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232 >
“나 나간다. 공부 열심히 하고, 맛있는 것도 사 먹고 해.”
어느새 유빈이가 잉글랜드에 들어온 지도 한 달 가까이 지났다.
쇼핑에서 돌아와 저녁을 먹었을 때, 성배에게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등짝을 후려쳤던 유빈이도 잉글랜드 생활에 적응한 상황이었다.
“알았다니까? 와, 진짜 엄마보다 더하다. 엄마도 이렇게 잔소리는 안 했어.”
학기가 시작될 때까지는 대략 두 달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고, 유빈이는 그때까지 어학원과 도서관에 다니면서 학교생활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불안한 성배는 항상 나갈 때마다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알았어, 알았어. 안 하면 되잖아. 그래도 불안한 걸 어떡하냐. 알아서 잘 다니겠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다녀.”
마음 같아서는 어린아이의 보호자들처럼 차로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는 생활을 한두 달 정도 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성배도 너무 바빴다.
시즌 종료 후 충분히 쉬었다고 판단, 2주 정도 전부터 다시 운동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네, 네. 알겠습니다. 빨리 들어오기나 하시지요.”
만수르 부임 이후 확 바뀐 맨체스터 시티 클럽하우스에서 체력 위주로 가볍게 운동을 시작한 상황이었다.
리그에만 집중했던 이번 시즌과는 달리 다음 시즌부터는 챔피언스리그도 병행해야 했고, 경기 내에서의 체력은 좋지만, 시즌을 끌고 가는 체력이 평범한 수준이라는 약점을 극복할 필요가 있었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그럼 공부 열심히 하고 계시지요.”
집을 나선 성배는 얼마 전 구입한 랜드로버의 프리미엄 모델, 레인지 로버에 올라탔다.
길거리에 기름을 뿌리는 차량이었지만, 그 정도는 뭐,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격에 비해 품질도 아쉽긴 했지만, 성배의 취향은 잘 빠진 쿠페나 슈퍼카보다는 SUV 쪽이었다.
***
“안녕하세요. 수고하십니다.”
클럽하우스에 도착한 성배는 입구를 지키는 관리인 조나단에게 인사를 건넸다.
모든 직원도 당연히 시티즌이었기에 이들 역시 ‘Prophet’ 성배에게 넘치는 애정을 보내주고 있었다.
성배가 마주칠 때마다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네주니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늘도 운동하러 오셨습니까?”
“예, 그렇죠, 뭐.”
지나가는 직원들 모두 성배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성배는 그런 직원들 모두에게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덕분에 클럽의 모든 관계자가 성배에게 호의를 보내주었다.
클럽 내부에서뿐 아니라 언론, 나아가 팬들에게까지 성배의 이런 평소 태도가 알려졌고, 성배의 이미지를 한층 더 훈훈하게 해주었다.
“아직 휴가도 2주 정도 남았을 텐데, 부지런하십니다. 하하. 역시 그렇게 하니까 그 정도 활약을 해주시는 거겠죠?”
성배는 살짝 미소 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직원들에게 웃으며 한마디 인사를 던져주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축구와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지만, 자주 얼굴을 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직원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는 언론이 많았다.
고작 1, 2초를 투자해 직원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남겨줄 수 있다면, 쉽게 좋은 이미지를 만들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날씨가 참 좋은데 훈련장에서 또 뵙습니다.”
훈련장에 도착한 성배는 피지컬 코치에게 인사를 건네고 옷을 갈아입었다.
흔히 활동량으로 이야기되는 경기 중의 체력이 아니라 한 시즌을 버틸 수 있는 체력을 만들기 위한 운동이었기에 격한 유산소 운동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일반인들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 운동량이었다.
“느낌은 어때? 잘 만들어진 것 같아?”
신체 능력 향상의 목적이 아니라 시즌을 위한 몸을 만들 목적이었기에 피지컬 코치가 따로 도와줄 부분은 없었다.
유망주나 어린 선수들은 피지컬 코치의 지도대로 운동하지만, 어느 정도 경력이 쌓인 베테랑들은 그 경험을 존중해 특별히 터치하지 않았다.
사실, 원래는 피지컬 코치의 지도를 받아야 했지만, 나이답지 않은 성배의 노련함을 높게 평가하는 맨시티 코치진은 성배에게 전혀 터치하지 않았다.
“뭐,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그렇다고 막 날아갈 정도로 좋은 것도 아니고 그냥 평범하네요. 그래도 지난 시즌 시작할 때 정도는 되는 것 같으니 크게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 시즌을 이끌어가는 체력이라는 건 쉽게 보완되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보통 이 부분은 타고난 능력이 절대적이었고, 운동을 통해 보완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비시즌 기간에 준비하지 않으면 시즌 중에 무너지는 것이었고, 준비를 해야 겨우 타고난 만큼의 양을 수행할 수 있었다.
“뭐 그렇겠지. 그래도 열심히 운동하면 조금씩이라도 좋아지니까 초조해하지 말고 천천히 운동해.”
성배에게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지금 해주는 말도 성배라면 다 알고 있을 거라 확신했고, 말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럴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참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뭐, 잘 알고는 있었지만 말이죠.”
한 시즌에 60경기 가까이 소화하면서도 매 경기, 그리고 시즌이 끝날 때까지 뛰어난 경기력을 유지하는 선수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지도 않았다.
흔히 금강불괴라 불리는 그들.
타고난 능력치가 높은 그들에게는 항상 부러움을 느꼈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신체능력을 타고난 친구들도 다 너보다 밑에 있는데? 네가 타고난 그 능력도 엄청나다는 거지.”
어깨를 한번 으쓱인 성배는 계속 운동에 집중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런 종류의 운동은 정말 지루했지만, 이런 것도 다 자기관리였고, 성배는 자기관리에 절대 소홀하지 않았다.
***
“주입니다. 부르셨다고 들었는데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한창 운동에 열중하던 성배는 만치니 감독의 부름에 운동을 마치고 감독실을 찾았다.
운동 후 샤워를 마치고 딱 집에 들어가서 쉬고 싶었지만, 특별한 일도 없는데 감독의 부름을 무시할 순 없었다.
“역시 부지런하네. 카를로스가 주를 반만 닮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만치니 감독은 휴가 중인데도 불구하고 굳이 훈련장에 나와 운동한 뒤, 막 샤워를 마친 성배의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축구를 직업으로만 생각해 정해진 경기 및 훈련 시간 아니면 운동과 담을 쌓고 사는 몇몇 선수들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카를로스가 부러운데요. 저도 그렇게 타고난 능력들이 많았으면 이렇게 안 합니다.”
감독 입장에서는 당연하겠지만, 성배는 오히려 그런 선수들이 부러웠다.
매년, 매달, 매일, 매시간 절제하고 계산해서 관리하는 자신과 달리 그저 정해진 훈련 일정만 따르면서도 세계 최고의 자리를 지키는 그들의 능력을 질투하면서 또 동경했다.
“결국에는 네가 더 오래갈 거야. 사람 몸이라는 게 전성기가 금방 지나가거든. 결국, 남는 건 얼마나 자기 자신을 잘 관리하느냐, 그리고 많은 경험을 쌓아 다른 장점으로 떨어지는 기량을 커버하느냐에 달린 거니까.”
현역 시절, 최정상급을 넘어 정말 최고의 자리를 찍었던 만치니의 말이었기에 설득력이 엄청났다.
물론, 성배도 알고는 있었던 이야기지만, 만치니 정도의 커리어를 가진 사람이 확신에 차 이야기하니 마음이 좀 놓였다.
“감사합니다. 힘은 좀 되네요. 그건 그렇고, 어쩐 일로 부르신 겁니까?”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었던 성배는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이제 막 운동을 마쳐 지친 성배를 배려해 만치니 역시 바로 본론을 꺼내놓았다.
“특별한 건 아니고, 다음 시즌 시작하기 전에 면담 한 번 하려고. 의견 물어볼 것도 좀 있고.”
지난 시즌 전반기가 다 끝나서야 맨체스터 시티의 감독직을 맡은 만치니는 7연속 무승부라는 부진에 빠진 팀을 수습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아직 자신의 팀을 완성하지 못했다.
다음 시즌을 앞둔 지금, 만치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팀을 자신의 색깔로 정비하는 것이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어차피 저한테 크게 궁금한 건 없으실 텐데.”
성배는 자기관리에 철저한 만큼 딱히 감독이 관심을 가질만한 거리가 없었다.
혼자서도 완벽했기 때문에 감독과 상담할만한 것도 없었다.
“그렇지. 그래서 참 편해. 다른 친구들은 신경 쓸 것도 많은데.”
만약 만치니 감독이 아닌 성배의 아버지, 장석이었다면 나이답지 않은 아들의 모습이 좀 섭섭할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만치니가 성배의 가족도 아니었고, 한 팀을 관리하는 감독으로서 두통을 덜어주겠다는데 섭섭해 할 필요가 없었다.
“일단 다음 시즌 주장으로 누가 괜찮을 것 같아? 당장 가장 급한 건 그거니까.”
지난 2009/10시즌에는 콜로 투레가 주장직을 맡았었지만, 전 감독인 마크 휴즈가 만든 팀의 주장이었고, 그도 아직 영입된 지 1년이 되지 않은 선수였다.
핵심 선수들 대부분이 작년 시즌을 앞두고 영입된 선수들이거나 어린 선수들이었기 때문에 주장을 정할 때 많은 고민이 필요했다.
“주장이라... 개인적으로는 콜로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요.”
어차피 팀의 정신을 상징하는 선수도 없고, 단순히 햇수로 따져도 오랜 시간을 활동한 선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선수 개인의 성격과 리더십을 감안해 주장을 정해야 했다.
그렇다면 투레 이상의 주장감은 없었다.
“그런가? 그런데 지난 시즌에 보니까 딱히 장악력이 있는 것 같지는 않던데?”
투레의 성격이 활발하고 친화력도 강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호불호가 확실해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굉장히 까칠한 편이고 심지어 싫어하는 사람의 수도 적지 않았기에 선수단 장악력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뭐, 그것도 그렇긴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땅한 주장감이 없다는 것이었다.
전생에서 맨시티 부동의 주장이었던 콤파니는 아직 나이가 너무 어렸고, 그 외에는 다들 주장으로 어울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나마 프랜차이즈 스타라고 할 수 있는 리차즈나 아일랜드는 너무 어렸고, 그나마 아일랜드는 팀 내 입지도 위태위태했다.
테베즈, 아데바요르 등의 슈퍼스타들은 개인주의적인 성격이 강해 주장에 어울리지 않았다.
“사실 주장이 바뀐다고 해도 이렇게 정하기 어렵지는 않은데 말이지. 보통은 지금은 주장이 아니더라도 차기 주장감은 딱 눈에 보이는 경우가 많단 말이지. 그런데 맨체스터 시티는 참... 팀이 강해진 과정부터 전례가 없어서 그런지 이것도 남다르네.”
인지도가 높고 팀 내 위치가 확실한 선수들은 성격이 주장에 어울리지 않았고, 리더십이 있는 선수들은 팀 내 입지가 확실하지 않거나, 나이가 어리거나 하는 이유로 완장을 채워주기 애매했다.
“다들 워낙 능력이 뛰어난 선수들이니 그리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지난 시즌에도 그랬고. 적당히 어울리는 선수 한 명 골라서 완장 채워주시죠. 다들 알아서 잘할 텐데.”
사실 카리스마와 리더십으로 팀을 끌고 나가는 주장의 역할은 굉장히 중요했다.
리버풀의 제라드, 맨유의 네빌과 비디치, 첼시의 테리 등 강팀에는 항상 뛰어난 주장이 있었다.
아스날이 빅4의 다른 세 팀과 비교해 항상 마지막 한 발자국이 부족했던 것은 그런 이유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좋은 선수들을 대거 영입한 지금 맨시티의 상황에서는 아쉬운 대로 선수들 개개인의 능력에 맡겨도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었다.
“글쎄, 그래도 그건 좀 아쉬운 것 같은데. 너도 지금 벨기에 대표팀에서 주장완장 차고 있지 않아?”
만치니 감독이 성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현재 맨체스터 시티 선수 중 유일하게 국가대표팀에서 주장 완장을 차고 있는 선수가 바로 성배였다.
< 낭만필드 - 23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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