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258 >
AC 밀란의 전성기를 이끈 수비라인이자 역사에 남을 최고의 수비라인 중 하나인 말네스카 라인.
성배와 함께 아약스에서 말년을 불태운 스탐을 비롯해 네스타를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이 모두 은퇴하며 해체되었다.
이 뒤를 잇는 라인이 얀칼보또.
얀쿨로프스키, 칼라제, 보네라, 오또로 이루어진 이 수비라인은 말네스카 라인의 후계자라 불리며 위기에 빠진 AC 밀란의 수비진을 구원...
“리차즈, 오늘 오른쪽 측면을 초토화시키고 있습니다. 가공할만한 파괴력!”
헛소리고, 전통적으로 강력한 수비진을 자랑했던 AC 밀란의 서포터들이 자조적으로 붙인 별명이었다.
사실 이들은 다들 세리에A 정상급 수비수들이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AC 밀란 이적 이후 기량이 떨어져 예능을 선보이며 팬들이 심장을 부여잡게 했다.
“얀쿨로프스키, 리차즈를 감당해내지 못합니다!”
그나마 그 중 가장 무난한 선수가 얀쿨로프스키였지만, 본인의 엄청난 잠재력을 조금씩 기량으로 녹이기 시작한 리차즈에게는 역부족이었다.
평소였다면 미드필더들이 도와주겠지만, 미드필더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얀쿨로프스키보다 더 괴로운 상황이었다.
“다시 돌아 나와서 중앙의 투레에게. 투레, 반대편으로 크게 돌려줍니다!”
그리고 반대편의 성배 역시 AC 밀란의 오른쪽 측면을 괴롭혀주었다.
아직 수비수로서의 경험이 많지 않은 아바테는 성배와 상극이었다.
“돌파하는 척 속이고 반대편으로! 바로 크로스! 시우바가 먼저 걷어냅니다!”
볼은 가만히 두고 몸만 빠르게 앞으로 움직이며 페인트를 주자, 아바테는 그 움직임에 반응해 중심을 이동시켰다.
뛰어난 피지컬과 반사 신경이 독이 된 것이었다.
아바테의 중심을 무너뜨린 성배는 바로 반대편으로 볼을 옮겨 투레의 머리를 노리는 크로스를 시도했다.
하지만 시우바의 벽을 넘지 못했다.
“측면이고 중앙이고 어디 하나 앞서나가질 못하네요. AC 밀란이 자랑하는 공격수 3인방이 그나마 제몫을 다해주고 있기는 하지만, 맨체스터 시티의 수비진도 나쁘지 않고요.”
총체적 난국.
AC 밀란의 상황은 이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었다.
양 측면 수비수들이 하필이면 상극의 선수들을 만나 힘을 못 썼고, 중원에서는 역시나 예상대로 탈탈 털리는 중이었다.
“주와 리차즈, 풀백들의 공격력이 워낙에 좋다 보니, 오른쪽 윙어 밀너는 중원 장악에 힘을 보태고 왼쪽 윙어 실바는 공격형 미드필더 위치에서 움직이고 있어요.”
성배와 리차즈의 측면 공격이 잘 통하면서 실바와 밀너는 측면 플레이 빈도를 좀 줄이고 다른 곳에 힘을 보태고 있었다.
실바는 AC 밀란 수비와 미드필드 사이의 공간을 제집처럼 드나들었고, 밀너는 공격과 수비, 중원 장악까지 다양한 역할을 해주었다.
“풀백의 능력이 이렇게 중요해요. 본업인 수비는 물론이고 측면 공격에서도 제몫을 다해주니까 양쪽 윙어들이 마음 놓고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주고 있죠.”
성배와 리차즈만으로도 측면 공격이 가능한 덕분이었다.
물론, 실바와 밀너도 측면 플레이를 안 하는 건 아니었지만, 평소보다는 그 빈도를 많이 줄였다.
평소와는 반대로 메인 자리를 두 명의 풀백에게 넘겨주고, 두 사람은 도와주는 역할에 머물렀다.
그리고 AC 밀란의 약점을 공략하기 위해 움직였다.
“AC 밀란도 뭔가 해줘야죠. AC 밀란이 이럴 때 기대할 수 있는 건 결국 즐라탄, 즐라탄의 활약이거든요? 에이스로서 뭔가 보여줘야죠. 자신은 유럽무대에서 약하지 않다고 말했었는데, 이렇게 계속 가면 본인이 아니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요.”
이브라히모비치는 이번에야말로 유럽무대 징크스를 떨쳐내겠다고 했지만, 지금까지는 실패였다.
조별리그에서 네 골을 넣었는데, 옥세르에게 세 골, 아약스에게 한 골을 기록했을 뿐, 강팀인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는 한 골도 넣지 못했다.
팀 전체적인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브라히모비치의 침묵 역시 맨체스터 시티에게 밀리는 이유 중 하나였다.
“이제 기회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즐라탄! 이대로라면 올해도 명예회복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쉽지 않아보였다.
즐라탄은 축복받은 하드웨어에 소프트웨어까지 뛰어난 대표적인 선수였지만, 의외로 하드웨어를 잘 활용하지 못하는 선수였다.
195cm의 축복받은 피지컬을 놔두고 테크닉과 아크로바틱 위주의 플레이를 보여주었고, 이건 기복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즐라탄의 드리블이 또 가로막힙니다!”
인테르, 바르셀로나, 그리고 이번 AC 밀란 시절까지.
체력이 떨어진 후반부터는 경기력이 급격히 하락했다.
즐라탄과 함께 AC 밀란도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
“실바의 절묘한 패스! 테베즈, 슈팅! 아! 멀리 날아갑니다! 어이없는 슈팅!”
그런데 사실 유럽 무대 징크스하면 테베즈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유럽 무대에서 총 27경기에 출전해 6골에 그쳤고, 이번 시즌에는 6경기에서 한 골도 넣지 못했다.
이름값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득점이었다.
“맨체스터 시티가 경기를 주도하고 있긴 하지만, 이제는 골이 필요하거든요?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을 때 골을 넣지 못하면 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요.”
양 팀의 에이스이자 리그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활약하는 두 선수가 모두 유럽무대 징크스에 허덕였다.
자연히 양 팀 모두 득점을 노리기가 힘들어졌다.
맨체스터 시티는 테베즈가 전체 팀 득점의 40% 가까이 관여하고 있을 정도로 공격에서 테베즈에게 의존하는 비율이 높았다.
AC 밀란은 득점 개수는 세 명의 스트라이커가 비슷하지만, 공격작업에서의 비중은 즐라탄이 절대적이었다.
“그나마 테베즈가 유럽 무대에서 부진한 것이 AC 밀란에게 마지막 기회를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맨체스터 시티가 측면과 중원을 모두 장악한 상황에서 테베즈만 제몫을 다 해주었다면 이미 예전에 경기가 기울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테베즈의 부진으로 골이 들어가지 않으면서 밀리는 와중에도 한 골만 넣으면 동률이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AC 밀란도 버티고 있었다.
“투레의 돌진! 페널티 박스에서 슈팅! 네스타! 절묘한 태클로 볼만 건드립니다!”
그리고 네스타와 시우바의 라인 역시 굉장히 단단했다.
예페스를 중앙으로 두고 시우바를 올려서 배치했던 1차전에서 센터백 라인과 중원 모두 장악당하면서 센터백 라인이라도 지키기로 한 알레그리 감독이었다.
그리고 네스타와 시우바 라인은 모든 곳에서 밀리는 와중에도 단단하게 AC 밀란의 뒷문을 지켜주고 있었다.
“실바, 중거리 슈팅! 시우바가 몸으로 막아냅니다! 굉장한 투지! 앞으로 온 몸을 던지면서 막았습니다!”
테베즈의 부진과 네스타, 시우바의 투지.
맨체스터 시티의 득점을 막는 두 가지 요인이었다.
‘에딘이 들어오는 게 차라리 나으려나.’
지난 1차전에서도 골이 나온 건 제코의 투입 이후였다.
네스타와 시우바 모두 제공권에 조금은 애로사항이 있었기에 부진한 테베즈보다는 제코가 나을 수도 있었다.
‘에딘도 제 컨디션이 아니긴 하지만.’
큰 기대를 받으며 입성한 제코였지만, 아직은 리그에 적응하지 못하며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이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일단 가장 큰 문제는 분데스리가와는 다른 프리미어리그의 거친 플레이.
세리에 역시 만만치 않게 거칠었기에 어쩌면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냥 수비나 열심히 해야 하나.’
이게 참 애매했다.
지키기만 해도 8강에 올라갈 수 있는데, 그 차이는 겨우 한 골.
지켜야 할지, 아니면 한 골을 더 넣어야 할지.
어느 쪽에 더 힘을 주고 움직여야 하는지 선택하는 것이 힘들었다.
‘이렇게 애매할 때는 그냥 하라는 대로 해야지.’
확실한 선택지가 있다면 모를까, 아직 이렇게 애매한 순간에 나설 생각은 없었다.
선택한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하는 거니까.
‘에딘이 준비하는구나.’
만치니 감독의 선택은 수비를 굳히는 쪽인 것으로 보였다.
지난 경기에서와 마찬가지로 타겟형 스트라이커인 제코가 준비하고 있었다.
***
“이젠 시간이 없습니다! 플라미니! 이브라히모비치의 머리를 노려 전방으로 한 번에 길게 때려줍니다!”
결국 제코를 투입하며 뒷문을 강화한 맨체스터 시티는 골을 넣지는 못했지만, 실점도 하지 않으며 리드를 계속 지켜나갔다.
이제 진짜 1분도 남지 않았다.
급해진 AC 밀란은 신장에 비해 헤더가 그리 강하지 못함에도 계속해서 이브라히모비치의 머리를 향해 롱패스를 날려주었다.
“보아텡의 클리어! 옆으로 흐릅니다!”
하지만 보아텡과 콤파니의 수비 라인이 그렇게 쉽게 공중 볼을 내줄 리 없었다.
플라미니의 패싱 능력도 그리 뛰어나지 못했으니 이브라히모비치의 머리에 볼을 맞추는 건 쉽지 않았다.
‘이젠 끝이다.’
보아텡의 머리에 맞은 볼이 왼쪽으로 향해 떨어졌다.
성배는 볼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고, 발을 들어올렸다.
“주가 멀리 걷어냄과 동시에 주심의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립니다! 맨체스터 시티, 챔피언스리그 첫 도전에 8강 진출을 이뤄냅니다!”
그리고 성배가 볼을 멀리 걷어찬 순간, 주심의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다.
이걸로 끝이었다.
맨체스터 시티는 세리에A의 명문이자 무려 7회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으로 레알 마드리드에 이어 최다 우승 2위에 랭크되어 있는 AC 밀란을 잡고 8강에 진출했다.
“이번 챔피언스리그를 앞두고 다크호스로 꼽혔던 맨시티거든요? 그래도 챔피언스리그를 병행한 경험과 팀 조직력 부족으로 높이 올라가지는 못할 거라 예상되었었는데, 예상을 뒤엎고 8강 진출에 성공하네요!”
최근 부진했지만, 이번 시즌 세리에A에서 1위 자리를 꾸준히 유지하며 부활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AC 밀란이었다.
그래서 이번 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챔피언스리그 강호라는 이름값에 걸맞게 좋은 성적을 거둘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하지만 16강에서 다크호스 맨체스터 시티를 만나 발목을 잡히면서 명예회복에 실패했다.
“수고했다.”
성배는 이브라히모비치에게 다가가 유니폼을 교환하려 했지만, 이미 콤파니와 교환한 후였다.
1차전에서 세도르프의 유니폼을 득템한 이후, 2차전에는 이브라히모비치의 유니폼을 노렸지만, 안타깝게 실패하고 말았다.
***
“챔피언스리그 8강 진출을 축하드립니다.”
“아, 감사합니다.”
경기 후 인터뷰에 나선 리포터는 첼시였다.
시티즌으로 이미 유명했고, 리그 경기가 아닌 AC 밀란과의 챔피언스리그였기에 대놓고 좋아하고 있었다.
“맨체스터 시티의 실질적인 첫 챔피언스리그 진출이나 마찬가지인데요, 여기서 8강에 진출하셨어요. 기분이 어떠십니까?”
“당연히 더없이 좋습니다. 사실 이번 시즌은 경험을 쌓는다는 느낌으로 챔피언스리그를 대했는데, 좋은 결과가 나오니 더 좋습니다.”
인터뷰 내내 첼시는 성배를 따뜻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지난 여름, 유빈이 덕분에 자주 만나게 된 두 사람은 어느새 서로 감정을 나누는 관계로 발전해 있었다.
성배 역시 첼시의 눈빛에 담담한 눈빛으로 화답해주면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오늘 수고했어. 이기지 못한 건 아쉽지만, 주는 완벽했어.”
인터뷰가 끝난 뒤, 첼시는 라커룸으로 돌아가는 성배에게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여주었다.
“고마워. 응원해준 덕분이지.”
아직 승리의 여운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축하받는 기분은 역시 특별했다.
< 낭만필드 - 25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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