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234 >
“이거 와인이에요. 비싼 건 아니지만, 나름 유명한 와인이라 품질이 좋아요.”
성배로부터 유빈이에게 조언을 해달라 부탁받았던 첼시는 며칠 뒤 성배의 집에 초대받았다.
이제 얼마 뒤면 선수단 휴가가 끝나고 프리 시즌에 돌입하기 때문에 시간이 별로 없어 서두른 감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살짝 무리한 부탁이라고 생각했는데 초대에 응해준 것도 고맙습니다.”
사실, 시즌이 치러지지는 않지만, 오히려 이런 비시즌이 칼럼니스트에게는 더 중요했다.
시즌 중에는 각 팀의 경기력을 분석하고 경기 내용에 대한 칼럼을 쓰는 것이 전부였다.
이것도 꽤 머리를 써야 하는 내용이었지만, 어느 정도 축구 보는 눈이 있다면 쓸 수 있는 칼럼이었다.
하지만 비시즌에는 수많은 이적설의 성사 가능성을 파악해야 하고, 선수 보강 상황에 따라 각 팀의 다음 시즌 성적을 예상하는 등 시즌 중보다 더 많은 조사와 생각이 필요한 칼럼을 써야 했다.
그리고 그런 칼럼들이 칼럼니스트의 역량을 평가하는데 크게 작용했고, 무엇보다 비시즌 동안 심심해진 팬들의 관심을 더 많이 끌어들일 수 있었다.
“아니에요. 사실, 주와는 한 번 식사자리를 가지고 싶었어요.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시티의 최고 스타니까요. 히히.”
그런 의미에서 따로 친분이 깊은 것도 아닌 데다가 선수 본인도 아닌 선수의 여동생을 위해 시간을 내어준 것은 성배가 고마워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자주 만날 수밖에 없고, 파티에서도 종종 만나는 사이라 팬이라고 하더라도 쉽지는 않은 일일 터였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요. 자, 들어오시죠. 보답이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클럽에서 고용해준 셰프의 실력이 참 기가 막히거든요. 음식은 마음에 드실 겁니다.”
계약에는 없는 개인적인 초대라 추가 비용을 부담해야 했지만, 그런 만큼 식사의 퀄리티가 제대로 뽑혔다.
어쨌든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사람과의 식사 자리인 만큼, 성배도 나름 신경을 썼다.
“저를 위해 그렇게까지 해주셨다니, 감동인데요? 저 맛있는 거 엄청 좋아하거든요.”
음식이 맛있다는 소리에 활짝 미소 짓는 첼시의 모습은 준비한 사람을 뿌듯하게 해주는 힘이 있었다.
빼어난 외모 외에도 리포터로서 큰 인기를 얻은 이유 중 하나가 보는 사람을 미소 짓게 하는 특유의 분위기라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아, 마지막으로 이게 제일 중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영국 대학들은 칼리지라는 개념이 굉장히 강해. 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아! 영화 [해리 포터] 봤어? 거기 기숙사들 나오잖아. 그 기숙사들이 하나의 칼리지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첼시가 가져온 디저트 와인을 앞에 두고 대화를 이어갔다.
식사가 끝났는데도 첼시와 유빈의 대화는 끝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서로 격식을 갖춰 대화하던 두 사람은 어느새 십년지기라도 되는 것처럼 시시덕거리며 대화를 나누었다.
여자가 셋이 아니라 둘이라서 접시는 지킬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둘 다 성격 참 좋아.’
전생과는 달리 철이 들었으면서도 나이에 맞는 발랄함과 나이에 맞지 않는 천진함을 지켜낸 유빈이의 성격은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의 변화 덕분이라는 생각에 뿌듯했다.
그리고 TV와 인터뷰 자리에서는 볼 수 없었던 첼시의 모습은 신선한 충격이었으며, 기분 좋은 놀라움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너한테 어울리는 칼리지에 속해야 해. 건축처럼 배타적인 학문이라면 선택지가 별로 없겠지만.”
영국 대학은 대부분 학료제를 운영하고 있었다.
흔히 ‘영국 대학’ 하면 떠올리는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도 한국의 대학들처럼 하나의 대학이 아니었다.
옥스포드는 그 밑에 38개의 칼리지를 두고 있었고, 케임브리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맞아요! 저도 유학 결정하고 여러 군데에서 알아봐서 알고는 있었는데, 정확히 어떤 개념인지 몰라서 고민이었거든요. 첼시 이야기를 들으니까 확실히 알겠어요!”
확실히 유학 준비를 많이 했는지 유빈이의 영어는 군데군데 어색한 부분도 있고 발음도 어색했지만, 회화에 문제는 없을 정도였다.
전생의 자신보다는 조금 나은 수준인 듯했다.
“재밌네요. 대학생활을 해본 적이 없어서 아예 모르는 이야기였는데.”
칼리지라는 말만 들어서 한국의 전문대 비슷한 느낌인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니었다.
첼시의 설명처럼 호그와트의 기숙사와 비슷한 역할이었다.
숙식 및 사교활동을 컬리지에서 제공하고, 칼리지의 기숙사와 식당, 도서관 등을 같은 대학 다른 칼리지 소속 학생이 이용하려면 허가나 초대가 필요했다.
다른 기숙사 소속이지만, 같은 교수에게 같은 강의실에서 수업을 들으며 지도 교수와의 교육은 같은 기숙사 소속 학생들끼리만 이루어지는 호그와트의 교육 시스템을 떠올리면 얼추 비슷했다.
칼리지의 지도 교수 수준과 선배들의 위상, 재력 등은 학부생들에게 굉장히 중요했다.
멘토에게 받을 수 있는 교육의 질과 도움의 정도, 칼리지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는 기숙사비, 식비, 등록금, 장학금, 연구 지원금 등의 수준 차이가 크기 때문이었다.
“보통 외국인들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 유명한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이 런던 대학교의 일원이라고 하면 다들 깜짝 놀라요.”
종합 대학의 이름이 더 유명한 옥스포드나 케임브리지와는 다르게 런던 대학교는 각 단과 대학의 이름이 더 유명했고, 순위도 따로 매겨졌다.
본관이 없는 연합체의 명칭에 불과한 건 런던이나 옥스포드, 케임브리지 모두 마찬가지였지만, 옥스브리지가 중앙집권의 느낌이라면 런던은 연방정부의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UCL)이나 런던 정치경제대학교(LSE) 등은 그들만으로도 영국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학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매년 발표하는 영국 대학 랭킹에서 옥스브리지가 1, 2위, 다음 순위가 UCL, LSE, 얼마 전 런던 대학교에서 탈퇴한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이었다.
“첼시! 정말 고마워요! 오늘 해준 말들이 정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유빈이에게는 정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었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녀도 확 바뀔 환경에 불안한 게 사람인데, 아무리 여기저기서 알아봤다고 하더라도 아예 다른 나라에 다른 교육 제도인 영국 대학생활이 불안하지 않을 리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첼시의 도움은 유빈이에게 단비와도 같았다.
“아니야. 좋은 친구가 생긴 것 같아서 나도 기분 좋았어.”
감정을 보여주는 일에 익숙한 사람이라 보이는 대로 믿을 순 없겠지만, 그래도 일단 보이기에는 첼시 역시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성배도 그나마 빚을 졌다는 느낌을 덜 수 있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나중에 꼭 제가 보답할게요. 좋은 소식 있으면 제일 먼저 연락하는 건 당연하고.”
첼시는 칼럼니스트지, 기자가 아니지만, 칼럼 역시 가끔은 속도가 생명일 때도 있었다.
최근 들어 조금씩 주목받기 시작한 벨기에 국가대표팀의 주장이자 프리미어리그의 가장 핫한 클럽 맨체스터 시티의 핵심 선수인 성배라면 제공하는 그 소식 역시 엄청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에이, 그걸로 끝내려구요?”
하지만 첼시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자신이 주는 정보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성배는 티를 내진 않았지만 내심 당황했다.
“헤헤, 나중에 식사나 한 번 같이 해요. 꽤 많은 도움을 준 것 같은데,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죠?”
하지만 이어진 첼시의 말에 성배는 허탈하게 웃었다.
정확한 나이는 잘 모르지만, 자신보다 몇 살은 더 연상인 첼시의 미소는 참 꾸밈이 없었다.
“오, 오오! 첼시! 적극적인데요? 의외의 모습!”
옆에서 유빈이가 더 난리였다.
그저 밥이나 한번 먹자고 했을 뿐인데, 벌써 새언니라도 된 것처럼 꺄악대고 있어 시끄러울 정도였다.
“야, 조용히 안하냐. 시끄러워.”
입술을 꼬집는 성배에 대한 반항으로 유빈이가 혀를 내밀어 손을 핥았다.
성배는 순간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손을 뗐고, 첼시는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사이가 참 좋네요. 전 형제가 없어서 이런 모습이 참 부러워요.”
보기 좋다고 말하는 첼시였지만, 반대로 성배와 유빈은 멋쩍어져서 그냥 웃었다.
“부러울 것도 참 많네요. 어쨌든 언제 한 번 제대로 대접할게요. 나중에 한 번 봐요.”
첼시와의 식사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매력적이고 참 착한 사람이었다.
아직은 연애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지만, 그렇다고 굳이 억지로 밀어낼 필요는 없었다.
생각이라는 건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이니까.
***
“올, 오빠! 완전 대박! 대박이야! 저렇게 예쁜 언니가 지금 오빠한테 데이트 신청한 거 맞지? 와우!!”
첼시가 떠난 후, 아주 난리가 났다.
유빈이는 연신 대박을 외치며 이미 첼시와 성배가 만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댔다.
“에휴, 아기네, 아기. 밥 한번 먹는다고 만나는 거면 세상 남자 절반은 카사노바겠다. 그리고 네가 내 위치를 잘 모르나 본데, 파티 가면 TV 틀면 나오는 유명 연예인이나 모델 중에서도 나랑 이야기라도 해보고 싶어하는 사람들 많아. 내가 그 정도라고.”
잉글랜드에서 프리미어리그 스타 선수란 그 정도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연예인이나 모델의 위상이 낮은 건 절대 아니었지만.
탑클래스 중에서도 성배와 만나보고 싶어하는 경우가 많았고, 어중간한 A급 정도만 되어도 성배와 만나 스캔들이라도 내고 싶어하는 여자 연예인들이 많았다.
“와, 난 그거 반댈세! 첼시! 첼시! 첼시가 어때서!”
고작 한 번 만나서 밥 한번 먹었을 뿐인데 어느새 열렬한 첼시의 지지자가 된 유빈이었다.
성배는 성인이 된 유빈이가 어디 가서 나쁜 남자한테 홀딱 반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지는 않을까 싶어 갑자기 걱정이 몰려왔다.
“겨우 한번 만난 주제에 벌써부터 팬이 된 거야? 와, 유빈이 큰일 났네. 사람을 그렇게 쉽게 좋아하고 믿으면 나중에 크게 당한다, 요 녀석아.”
성배의 잔소리에 유빈의 입이 또 한 번 길게 나왔다.
그리고 그 입을 손잡이처럼 잡는 성배의 손을 핥아서 다시 빠져나온 유빈이 말을 이었다.
“에이, 그 언니 분명 좋은 사람이라니까?”
“그러니까 한 번 보고 그걸 어떻게 알아. 물론, 좋은 사람인 것 같기는 하지만, 자주 본 나도 확신하지 못하는데.”
모든 사람은 이익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곳에서 만나면 다 좋은 사람이었다.
조폭이나 범죄자도 주변 사람에게는 좋은 사람이었다.
“에이, 좋은 사람인 것 같으면 한 번 만나봐! 그래야 제대로 알지. 저 언니 분명 오빠한테 호감 있다니까?”
유빈의 말도 맞는 말이었다.
지금 말했던 것처럼 제대로 알려면 자주 만나봐야 했고, 성배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만나보는 것도 괜찮다 생각했다.
“알아.”
그리고 성배는 첼시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사실 성배의 위상과 능력, 외모 등 모든 면이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했지만.
“오빠도 호감은 있잖아?”
“응. 맞아.”
성배 역시 첼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능력도 뛰어나고 밝은 성격에 편안한 분위기, 그리고 외모 역시 뛰어난 첼시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와! 그럼 만나봐! 대박, 오빠 여자친구 생기는 거야? 음? ... 그럼 나 기숙사 가야 하는 거야?”
신나서 방방 뛰다가 갑자기 풀이 죽어 자신의 눈치를 보는 유빈이었다.
그 모습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귀여워서 성배는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유빈아. 호감이라는 건 생각보다 참 별거 아닌 감정이야. 사실 세 명 정도의 이성을 만나면 그중 한 명에게는 느낀다고 해도 될 정도로 흔하기도 하고. 거기서 발전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보통은 호감에서 다 끝나는 거야.”
유빈이의 머리를 헝클면서 말했다.
좋은 여자인 것 같다, 는 생각 정도로 가슴이 떨릴 만큼 어리지 않았다.
겉으로 보이는 나이와 달리, 호감이란 감정이 생각보다 약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는 나이였다.
< 낭만필드 - 23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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