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259화 (160/356)

< 낭만필드 - 259 >

“수고했어. 오늘도 역시 멋있었어.”

다음 날, 경기 바로 다음 날이었기 때문에 오전에 가벼운 회복 훈련만을 소화하고 집에서 쉬고 있으니 첼시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학교에 입학해 1학년으로 공부하고 있는 유빈이에게 대학 생활에 대한 조언을 해주느라 몇 번 만나다가 자연스럽게 관계가 발전한 두 사람이었다.

평범한 연인 사이로 아주 깊은 관계는 아니었지만, 25년 만에 자스민이 아닌 다른 여성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새로운 기분이었다.

“고마워. 그렇게 마음에 드는 경기는 아니었지만, 이겼으면 되는 거지.”

사실 경기 분위기대로 득점이 나왔다면 최소한 두 골 정도는 터졌어야 하는 경기였다.

그런 경기가 0-0으로 끝났으니, 맨시티 선수들 입장에서는 못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토너먼트였고,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으니 그걸로 끝이었지만.

“그래. 사실 좀 아쉽긴 했지. 밀란도 잘 했어.”

자연스럽게 걸어온 첼시는 소파에, 성배의 옆에 앉았다.

[위클리 플레이어]를 포함해 저녁 시간 전에 두 개의 방송 촬영을 마친 첼시는 꽤 피곤해보였다.

“피곤하지? 들어가서 씻고 좀 쉬어.”

성배도 바로 전 날 챔피언스리그 8강 진출을 결정짓는 중요한 경기를 소화했기 때문에 꽤 피곤한 상태였다.

혹시나 잠이라도 들어 루틴이 깨질까봐 누워있지는 못했지만, 소파에 널부러져 상당한 시간을 멍하니 쉬고 있었다.

“으으, 알았어. 일단 씻고 올게.”

첼시가 씻으러 들어갔지만, 딱히 묘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정도로 피곤했다.

“유빈이는 어디 갔어? 이 시간이면 학교에 있으려나?”

샤워를 마친 첼시는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면서 거실로 나왔다.

언젠가부터 집에 있었던 자신의 트레이닝복을 입은 채였다.

“학교 갔지. 강의는... 끝났겠네. 그런데 요즘 과제가 있는 것 같아. 건축학과는 장난 아니라고 하더라고. 요즘 나도 얼굴보기 힘들어.”

성배가 걱정했던 대로 유빈이는 상당히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이제 1학년이지만, 아무래도 늦게 시작하기도 했고, 급하게 공부하느라 비어버린 부분들도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채워야했고, 과제 자체의 양도 상당했다.

경제관념을 가르치면서 습관을 바꿔 놓으려고 용돈을 꽤 주고 있는데, 그 돈을 쓸 시간도 없는 듯했다.

“읏차! 그래도 대단하네. 나도 잘은 모르지만, 주변 사람들한테 들어보면 건축 공부가 엄청 힘들다던데. 그것도 낯선 외국에서 공부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 잘 버텨주네.”

원래 유빈이가 이렇게 심지가 굳은 아이였나, 싶을 정도로 친구 한 명 없는 외국에서 잘 버텨주고 있었다.

벌써 학기가 시작하고 반년이 넘게 지났는데, 생활은 물론 성적도 꽤 괜찮게 나오는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표정이 괜찮다는 것이 가장 긍정적인 신호였다.

“그러게. 나도 이렇게 적응을 잘할 줄은 몰랐는데.”

유빈이를 향한 칭찬에 괜히 뿌듯하고 자랑스러워졌다.

여동생을 칭찬했다고 이런 기분이 되다니.

놀라운 경험이었다.

“대단해. 가끔은 존경스럽다니까.”

유빈이가 성배와 함께 살고 첼시가 성배와 만남을 갖기 시작하면서 유빈과 첼시가 만날 기회도 자연스럽게 많아졌다.

첫 만남부터 서로에게 좋은 느낌을 받았던 두 사람은 계속해서 만나게 되면서 성배 못지않게 절친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뭐, 알아서 잘 하고 있는 유빈이 이야기는 그쯤 하고. 저녁은 먹었어? 제이든 오려면 한 한 시간 정도는 있어야 할 텐데.”

슬슬 저녁시간이었다.

클럽에서 고용한 요리사가 오려면 대략 한 시간 정도 걸릴 것이었다.

평소보다 움직임이 적은 날이어서 그리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첼시는 평소보다 많이 움직였을 것이기에 배가 고플 수도 있었다.

“배고픈가? 좀 그런 것 같기도 한 것 같긴 한데...”

첼시는 말꼬리를 늘이며 흐트러뜨렸다.

그리고 슬쩍 몸을 소파에 기울이며 자세도 흐트러뜨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래에서 위쪽으로 살짝 올려다보면서 성배의 눈을 바라보았다.

“역시 그렇겠지. 저녁은 한 시간 뒤에 제이든이 오면 먹자고.”

혹시 방금 전에 너무 피곤해서 묘한 생각이 안 든다고 누군가 했었던가.

아무래도 사과해야 할 것 같았다.

***

AC 밀란과 챔피언스리그 16강 2차전을 치르고 8강 진출을 확정지은 맨체스터 시티는 4일 뒤 다시 홈에서 레딩과 FA컵 8강전을 치르게 되었다.

FA컵 8강에 유일하게 남은 하부리그 클럽이 바로 레딩이었다.

그런 레딩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은 안 그래도 익숙하지 않은 유럽 대항전 병행 시즌을 치르는 맨체스터 시티에게 굉장히 반가운 소식이었다.

“맨시티 선수들, 아무래도 몸이 무거운 모습입니다. 챔피언스리그를 병행하는 체력적인 부담 때문에 어쩔 수 없긴 합니다만, 조금은 아쉬운 모습입니다.”

만약 챔피언쉽 클럽인 레딩이 아니라 다른 프리미어리그의 클럽을 만났다면 쉽지 않은 경기가 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오늘 맨시티의 경기력은 심상치 않았다.

두 번에 걸친 FA컵 재경기와 계속되는 챔피언스리그 일정, 그리고 당연히 이어지는 리그 일정까지.

아직 노하우가 쌓이지 않은 맨체스터 시티에게는 쉽지 않은 스케줄이었다.

“비에라에게서 투레. 그리고 오른쪽의 라이트-필립스에게 연결됩니다.”

만치니 감독도 이런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나름대로 열심히 선수들의 체력관리를 해주고 있었다.

실바를 빼고 대신 이번 시즌 들어 주전에서 완전히 밀려난 라이트-필립스에게 출전 기회를 주었고, 배리를 빼고 비에라를, 데 용을 빼고 라키티치를 투입했다.

콤파니와 성배도 레스콧과 사발레타로 대체된 상황이었다.

“네 말을 듣고 빠지겠다고 말하기는 했다만, 이거 괜찮은 거야? 홈인데도 경기가 너무 치열한데?”

성배와 콤파니는 사실 출전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쉬고 싶다는 성배의 의견과 콤파니의 동조로 경기에서 빠진 것이었다.

“괜찮아. 어차피 토너먼트야. 한 골만 넣어서 이겨도 결국 4강에 가는 거라고.”

레딩이 아니었다면 경기가 끝나고 쓰러질 것같은 몸상태였어도 무조건 경기에 나섰을 것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상대는 챔피언쉽의 레딩이었고, 레딩의 공격을 막는 데는 사발레타와 레스콧도 차고 넘치는 수비수였다.

“반대로 한 골이라도 먹혀서 이변이 일어나면 바로 탈락이라는 거지.”

1969년 이후 벌써 42년째 FA컵 우승이 없는 맨체스터 시티였다.

아무래도 리그나 챔피언스리그보다는 한 단계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는 대회였지만, 남다른 의미가 있는 대회였기에 많은 클럽들이 탐내고 있었다.

“걱정 마. 충분히 이기니까. 골만 못 넣고 있을 뿐이지, 경기 분위기는 우리한테 있어. 최소한 실점은 안 해. 졸리온이랑 파블로도 굉장한 선수들이니까. FA컵은 무조건 잡아야지.”

1871년에 제정된 대회로, 모든 구기 종목 대회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했고, 대부분의 클럽들보다도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대회였다.

이 대회를 포기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에휴. 주장이면 저 안에서 분위기나 잡아줄 것이지, 뜬금없이 왜 쉰다고 해가지고. 다른 친구들 살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일단 우승부터 하고 봐야지.”

두 선수가 오늘 빠진 이유는 간단했다.

일단 먼저 이야기한 성배는 실제로 최근 체력적인 부담을 느끼고 있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뛰어난 실력과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성배와 리차즈에게 밀려 후반 교체 요원이나 가끔 땜빵으로 출전하는 것에 그치는 사발레타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FA컵 우승은 언제든 할 수 있지만, 파블로 정도의 선수를 데려오는 건 쉽지 않아. 만약 우리가 빠졌다고 레딩한테 못 이기면 올라가도 못 이겨.”

벌써부터 유리몸 기질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리차즈의 이탈을 대비해 사발레타는 무조건 묶어둘 필요가 있었다.

그러려면 최소한의 선발 출장 기회를 보장해줘야 했다.

자신의 체력관리와 사발레타의 멘탈 관리를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선택이라고 성배는 생각했다.

“그래, 뭐. 일단은 나도 동조한 거니까.”

콤파니도 성배의 이런 의견에 동의해 함께 빠진 것이었다.

체력관리는 물론이고 선수단 전체의 멘탈을 관리해주어야 하는 만치니 감독 입장에서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사발레타의 태클! 오늘 사발레타 좋은데요? 확실히 좋은 선수예요. 적극적이고 투지도 좋고, 정신력도 좋은 선수죠? 다만, 맨시티의 양쪽 풀백 자리에 주와 리차즈가 있다는 게 불운이네요. 어느 팀에서든 주전으로 활약할 수 있는 선수인데요.”

본래 포지션은 라이트백이지만, 레프트백은 물론이고 중앙 미드필더와 라이트윙으로도 뛸 수 있는 사발레타였다.

그 멀티 포지션 소화능력 덕분에 백업 중에서는 가장 많은 경기에 출전하면서 나름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뛰어난 기량을 가지고 백업에 머물러 있었기에 많은 클럽으로부터 관심을 받는 중이기도 했다.

“역시 스피드는 살아있습니다! 라이트-필립스!”

그리고 수많은 경쟁자들에게 밀려 출전 기회가 거의 사라진 라이트-필립스였지만, 여전히 스피드만큼은 살아있었다.

오랜 공백으로 원툴 플레이어 비슷하게 되어버리기는 했지만, 한 수 아래의 수비수를 맞아 여전히 살아있는 스피드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쳐주고 있었다.

“크로스! 그대로 반대편으로 흐릅니다!”

하지만 확실히 감각이 무뎌지기는 한 모습이었다.

본래 나쁘지 않은 크로스 정확도를 보유한 선수였는데, 이번 크로스는 생각보다 너무 길어서 반대편 측면으로 흐른 것이었다.

“아! 사발레타! 사발레타! 밀어 넣었습니다! 사발레타가 몸을 날려 밀어 넣었습니다! 이번 시즌 본인의 첫 번째 골! 파블로 사발레타!”

어느새 올라온 사발레타가 온 힘을 다해 몸을 앞으로 날리며 발을 뻗었다.

“언제 올라왔나요, 이 선수! 정말 대단한 체력이네요! 마지막에는 몸을 아끼지 않는 다이빙까지! 꽤 충격이 클 것 같은데, 전혀 망설이지 않고 몸을 날리는 저 투지도 굉장하죠!”

인상적인 사발레타의 마무리였다.

골을 만들어낸 부지런한 움직임과 마지막 집중력, 투지도 인상적이었지만, 생각보다 고전하던 경기에서 선취 골을 넣어주었다는 것도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내가 뭐랬어. 우리 안 나가도 충분하다고 했지? 내가 볼 때, 파블로 저 친구는 분명 기회를 잡을 거야.”

자신을 대신해 출전한, 그리고 자신이 추천한 사발레타의 인상적인 득점에 성배의 어깨에도 힘이 들어갔다.

만치니 감독에게 직접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선수라고 몇 차례나 강조한 적이 있을 정도로 성배는 사발레타를 높게 평가했다.

“기회를 잡는다고? 글쎄. 분명 좋은 선수고 우리 벨기에에 저런 선수 있으면 진짜 좋을 것 같다만, 너랑 마이카 때문에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웬만하면 성배의 의견을 받아주는 콤파니였지만, 지금 맨시티의 풀백 라인이 워낙 강력했다.

사발레타는 성배와 비슷한 안정적인 스타일이라면, 리차즈는 성배와 정반대의 폭발적인 스타일이었다.

기량도 기량이지만, 궁합에서도 리차즈가 좀 더 나았다.

“두고 보자고. 파블로 같은 친구는 오래 두고 봐야 알아. 정 못 미더우면 나랑 내기하던가. 이기는 사람이 나중에 클럽 인수할 때 지분 51%. 딜?”

성배가 이렇게까지 확신에 차 내뱉었던 예상은 거의 예언 수준으로 들어맞았다.

콤파니는 자신이 졌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 낭만필드 - 259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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