 오늘 움직임이 좋습니다.”
첼시와의 경기에서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한 성배는 기분 좋게 국가대표팀에 합류했다.
그 기세를 이어 유로 2012 예선 B조 5차전, 아일랜드와의 경기에 라이트백으로 출전, 아일랜드의 왼쪽 측면 미드필더 킬베인을 그야말로 지워버리고 있었다.
“오른쪽의 뎀벨레에게. 뎀벨레, 더프를 앞에 두고 돌파를 준비합니다.”
‘맥기디 스핀’으로 유명한 에이든 맥기디와 프리미어리그 울버햄튼의 주전 라이트백 케빈 폴리로 구성된 아일랜드의 오른쪽 측면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77년생으로 이미 전성기가 지나 2005/06시즌 이후 챔피언쉽에서 활약 중인 킬베인과 원래 포지션이 아닌 곳에서 뛰는 레프트백 더프로 구성된 왼쪽 측면은 구멍이 크게 뚫려있었다.
“옆으로 파고드는 주에게 패스! 주의 오버래핑!”
서른네 살의 나이로 피지컬이 하락한 킬베인과 수비가 어색한 더프는 뎀벨레-성배의 벨기에 오른쪽 측면을 전혀 막아내지 못했다.
벨기에의 주요 공격 루트 역시 이곳이었다.
‘어설퍼.’
수비가 어설플 수밖에 없는 두 선수였고, 나이도 킬베인이 77년생, 더프가 79년생으로 피지컬마저 하락세였다.
쌩쌩한 87년생, 성배와 뎀벨레의 달리기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한 번 접고, 다시 두 번 접으면서 오른발 크로스!”
성배의 작은 움직임에도 전력을 다해 반응해야 하는 상황.
당연히 페인트에 취약했다.
연속 두 번의 페인트로 가볍게 마크를 벗겨낸 성배는 오른발로 편안하게 크로스를 시도했다.
“비첼, 다시 한 번 헤더! 골! 골입니다! 웨스트우드 골키퍼, 팔을 한껏 뻗어보았지만, 역부족입니다!”
그리고 성배가 편안하게 크로스를 올리게 놔두면 이미 절반은 실점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늘 헤딩 감각이 좋은 비첼은 가볍게 방향만 바꾸며 두 번째 골을 집어넣었다.
194cm의 펠라이니에게 가려져서 그렇지, 비첼 역시 186cm에 제공권이 좋은 미드필더였다.
“벨기에, 대단합니다! 베르마엘렌과 펠라이니, 아자르, 루카쿠 등이 가벼운 부상으로 빠지면서 주전의 반이 빠졌는데, 만만치 않은 상대인 아일랜드에게 2-0으로 앞서나갑니다!”
벨기에의 스쿼드는 지금도 조금씩 강해지면서 또 두꺼워지고 있었다.
2월에 있었던 친선 경기에서는 나세르 샤들리와 드리스 메르텐스도 A매치에 데뷔했다.
오늘도 많은 선수가 빠졌지만, 전과 달리 크게 흔들리지 않고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아일랜드는 절대 만만한 팀이 아니죠. 킨과 도일의 투톱은 물론이고 리차드 던, 더프, 휄란, 맥기디, 맥카시, 깁슨, 등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이 상당히 많아요.”
프리미어리그에서 쏠쏠하게 활약해주는 선수들이 대부분인 것도 아일랜드의 강점이었지만, 역시 가장 큰 장점은 감독이었다.
조반니 트라파토니.
이탈리아 최고의 명장으로 UEFA가 주관한 모든 대회를 석권한 최초의 감독이며 리그 타이틀을 10회 이상 획득한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축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감독을 꼽으면 무조건 한 손에 꼽히는 감독이기도 했고, 명선수 출신으로 명장이 된, 속설을 깬 감독이기도 했다.
“그렇습니다. 트라파토니 감독 아래에서 지난 월드컵 예선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해 정말 억울한 사건으로 탈락하기도 했고, 이번 유로 예선에서도 러시아에게만 1패를 기록하며 3승 1패의 호성적을 거두고 있습니다.”
유로 대회 한 번, 월드컵 세 번 진출에 그치고 특별한 실적도 없는 아일랜드는 그리 강한 팀이 아니었다.
하지만 트라파토니 감독 부임 이후 조금씩 강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선수단의 면면도 괜찮아서 2002 월드컵 이후 10년 만에 메이저무대 복귀를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아일랜드를 주전 선수 절반이 빠진 상태에서 이렇게 압도하는 거죠. 벨기에, 정말 강해졌어요.”
예선이 4차전까지 진행된 현재, 조 1위는 러시아도, 아일랜드도 아닌 벨기에였다.
러시아와의 원정 경기에서 무승부를 거둔 걸 제외하고는 전승.
3승 1패의 아일랜드와 2승 2무의 러시아가 뒤를 따랐다.
“아, 칭찬하고 있는 사이에 주가 또 한 번 킬베인의 돌파를 가볍게 막아냈습니다. 정말 믿음직한 주장이지 않습니까?”
경기 중에 경기와 전혀 상관없는 대화를 할 정도로 긴장감이 없었다.
그만큼 벨기에가 유리하다는 뜻이었다.
불과 3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지역예선 포트 D에 배정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발전이었다.
“아니, 그걸 굳이 말로 할 필요가 있나요? 방금 좀 깜짝 놀랐네요. 그런 당연한 말을 아직도 입 밖으로 내뱉는 분이 있다는 것에 소름이 잠깐 돋았어요.”
그리고 그럴수록 벨기에의 최고 스타이자 주장인 성배의 인기는 하늘이 무섭지 않다고 치솟았다.
한국에서 박인진이 갖는 위상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이런. 말 한 번 잘못했다고 너무 구박하시는 거 아닙니까? 다른 분들이 알고 계신다고 해서 말 안 하면 저 계약 해지됩니다. 하하.”
선수로서는 어느새 세계 최고의 레프트백을 꼽을 때 이름을 걸칠 수 있는 수준까지 성장했다.
그리고 주장 역할을 수행하면서 단 한 마디의 불만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경기만 몇 번 봐도 성배의 장악력을 느낄 정도였다.
“처음 주가 벨기에로 귀화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장면을 상상조차 못했는데요. 그냥 좋은 유망주 한 명 합류했구나, 하는 정도였는데, 이제는 주가 없는 벨기에를 상상할 수 없어요.”
귀화 초기, 이방인의 포지션을 벗어나지 못했던 성배지만, 어느새 팀의 핵심 선수이자 중심축이 되어 있었다.
전생에서 외국인의 신분으로 많은 서운한 일들을 겪으며 고생했던 것을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성공이었다.
“스물넷의 어린 나이에 벌써 A매치 출장 횟수가 40경기에 육박합니다. 2006년 말, 열아홉의 나이로 국가대표팀에 데뷔해서 어느새 없어서는 안 되는 선수가 되었습니다.”
성배보다 먼저 유명세를 얻었던 콤파니는 물론이고 아자르, 루카쿠 등 주목받기 쉬운 공격수 포지션의 선수들이 빠르게 떠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성배의 위치를 위협하는 건 아마 불가능할 것이었다.
벨기에 암흑기의 마지막을 겪은 선수였고, 그 시기의 벨기에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버티게 해준 선수이기도 했다.
그리고 팬들에게 암흑기를 견디며 기다릴 수 있는 희망을 보여주며 힘을 나눠준 선수이기까지 했다.
선수로서의 명성이나 몸값은 곧 공격수에게 역전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벨기에 내에서의 인지도와 인기는 성배를 대체하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경기 끝났습니다! 벨기에! 유로 예선의 정확히 절반이 끝난 현재, 4승 1무로 무패행진을 달립니다! 이게 얼마만입니까!”
벨기에는 악셀 비첼의 두 골을 끝까지 지켜내며 승리를 거두었다.
벌써 유로 2012 예선 다섯 경기 연속 무패였다.
4승 1무로 다섯 경기에서 승점 13점을 수확, 2위 러시아에 승점 2점 차이로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메이저 무대 복귀가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남은 다섯 경기만 잘 치르면 내년에는 폴란드나 우크라이나로 떠날 수 있습니다.”
유로 2012 공동개최국인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비행기 티켓은 이미 반쯤 결제된 상황이었다.
***
“주, 상담하고 싶은 게 있는데 말이죠.”
아일랜드와의 경기를 승리로 마무리한 뒤에 가진 가벼운 파티에서 루카쿠가 성배를 찾아왔다.
뭔가 고민거리가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뭔데?”
지난 시즌 리그에서 15골을 터뜨리며 최연소 득점왕을 차지했던 루카쿠는 이번 시즌에도 두 자리 수 득점을 기록하며 본인의 가치를 높였다.
연계 능력도 나쁘지 않고 어린 나이에 벌써 피지컬에서 강한 경쟁력을 보유한 루카쿠에게 다수의 클럽이 관심을 보내고 있었다.
“벌써 시즌도 다 끝나가잖아요. 이번 시즌이 끝나면 이적하려고 하는데, EPL로 가고 싶거든요.”
당연히 루카쿠도 슬슬 더 큰 무대로 떠나고 싶을 것이었다.
그리고 성배 역시 루카쿠의 성장을 위해 빅리그로 이적하는 건 찬성이었다.
“그래서 뭐가 문제인데? 가고 싶으면 가야지. 나도 EPL 이적은 찬성. 넌 피지컬이 뛰어나니까 EPL에서도 분명 성공할 거야. 자, 문제가 뭐야. 문제를 말해봐.”
아직 이적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플레이에 대한 질문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이적할 클럽 선택에 대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혹시 제가 첼시의 열렬한 서포터인 건 아세요? 제가 첼시 엄청 좋아하거든요.”
루카쿠는 알아주는 첼시 팬이었다.
어릴 때 스탬포드 브리지로 찾아가 응원한 적도 있고, 당시 지안프랑코 졸라를 보면서 감명을 받았다다고 했다.
“드록바와 함께 뛰고 싶은 마음도 크고, 그 푸른 유니폼을 입고 싶기도 하고요.”
가장 존경하는 선수는 디디에 드록바.
그야말로 성공한 팬이었다.
“너도 첼시 이적이 뭔가 불안하니까 나한테 물어보는 거지?”
그렇게까지 마음이 확실하면 굳이 성배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네. 아무래도요.”
뭔가 불안한 것이 있으니까 성배에게 질문한 것이었다.
그리고 성배도 첼시 이적은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일단 난 반대이긴 한데. 일단 거긴 좋든 싫든 토레스를 몇 년 더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5,000만 파운드 값은 뽑아야지.”
실제로 토레스 때문에 루카쿠는 첼시에서 거의 기회도 받지 못하고 에버튼으로 떠나 그곳에서 빛을 발한 케이스였다.
토레스 영입을 위해 상당한 출혈을 감수한 첼시였기 때문에 그건 어쩔 수 없었다.
“휴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맨시티는 어때요?”
성배와 콤파니의 존재 덕분에 맨체스터 시티 역시 빠르게 벨기에 유망주의 목표로 떠오르는 중이었다.
그리고 순간, 성배는 루카쿠보다 맨시티, 아니, 맨시티보다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적극적으로 맨체스터 시티를 추천하고 싶다는 유혹에 사로잡혔다.
< 낭만필드 - 26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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