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253 >
“즐라탄이랑 호비뉴만 막으면 쉽게 이긴다고 봐야지. 두 사람만 잘 막으라고.”
AC 밀란의 최대 장점이라고 한다면 역시 호비뉴와 이브라모비치가 버티는 공격진에 있었다.
가투소, 피를로 등이 부진과 부상, 노쇠화로 예전 같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는 중이고, 자랑거리이던 수비진 역시 예전 같지 않았다.
그나마 살아남은 부분은 이브라히모비치와 호비뉴, 파투의 공격진이었다.
“호비뉴야 요즘 잘하고 있다고 해도 못 막을 선수는 아니고, 즐라탄은 굉장한 선수긴 하지만 어차피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징크스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잖아요? 하하, 너무 긴장하지 말자고요.”
가장 먼저 리차즈가 입을 열었다.
AC 밀란의 가장 위협적인 선수 중 한 명인 호비뉴를 막아야 할 선수였다.
“그래. 선수라면 그 정도 자신감은 있어야지. 보기 좋네.”
호비뉴는 지난 시즌까지만 하더라도 맨체스터 시티에서 함께 뛰었던 선수였다.
맨시티 선수들은 호비뉴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고, 리그 정상급 풀백을 향해 순조롭게 성장 중인 리차즈가 호비뉴를 막아내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좋지만, 즐라탄을 상대할 땐 절대로 방심하지 마. 챔피언스리그만 오면 왜 그렇게 약해지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엄청난 친구인 건 분명하니까.”
만치니 감독은 인테르 시절 이브라히모비치를 이끈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인테르 시절부터 이브라히모비치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만치니 감독이 이브라히모비치를 경계하는 것도 당연했다.
“걱정하지 마시죠. 즐라탄도 굉장한 선수지만, 뱅상이랑 제롬이라면 충분히 막아줄 수 있을 겁니다.”
이브라히모비치를 향한 만치니의 경계는 좀 과한 감이 있었다.
물론, 이브라히모비치는 아무리 경계해도 과함이 없을 선수이긴 했다.
하지만 감독이 그런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었다.
성배는 콤파니와 보아텡을 띄워주며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그러면서 만치니에게 눈치를 주었다.
“아. 그건 당연한 이야기지. 뱅상이랑 제롬이 요즘 보여주는 모습이면 즐라탄이라고 해도 그렇게 무섭진 않으니까. 다만, 신경은 좀 쓰란 말이지.”
성배의 뜻을 이해한 만치니는 그런 뜻이 아님을 어필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이브라히모비치는 엄청난 선수이지만, 맨체스터 시티의 수비진과 미드필드진이라면 충분히 해볼 만했다.
“믿으면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신경 쓰겠습니다.”
콤파니와 보아텡에게도 좋은 기회였다.
최근 콤파니가 많이 성장해 좋은 평가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그래도 리그 정상급 정도라는 평가였다.
보아텡은 더했다.
아직은 훌륭한 유망주 정도라는 평가를 받으며 검증을 받는 중이었다.
만약 이브라히모비치를 인상적으로 막아낼 수만 있다면 두 선수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마이카. 호비뉴를 막는 건 당연한 거고, 안토니니 정도는 가볍게 바를 수 있겠지?”
AC 밀란 수비진의 가장 큰 약점이라 할 수 있는 선수가 레프트백 안토니니였기 때문에 리차즈의 역할이 꽤 중요했다.
그리고 리차즈는 씨익 웃어보이며 자신감을 표현했다.
꽤 믿음직스러웠다.
***
“아, 플라미니! 이건 무슨 패스인가요? 상대팀인 배리에게 볼을 헌납하네요.”
맨체스터 시티가 경기를 준비하면서 가장 신경 썼던 부분은 이브라히모비치에 대한 수비였다.
전문가들이 이 경기의 핵심을 중원에 둔 것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간단했다.
“역시나 예상대로 맨체스터 시티가 중원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AC 밀란의 홈에서 경기가 펼쳐지고 있지만, 경기의 주도권은 맨시티에게 넘어왔습니다.”
맨체스터 시티와 만치니 감독은 AC 밀란의 중원을 압도할 자신이 있었다.
자신감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피를로가 부상으로 빠졌고, 나이가 들면서 평범해진 가투소에 열심히 뛰지만 축구 지능에서 문제점을 보이는 플라미니로 구성된 AC 밀란의 중원이었다.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장악력을 자랑하는 맨시티의 중원이 이들을 압도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배리, 실바에게 패스합니다. 실바, 아바테를 상대하는데! 가투소의 태클! 파울입니다! 가투소, 태클이 거칠었습니다.”
피를로와 암브로시니가 부상당하면서 중원에 구멍이 뚫린 AC 밀란은 어떻게든 버텨보겠다는 생각으로 치아구 시우바를 미드필더로 투입했다.
시우바는 미드필더로도 좋은 활약을 보여주는 선수였지만, 역시 센터백으로 뛸 때보다는 못했다.
“가투소, 오늘 플레이가 너무 거친데요? 맨시티 미드필더들과의 대결에서 계속 밀리면서 너무 흥분했어요.”
결국, 중원을 완전히 장악당한 AC 밀란이었고, 이에 흥분한 가투소는 연달아 거칠고 무리한 플레이를 일삼았다.
중원싸움에서 완벽히 밀린 지금, 거친 플레이를 통해 조금이라도 장악력을 회복하려는 선택은 옳았다.
하지만 가투소의 플레이는 그 수준을 넘어가 있었다.
“위험한 위치에서 프리킥입니다. 프리킥을 처리하기 위해 주가 올라옵니다.”
실바는 플레이 성향 상 페널티박스 외곽라인 모서리 즈음에서 서있었기 때문에 직접 슈팅까지는 좀 힘들어도 위협적인 크로스를 올려줄 수 있는 위치에서 프리킥을 얻어냈다.
데뷔전에서 골을 넣은 제코가 순조롭게 적응하고 있기는 했지만, 일단 원정 경기였기 때문에 오늘은 시즌 초반의 수비적인 포메이션을 꺼내든 맨시티였지만, 그래도 제공권이 약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AC 밀란 수비진의 세트피스 수비력은 나쁘지 않거든요? 네스타가 선수들의 자리를 잡아주고, 시우바와 예페스가 몸으로 부딪혀주면 공중에서 이를 뚫어내기는 참 힘들어요.”
고질적인 등부상과 노쇠화로 인해 전성기 시절의 말도 안 되는 점프력을 잃은 네스타지만, 그 자신의 제공권은 좀 떨어졌어도 동료들의 자리만큼은 확실하게 잡아줄 수 있었다.
시우바는 그 혼자서도 충분히 벽이 될 수 있는 선수였고, 예페스는 네스타의 조율이 있으면 괜찮은 수비를 보여주었다.
‘반대편으로 길게 넘겨줘야 하나.’
수비수 등 뒤로 돌아 반대편으로 침투하는 선수에게 넘겨주는 프리킥은 성배가 애용하는 프리킥 루트였다.
상대적으로 제공권이 밀린다 판단되었을 때 주로 활용했다.
지금도 어쩌면 그 방법이 나을 수 있었다.
“반대편으로 크게! 네스타가 미리 예측하고 끊어냅니다!”
AC 밀란의 제공권이 부담스러워서 반대편으로 크게 돌렸지만, 네스타의 예측 수비에 막혔다.
피지컬 대결을 시도하면 다른 선수들을 활용해서, 허를 찔러보려고 하면 자신이 직접 막아내는 수비.
네스타는 왜 자신이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으로 꼽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냥 다음부터는 피지컬 경쟁을 붙여야겠네.’
이번 플레이 한 번으로 성배는 네스타에게 머리로 싸움을 거는 것보다는 예페스와 시우바를 상대로 피지컬 대결을 시도하는 쪽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경기 주도권은 절대 빼앗기지 않겠지만, 골을 넣는 것도 생각보다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플라미니, 전방으로 길게 넘깁니다! 이브라히모비치에게! 발밑으로 잡아놓고 등지고 버팁니다.”
경기 시작 이후 시간이 꽤 지난 상황이었지만, 이브라히모비치는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호비뉴도 마찬가지였다.
AC 밀란의 공격은 파투를 더해 세 선수 중 한 명만 없어도 돌아가지 않았고, 파투는 부상, 호비뉴는 리차즈에게 막히고 이브라히모비치는 부진하면서 공격이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브라히모비치, 돌아서려 시도! 아! 하지만 밀려 넘어지고 휘슬 울리지 않습니다! 콤파니의 멋진 태클! 볼 빼냅니다!”
이브라히모비치가 평소의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경기력이 못 봐줄 정도는 아니었다.
즐라탄이어서 아쉬운 것이지, 경기력 자체는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 정도로는 물이 오른 콤파니, 보아텡 라인을 뚫어낼 수 없었다.
리그에서의 즐라탄이라면 아직 완벽하게 만들어지지 않은 이 라인을 뚫어낼 수 있었겠지만, 챔피언스리그의 즐라탄은 좀 다른 선수였다.
“아, 즐라탄도 사람이거든요? 호비뉴와 세도르프가 도와주지 않으면 혼자서 득점을 만들어내긴 힘들어요!”
그리고 눈에 띄지는 않지만, AC 밀란 공격 전개의 핵심인 세드로프가 지워졌다는 것도 큰 타격이었다.
‘하늘이 낳은 천재’, ‘20세기 최후의 천재’
타고난 축구 지능과 전술 이해도로 중원과 공격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해주는 세도르프의 별명이었다.
“하프라인 부근에서 볼을 잡은 밀란, 이번에는 천천히 만들어나갑니다. 오른쪽의 세도르프에게. 세도르프, 지금 밀란이 믿을 수 있는 선수는 세도르프밖에 없습니다!”
세도르프는 축구지능과 센스, 전술 이해도가 굉장하고 패싱, 슈팅, 드리블, 체력 어느 하나 부족한 부분이 없었다.
그래서 미드필드의 모든 포지션을 세계 정상급으로 소화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선발로 출전해서 언제나처럼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면서 승리를 이끌어 체력을 보전해주기 위해 교체시키고 나서 보니 활동량이 661’m’인 경우도 있었다.
6.61km가 아니라 661m였다.
활동량이 많기로 유명한 박인진의 평균 활동량은 12에서13‘km’.
이것의 5% 수준이었다.
“아, 양옆의 공간을 차단하고 달려드는 주성배! 세도르프, 옆쪽으로 돌파를 시도하는데! 아! 사이드라인 아웃! 주가 태클로 볼을 내보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된 이유는 역시 노쇠화로 떨어진 신체능력 때문이었다.
661m만 뛰어도 팀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선수였지만, 6km를 뛰면 팀에게 우승을 안겨줄 수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었다.
“주는 세도르프의 피지컬이 많이 떨어졌다는 것을 알고 농구처럼 양팔을 뻗어 드리블 코스를 모두 차단하며 달려들었어요. 불안정한 자세인데, 저런 자세로도 잠깐은 버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거죠.”
원래부터 세도르프는 피지컬이 좋은 선수가 아니었다.
축구 지능과 센스, 전술 이해도를 장점으로 하는 선수였고, 피지컬은 전성기 때도 지금의 성배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35세에 그 정도 해주는 건 분명 대단하지만. 피지컬이 그 정도로 떨어지면 답이 없지.’
성배도 양팔을 뻗은 불안정한 자세로는 오래 버틸 수 없었지만, 잠깐만 버텨도 태클을 통해 걷어낼 자신이 있었다.
세도르프는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준수한 활약을 보여주었는데, 이번 시즌에는 강팀이나 뛰어난 수비수를 만나면 지워지는 경우가 많아졌다.
하락하던 피지컬이 결국 한계치 아래로 내려간 것이었다.
‘나도 서른다섯까지 버틸 수 있으려나.’
세도르프의 모습은 어쩌면 자신의 미래일수도 있었다.
피지컬이 아닌 축구 지능을 바탕으로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오른 선수들은 피지컬 위주의 선수에 비해 기복도 적고, 롱런할 가능성도 높지만, 피지컬이 최소한도 이하로 떨어지면 무력해졌다.
‘그 전까지 충분히 업적을 쌓아야겠어.’
아무래도 흑인인 세도르프에 비해 동양인인 성배의 노쇠화가 빨리 이뤄질 가능성이 높았다.
챔피언스리그 4회 우승과 1회 준우승을 경험한 레전드, 세도르프.
지금은 성배도 그 정도 업적을 노릴 수 있는 위치였다.
‘시간이 갈수록 욕심만 많아지네.’
전생에서는 물론이고, 처음 과거로 돌아왔을 때도 생각조차 않았던 목표였다.
성배가 그만큼 성장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 낭만필드 - 25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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