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231 >
사실, 백화점에서 유빈이를 위해 물건들을 사는 동안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성배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여기는 맨체스터였으니까.
맨체스터의 절반은 시티즌이었고, 그 시티즌들은 모두 성배의 얼굴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성배는 맨체스터 시티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이었다.
‘뭐지? 날 아는 사람인가?’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목소리에서 신기함이나 놀라움과 같은 감정이 아니라 반가움이 느껴졌다.
유빈이가 옆에 있는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사인이나 사진을 부탁하던 팬들의 느낌이 아니었다.
“아, 올슨 양? 여기서 다 보네요.”
첼시 D. 올슨.
인기 미녀 리포터이자 떠오르는 풋볼 칼럼니스트.
그리고 유명한 시티즌 중 한 명인 그녀가 미소를 지은 채 성배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지난번에 이름으로 불러주기로 하지 않았나요? 첼시라고 부르기로 했는데 왜 또 올슨이에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은 채 새침한 얼굴로 노려보는 첼시였다.
뭔가 생각지도 못한 만남이라 놀라서 잠시 이름으로 부르기로 한 것을 깜빡했다.
“하하, 미안합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쇼핑하러 왔어요?”
백화점인데 첼시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성배는 맨체스터 내에서 셀럽 중의 셀럽이었기에 백화점 직원이 직접 짐을 들고 차에 실어주어서 짐이 없다지만, 첼시는 셀럽이긴 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아, 저기 언니랑 같이 와서 언니가 보고 있어요. 잠깐 크레페 먹으러 가려고 했거든요.”
역시 백화점을 혼자 오진 않았겠지.
첼시에게 언니가 있다는 것도 지금 처음 알았을 정도로 그다지 가깝지는 않은 사이였다.
벨기에 특집 기사도 내주고 [위클리 플레이어]에도 두어 번 출연해 어느 정도 친분은 있었지만 그게 전부.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만남이다 보니 반갑기는 했다.
“짐은 직원이 옮겨줬나 보네요? 주도 짐이 없으면서 저한테 짐 없냐고 묻는 걸 보니.”
첼시는 인사를 마쳤는데도 언니에게 돌아가지 않고 대화를 이어갔다.
성배도 유빈이를 기다리는 동안 심심했기에 첼시와의 대화가 반가웠다.
“네. 직접 내려다 주더라고요. 유명해진다는 건 참 좋은 거네요. 하하.”
시시콜콜한 잡담으로 시작해서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두 사람 모두 축구라는 분야에서 일하고 있고, 축구를 좋아했기 때문에 대화가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아, 벨기에 국가대표팀 주장이 되신 거 축하해요. 축하가 좀 늦었네요.”
성배가 벨기에의 주장이 되었다는 것은 지난 불가리아와의 경기에서야 알려졌다.
젊은 감독인 마크 빌모츠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팀 자체가 토대부터 리빌딩될 것이라는 예상은 모두 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누가 새롭게 주장이 될 것인지에 많은 관심이 쏠려 있었다.
스페인이나 독일과 같은 메이저 대표팀만큼의 관심은 아니었지만, 최근 벨기에의 성장세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몇몇 전문가들이 관련 칼럼을 쓰기도 했다.
“고마워요. 아, 칼럼 쓰신 것도 잘 봤어요. 제가 주장이 될 거라고 쓰셨던데요? 하하, 늦었지만 감사드립니다.”
첼시는 벨기에의 차기 주장으로 성배를 예상하는 칼럼을 썼다.
다른 이유보단 포지션 상의 이유로 콤파니, 베르마엘렌과의 3파전에서 가장 밀리던 성배를 이야기한 것이었다.
국가대표팀은 좀 덜하지만, 주장은 센터백이나 중앙 미드필더가 대부분이었다.
“가장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글을 쓴 거죠. 누가 봐도 주장감이잖아요. 특히, 국가대표팀에선 주의 역할이 워낙 절대적이니까요.”
시티즌인 첼시는 성배에게 우호적일 수밖에 없었다.
콤파니도 맨체스터 시티 소속의 선수이긴 하지만, 성배는 맨시티의 팬들에게 그 의미가 달랐다.
앞으로 성배보다 더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는 선수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시티즌에게 성배 이상의 의미가 될 수는 없었다.
“어!? 오빠랑 스캔들난 언니다!”
그때, 속옷매장에서 쇼핑을 마친 유빈이 성배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성배와 함께 있는 첼시를 보며 외쳤다.
“스캔들은 무슨. 살 건 다 샀어? 열 세트 넘게 샀지?”
성배와 첼시의 스캔들은 잉글랜드의 찌라시급 타블로이드지 몇몇에만 보도되고 끝난 해프닝에 불과했다.
하지만 성배가 국민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는 벨기에나 무섭게 인지도가 올라 어느새 정상급을 찍은 한국에서는 크게 이슈가 되었었다.
워낙 크게 이슈가 되다 보니 공부에만 집중했던 유빈이도 알 수밖에 없었다.
“열 세트 넘게 샀지! 그리고 이것저것 필요한 것도 많이 샀어. 그나저나, 그 언니 맞지? 둘이 진짜 사귀는 고야? 히, 히히...”
아직 어린 여학생답게 오빠의 청춘사업에 많은 관심을 보이는 유빈이었다.
참 뭐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얄밉고 꿀밤을 선물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그냥 잘 아는 기자분이야. 너나 나나 영어 할 줄 아니까 영어로 해. 못 알아들으시니까.”
유빈은 호기심이 넘치는 눈빛으로 첼시를 바라보았다.
그런 유빈의 눈빛에 살짝 당황하는 첼시였다.
“제 여동생이에요. 이번 학기부터 잉글랜드 대학에서 유학하게 되었거든요. 저랑 같이 살게 되어서 필요한 거 사러 온 거예요.”
“아, 그렇구나. 만나서 반가워요. 첼시 D.올슨이에요.”
“반가워요. 주유빈이라고 해요. 주성배 여동생이에요.”
성배의 가족에 대해서는 몇 번 언론에서 다룬 적이 있었다.
많이 알려진 편은 아니었지만, 벨기에, 네덜란드, 잉글랜드 등에서 함께 여행하는 모습이 찍혀 언론에 보도된 적이 몇 번 있어서 팬들은 알고 있었다.
“주랑 같이 산다고 하면 맨체스터에서 공부하는 건가요?”
잉글랜드가 그레이트 브리튼의 중심이자 대부분이라고는 하지만,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 등도 역사가 깊은 만큼 명문대학들이 많았다.
성배와 함께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맨체스터에 공부한다는 이야기였다.
“네. 공부를 꽤 했는지, 맨체스터 대학에 합격했다고 하네요. 건축 대학.”
그 말을 들은 첼시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어머, 진짜요? 저도 그 대학 출신이에요! 우와!”
우연히 첼시가 유빈이의 맨체스터 대학 선배였다.
성배는 몰랐지만, 첼시는 맨체스터 대학에서 언론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석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와, 진짜예요? 우와, 우와!”
사실 맨체스터 대학 입학 허가까지는 받았지만, 학교생활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이런저런 정보들을 구하기 쉬운 세상이긴 했지만, 정말 궁금한 내용에 대한 정보를 얻기는 쉽지 않았다.
진짜 졸업생에게 조언을 듣는다는 건 좋은 기회였다.
“오, 그거 좋은데요? 나중에 혹시 시간 되면 유빈이한테 학교생활에 대해 이야기 좀 해주세요. 저도 학교를 다녀 본 적이 없어서 도와주지 못해 걱정이었거든요.”
전혀 연고가 없는 외국에서 공부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나마 생활에 관한 조언을 들을 수 있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럴까요? 어차피 저도 평소에는 할 일이 많이 없거든요.”
첼시는 민망하다는 듯 귀엽게 미소 지으며 평소 생활을 고백했다.
화려한 방송인이라는 직업과 달리 평소 일이 없을 때는 집에서 나가지 않는다는 인터뷰를 언뜻 봤던 것 같기도 했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나중에 식사라도 같이 해요. 제가 초대할게요.”
유빈이를 위한 만남이지만, 일단 두 사람은 친분이 없었기 때문에 성배도 함께 자리하기로 했다.
약속 날짜를 잡기 위해 연락처를 교화했다.
“오, 오올. 오오올?”
그리고 그런 둘을 지켜보며 유빈이가 성배의 옆구리를 찔렀다.
“아저씨냐?”
흔히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에 나오는 그 아저씨 표정이었다.
뭔가 음흉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어떻게든 기회를 놓치지 않고 놀려먹으려는 유빈이의 장난이 반가워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어, 언니? 아, 미안. 잠깐 잊고 있었네. 지금 우연히 주를 만났어. 반가워서 잠깐 이야기 좀 하느라고 언니를 잊어버렸네. 헤헤.”
결국, 긴 기다림을 참지 못한 첼시의 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1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언니를 잊고 있었던 첼시는 깜짝 놀라 전화기를 들고 쩔쩔맸다.
“응? 오지 말라고? 왜, 뭐? 여기 온다고? 아, 알았어. 알았어, 언니 올 때까지 잡고 있을게.”
성배를 만났다는 말에 높아진 언니의 목소리가 수화기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웃음을 터뜨린 유빈이가 성배의 등짝에 스매시를 날렸다.
성배 역시 웃으며 유빈이에게 말을 걸었다.
“이렇게 된 김에 우리도 크레페나 하나 사 먹자. 당 떨어지니까.”
유빈이도 단 거라고 하면 사족을 못 쓸 정도로 좋아했다.
또 간식 사서 들고 먹는 게 쇼핑의 재미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오빠 이제 크레페 같은 것도 먹어?”
안더레흐트 시절 와플도 먹지 않던 것을 기억해 성배에게 되물었다.
“당연히 안 먹지. 너 먹으라고. 나는 생과일주스 같은 거 먹으면 되니까.”
전처럼 양념이 되지 않은 구운 고기만 먹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성배는 여전히 프로 선수 중에서도 식단을 철저히 지키는 편에 속했다.
이번 시즌 들어 경쟁 구도를 구축한 애쉴리 콜이 식단 관리는커녕 탄산음료와 음주, 심지어 담배까지 피는 것과는 반대였다.
“진짜 힘들겠다. 크레페 되게 맛있는데 먹지도 못하고. 운동선수 되게 힘들구나.”
유빈은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성배를 바라봤다.
크레페를 먹지 못하는 것보다 불쌍한 건 없다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운동선수들이 전부 안 먹는 건 아니니까. 아예 관리도 안 하는 사람은 별개로 치더라도 보통은 가끔 먹어. 내가 좀 유별난 거지.”
애초에 피지컬이 뛰어나지 않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피지컬이 떨어지면 바로 티가 날 수밖에 없었다.
플레이스타일이 롱런에 유리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정상에서 활약하기 위해서는 피지컬을 최대한 유지해야 했고, 그래서 강박적이라 느낄 정도로 관리하는 중이었다.
“와, 재미없겠다. 맛있는 거 먹는 게 얼마나 행복한데.”
아까부터 계속 성배를 불쌍하게 쳐다보는 유빈이었다.
다행히 반격할 거리가 있기는 했다.
“그런데 내 식단은 요리사가 관리해주시는 거 알지? 너도 나랑 같이 그 밥 먹는 거야.”
사실 식단을 철저하게 관리한다고 해도 걸그룹이나 연예인들처럼 간도 되지 않은 닭가슴살만 먹는다거나 샐러드만 먹는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누구보다 칼로리 소모가 많고 빡빡한 일정 속에서 몸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축구선수이기에 탄산음료와 같은 설탕 덩어리나 술과 같은 몇 가지를 제외하면 딱히 못 먹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식단 관리라고 하면 연예인을 떠올리는 유빈이었기에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지, 진짜로? 그럼 나도 억지로 관리해야 하는 거야?”
유빈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역시, 여동생이라는 생물은 놀려먹으라고 있는 것이었다.
반응까지 이렇게 좋으니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몰라. 부탁하면 어떻게 해줄지도 모르지만, 매끼 준비해주는 것도 고마운데 죄송하잖아.”
글쎄.
레스토랑 메인 셰프급의 요리사가 직접 해주는 요리인데 따로 요청할 게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음, 저기 오빠? 그, 있잖아...”
성배의 말에 자기도 괜히 죄송해진 유빈이는 뭐라 말도 하지 못하고 주저했다.
그리고 성배는 굳이 사실을 말해주지 않고 속으로 통쾌해 했다.
< 낭만필드 - 23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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