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254 >
“데 용, 왼쪽으로 길게 내줍니다. 실바에게 향하는 볼. 아바테가 그 앞을 가로막습니다.”
AC 밀란의 라이트백은 이냐치오 아바테.
86년생의 젊은 선수인 아바테는 본래 윙어 출신으로 엄청난 스피드가 장점인 선수였다.
하지만 잠브로타의 부상과 오또의 은신으로 라이트백 자원이 사라진 AC 밀란의 상황 때문에 지난 시즌 후반기부터 라이트백으로 양성되고 있었다.
“실바, 화려한 드리블! 볼을 빼앗길 생각이 없습니다! 반대편으로 접으면서 스루 패스! 테베즈에게!”
당연히 수비력에 약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타고난 스피드와 활동량이 워낙 좋아서 딸리는 수비력을 커버했고, 피지컬 위주의 선수들과 붙으면 나름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레알 마드리드와 치렀던 조별예선 경기에서는 호날두를 완벽히 틀어막기까지 했다.
그 이후, 각성한 것인지 한 경기 한 경기 치러질 때마다 빠르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세계 최정상급의 테크니션인 실바를 상대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테베즈의 돌파 시도! 네스타! 완벽한 태클입니다! 돌파를 시도하는 테베즈에게 가볍게 태클을 시도해 볼을 끊어냅니다!”
슬럼프에 빠진 레프트백 안토니니와 경험 부족으로 테크니션에게 고전하는 아바테.
양쪽 풀백이 수비에 고전을 면치 못하는데도 네스타와 예페스, 거의 수비수처럼 내려와 있는 시우바가 버티는 중앙 수비라인은 절대로 실점을 허용하지 않았다.
“역시 네스타! 굉장하네요! 이번 시즌 들어서 노쇠화가 상당히 진행된 모습을 보였는데, 오늘은 거의 전성기에 가까운 플레이를 펼치고 있어요!”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시우바가 가끔 하는 실수를 커버하는 역할을 맡았던 네스타지만, 이번 시즌에는 네스타의 실수를 시우바가 커버하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네스타는 네스타.
지난 레알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다섯 명의 역습을 혼자 막아내는 장판파의 장비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 등 아직 클래스까지 사라지지는 않았음을 보여주었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네스타가 저러면 결국 제공권 싸움밖에 없는 건가.’
네스타의 모습을 보니, 오늘은 돌파나 공간 패스 등을 활용해 발로 골을 노리는 건 무리가 있어 보였다.
차라리 예페스와 시우바의 제공권을 노려보는 쪽이 확률이 높았다.
아무리 네스타가 조율하더라도 직접 할 수 있는 건 아니었고, 시우바는 제공권은 뛰어나지만, 기본적으로 키가 작았으며, 예페스는 네스타보다도 생일이 2개월 더 빠른 선수였다.
‘이탈리아 카테나치오가 왜 짜증 나는지 이제야 알겠어.’
이탈리아의 자랑인 빗장수비, 카테나치오.
분명히 AC 밀란의 공격은 맨체스터 시티의 수비진에 꽁꽁 막혀 있었고, 중원 역시 맨체스터 시티가 장악한 상황이었지만, 골이 터지지 않았다.
‘급하게 움직이다가는 역습을 얻어맞겠지.’
이런 상황이 답답해 성급하게 공격을 시도했다가는 분명 호비뉴와 세도르프를 활용한 역습을 얻어맞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한 골을 실점하게 되면 남은 시간 동안 카테나치오의 정수를 맛볼 것이 분명했다.
‘천천히 하자. 어차피 원정 경기니까 무승부도 나쁜 건 아니야.’
원래 이탈리아의 빗장 수비라는 것이 이런 식으로 상대를 말려서 어떻게든 빈틈을 만들어내는 전술이었다.
그리고 AC 밀란은 노인정이라는 비아냥을 듣지만, 그만큼 경험이 많고 노련한, 한때 세계 최고를 찍었던 선수들이 모여있었다.
만약 선취 골을 빼앗긴다면 그야말로 늪과 지옥을 만나게 될 것이었다.
“서두르지 마! 지금 분위기 좋아! 원정이니까 정 안 되면 비겨도 좋다는 생각으로 뛰라고! 침착하게 우리 할 것만 하면 돼!”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음에도 골이 터지지 않아 조금씩 조급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는 맨시티 선수들이었다.
이쯤에서 분위기를 잡아야겠다고 판단한 성배는 볼이 밖으로 나간 타이밍에 슬쩍 위로 올라가 미드필드와 수비진에 모두 들리도록 소리쳤다.
“오케이! 접수 완료!”
“자, 자! 천천히 가자!”
성배의 외침을 들은 선수들은 다시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시기적절하게 나서준 성배 덕분에 조금씩 빨라지던 맨시티의 호흡이 다시 가라앉았다.
“인터뷰 때, 운 좋게 말 한번 잘해서 주장완장 찬 건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나 보네.”
성배가 한 번 소리쳤다고 팀 분위기가 안정을 찾아가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크게 사고를 한 번 친 이후 테베즈가 조용해지고 아데바요르, 콜로 투레 등 성배가 컨트롤하기 힘든 선수들이 주전에서 빠진 이후 성배의 장악력은 더욱 강해졌다.
이제는 어느 정도 주장의 역할을 흉내 낼 수 있었다.
“운으로 주장완장을 다는 건 좀 힘들지. 그건 밀란도 마찬가지 아닌가?”
전반전부터 꾸준히 만들어오던 기회가 성배의 말 한 번에 사라진 것이 아쉬워 세도르프가 투덜거렸다.
세도르프 정도의 선수에게 팀 장악력을 인정받은 성배는 상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AC 밀란의 주장, 가투소도 상당한 장악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장악력에 비해 너무 많이 떨어진 기량 때문에 정작 본인이 구멍이 되고 있었다.
“에휴, 우리도 물러날 때가 된 건가.”
노인정이라 비아냥은 듣지만, 누가 뭐래도 지금 AC 밀란의 멤버들은 AC 밀란의 황금기를 이끌며 유럽을 제패했던 선수들이었다.
“엄살은. 아직 충분하신데, 뭘.”
그리고 AC 밀란은 여전히 이들을 앞세워 리그 1위를 달리고 있었다.
워낙 뛰어난 선수들이었으니 전성기가 지났음에도 충분한 경쟁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끝물인 거지. 벌써 20대 초반인 선수가 이 정도 레벨의 클럽에서 주장을 맡고 있는데.”
하지만 성배와 콤파니, 보아텡, 리차즈, 실바, 밀너, 제코, 야야 투레, 테베즈, 하트 등 20대 중반의 선수들을 앞세운 맨시티를 상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유럽 축구계도 세대교체가 되어가는 것이었다.
40경기 가까이 치르는 리그에서는 약팀을 잡으며 충분한 경쟁력을 보일 수 있었지만, 정상권 클럽끼리 경쟁하는 토너먼트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
“0-0의 균형이 깨지지 않은 채 어느새 후반전도 중반을 지나 종반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경기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맨체스터 시티는 AC 밀란의 수비를 뚫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 후반전 초중반부터 페이스를 조절했다.
목표는 승리지만, 무승부로 끝나도 크게 나쁠 것 없다는 입장이었다.
“선택권이 맨시티에게 있거든요? 맨시티가 경기를 느리게 진행하고 싶으면 경기는 느리게 진행되는 거예요. 이렇게 되면 오히려 AC 밀란이 급해지죠.”
소속 선수들의 전성기가 끝나는 시점부터 AC 밀란은 강팀과 상대할 때 기본적으로 받아치는 전술을 활용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AC 밀란은 선수비 후역습 전술로 경기를 풀어나갔다.
그래서 맨체스터 시티가 느긋하게 마음을 먹은 순간, AC 밀란의 전술이 꼬여버린 것이었다.
“맨체스터 시티는 무승부만 기록해도 크게 문제가 없지만, AC 밀란은 아니거든요? 여기, 산 시로예요! 산 시로에서 AC 밀란이 무승부로 만족할 순 없죠!”
홈&어웨이 방식으로 펼쳐지는 챔피언스리그 토너먼트에서 다음 라운드 진출을 노리려면 홈경기를 꼭 잡아내야 했다.
COMS에서 펼쳐질 2차전이 남았기 때문에 맨체스터 시티는 여유가 있었고, AC 밀란은 조급했다.
이젠 상황이 뒤바뀐 것이었다.
[IN - 10. 에딘 제코 / OUT - 32. 카를로스 테베즈]
“맨체스터 시티는 이제 전술을 아예 수정했습니다. 테베즈를 빼고 제코를 투입하면서 노골적으로 역습을 노립니다.”
맨시티는 아예 역습을 노리겠다고 전술을 수정했다.
제코의 투입은 그런 의미였다.
만들어나가는 공격의 비중을 조금 줄이고 제코의 머리를 노리는 역습의 비중을 높이겠다는 것이었다.
AC 밀란을 심리적으로 자극하는 교체였다.
‘괜찮은데? 확실히 AC 밀란을 잘 알고 있어.’
맨시티의 감독인 로베르토 만치니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인테르를 이끌고 AC 밀란을 질리도록 상대했던 감독이었다.
인테르와 AC 밀란의 관계가 남달랐기 때문에 상대하는 법을 더 잘 알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나오려나.’
AC 밀란도 이젠 선택을 해야 했다.
적극적으로 득점을 노리기 위한 전술로 바꿔서라도 승리를 노려야지, 그렇지 않으면 무난하게 16강에서 탈락하는 그림이었다.
***
[IN - 7. 알렉산드르 파투 / OUT - 10. 클로렌스 세도르프]
“AC 밀란, 오랜만에 적극적인 공격에 나섭니다. 우르르 밀고 올라오는 AC 밀란, 플라미니가 왼쪽의 호비뉴에게!”
결국, AC 밀란은 경기를 잡아내기 위해 공격적으로 밀고 나왔다.
성배에게 꽁꽁 묶여버린 세도르프를 빼고 부상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파투까지 투입해가며 선취 골을 노렸다.
“호비뉴, 왼쪽 측면 돌파! 리차즈가 따라붙지만, 빠른 크로스!”
호비뉴도 리차즈에게 묶여 큰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그래서 이제는 리차즈가 붙기 전에 빠르게 볼을 처리하고 있었다.
“아, 아무도 뜨지 못합니다! 반대편으로 흐르는 볼!”
하지만 리차즈의 수비를 떨쳐내는 것만 생각하다가 동료들의 상황을 보지 못한 크로스였다.
중앙의 이브라히모비치가 어떻게든 머리를 가져다 대보려 했지만, 보아텡과 콤파니의 견제에 점프조차 하지 못했다.
호비뉴의 크로스는 그대로 그라운드를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흘렀다.
‘왔다.’
반대편으로 흐른 볼은 성배의 앞으로 날아왔다.
득점을 노리느라 AC 밀란 수비라인도 전체적으로 올라온 상황이었다.
볼이 자신의 앞으로 흐른 순간, 성배는 빠르게 그라운드를 훑어 AC 밀란의 상황을 확인했다.
“앞으로 크게 치고 달립니다! 주! 빠르게 올라갑니다!”
성배의 앞에서 볼이 한 번 바운드되었다.
그리고 성배는 왼발 인사이드로 볼을 멀리 차 놓은 뒤, 빠르게 달려나갔다.
“파투가 막아보려 하지만, 먼저 빠져나갑니다!”
부상으로 지난 시즌을 거의 통째로 날리면서 돌파형 스트라이커에서 전형적인 골 사냥꾼으로 스타일을 바꿔야 할 정도로 신체 능력이 떨어진 파투였다.
게다가 지금은 얼마 전에 입은 가벼운 부상이 회복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파투를 제치고 계속해서 달려나가는 주성배! AC 밀란, 위기입니다!”
어딘가 불편한 모습으로 달리는 파투를 간단히 제쳐낸 성배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AC 밀란 진영을 향해 달렸다.
이번에는 반대로 맨체스터 시티가 수비 후 역습을 노리는 상황이었다.
맨시티 공격수들은 성배의 인터셉트와 동시에 앞으로 뛰었다.
“이제 패스해야죠! 주가 아무리 빠른 선수여도, 사람보다는 볼이 빨라요!”
성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려 어느새 하프라인을 넘어섰다.
호비뉴의 어설픈 크로스는 성배에게 넘어와 절호의 역습 찬스를 만들어주었다.
“앞으로 길게! 실바! 실바! 실바!”
왼쪽 측면에서 중앙을 향해 대각선으로 빠르게 올라가는 실바의 모습이 보였다.
성배의 왼발 패스는 실바의 앞쪽 공간으로 향했다.
네스타가 옆에서 함께 달리고 있었지만, 노쇠한 네스타의 스피드로는 실바와 경쟁할 수 없었다.
“아비아티, 뛰쳐나오고! 실바, 바로 슈팅!! 골! 골입니다! 다비드 실바! 주의 패스를 논스톱 슈팅으로 이어가며 선취 골을 만들어냅니다!”
라인을 끌어올린 AC 밀란의 뒷공간을 정확히 노린 성배의 롱패스와 실바의 절묘한 침투가 빛을 발한 득점이었다.
< 낭만필드 - 25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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