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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사라진 필드-230화 (142/356)

< 낭만필드 - 230 >

“마음에 들어? 너 온다고 해서 한 일주일 전부터 이것저것 준비했는데.”

아무리 오빠라고 하더라도 다 큰 처녀가 남자와 둘이 집을 쓰는 게 편하지만은 않을 터였다.

신경 쓸 일도 많을 것 같아서 최대한 자신의 방과 먼 2층 끝의 방을 유빈이의 방으로 꾸며놓았다.

그리고 원래 손님용으로 있던 가구들 중 침대를 가장 좋은 것으로 바꿔 놓았다.

“근데 책상은 저것밖에 없어? 공부해야 하니까 책상은 좀 좋은 게 있었으면 좋겠는데...”

영국 대학의 학기가 시작되는 9월까지 공부에 매진할 예정이었기에 애써 최고급으로 바꿔놓은 침대보다 책상에 먼저 관심을 가지는 유빈이었다.

“뭘 그렇게 눈치를 봐. 아까 말했잖아. 책상 정도는 그냥 길 가다가 껌 한 통 사 먹는 것보다도 더 편하게 사줄 수 있으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앞으로도 눈치 보지 마.”

책상이라는 게 싸게 사면 한없이 싸게 살 수 있지만, 정말 제대로 된 것을 사려면 생각보다 지출이 큰 품목이었다.

하지만.

성배는 유명 디자이너가 최고의 자재들만 사용해서 직접 깎아 만든 책상이라도 아무 걱정 없이 사줄 수 있었다.

“헤헤. 알았어. 오빠 오늘 좀 멋지다?”

역시 오빠의 위엄은 지갑에서 나오는 법이었다.

적다면 적고 크다면 크다 할 수 있는 네 살 차이지만, 성배의 지갑은 4년은커녕 400년 정도를 앞서 있었다.

“말 나온 김에 나가자. 책상이랑 의자랑 옷장, 다 사줄게. 그리고 이왕 나가는 김에 예쁜 옷도 좀 사자.”

가끔 만나면 용돈을 주기도 했고, 선물도 자주 사주었지만, 유빈이가 미성년자였기에 돈 좀 번다는 오빠들이라면 사줄 수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는 유빈이도 성인이 되었고, 대학생이 되었으니 다른 친구들이 부러워할 정도의 선물을 사주기로 했다.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그냥 책상이랑 의자만 사면 돼.”

역시 20년을 살아온 생활 습관이 있다 보니 말로만 해서는 도저히 그게 바뀌지 않았다.

성배는 재산의 극히 일부가 들어있는 통장 잔액이라도 보여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유빈아, 내가 그렇게 이야기했잖아. 그 정도로는 내 재산에 흠집도 안 난다고.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옷들을 전부 프라다나 구찌, 샤넬로 바꿔도 내 재산에 티도 안 나. 그리고 그런 브랜드로 네 옷장을 채워줄 생각도 없고. 내 옷장을 봐. 네 기준에 명품 아닌 건 찾아보기도 힘들 테니까.”

성배도 차지하는 위상과 입지가 있었다.

그리고 성배의 수입을 기준으로 하면 그런 명품들과 시장 브랜드의 차이도 없었다.

차량은 팀에서 내준 재규어 한 대로도 충분했지만, 매일 입고 대중에 노출되는 의상은 자신의 위치에 맞게 명품이라 불리는 브랜드들이었다.

‘나도 이런 걸 당연하게 여기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지.’

주 수입원이 연봉이 아닌 투자 수익이었기 때문에 안더레흐트에서 막 아약스로 이적하던 시점에도 성배는 10억이 넘어가는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 어울리는 소비를 하기 시작한 것은 아약스 말기부터였다.

평범한 서민들처럼 먹을 것, 입을 것 아껴 저축하던 전생에서의 소비습관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대로 말로만 해서는 끝이 없을 거라는 걸 깨달은 성배는 바로 방으로 들어가 차키와 지갑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유빈이가 벗어놓은 재킷을 챙겼다.

“됐어, 가자. 손님이 쓰는 게 아니라면 내 집에 이런 미드라인 브랜드가 있을 곳은 없어.”

패기 넘치는 한마디를 던진 뒤, 유빈이의 손을 잡고 끌고 나왔다.

여동생의 존재와 오빠라는 위치가 성배를 스물세 살 평범한 남자의 모습으로 돌려놔 주었다.

“돈을 막 쓰는 줄 알았는데, 차는 한 대밖에 없네? 이거 팀에서 사준 거라며?”

성배의 손에 이끌려 주차장으로 내려온 유빈이는 세 대는 주차할 수 있는 넓은 주차장에 달랑 한 대 서있는 성배의 재규어를 보고 놀랐다.

지금까지 돈을 쓰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처럼 보였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차는 어차피 한 대만 있으면 되는 거니까. 옷이나 시계처럼 매일 다른 걸 착용해야 하는 물건이 아니잖아. 이것도 충분히 좋은 차고.”

비록 잔고장이 좀 많고 과거의 명성에 비해 품질이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어차피 장거리 운행을 거의 하지 않고 디자인은 빼어났기 때문에 폼을 내기 딱 좋은 차량이기도 했다.

“근데 곧 한 대 뽑으려고. 저건 너 학교 다닐 때 타고 다녀. 너도 잉글랜드에서 살려면 차 한 대 필요할 테니까. 네가 슈퍼카를 타고 다닐 순 없잖아?”

유빈이가 잉글랜드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리고 성배가 맨체스터 시티에서 활약하는 동안 팀에서 제공하는 재규어는 이제 유빈이의 것이었다.

“내가? 이런 차를? 너무 화려하지 않아?”

사실 재규어는 여성들이 좋아하는 차량 브랜드 중 하나였다.

매끈한 곡선미를 강조한 디자인 덕분이었다.

물론, 이제 막 대학교에 입학한 스무 살의 어린 학생이 타고 다니기엔 좀 무거울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주는 차를 놀게 할 필요는 없었다.

“차는 무조건 좋은 차 타는 게 좋아. 혹시나 사고가 나더라도 덜 다치니까.”

차는 단순히 허세와 멋을 위한 아이템이 아니었다.

목숨과도 바로 직결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하면서 중요한 존재였고, 많은 차를 구매할 필요는 없지만 좋은 차를 구매할 필요는 있었다.

“그런가?”

비록 평범한 일상을 보내왔던 유빈이지만, 그 나이 또래의 다른 아이들처럼 어느 정도의 허영심은 당연히 있을 것이었다.

성배의 설득에 못 이긴 척 넘어가는 것을 보면.

그리고 전생에서처럼 너무 일찍 철이 든 모습보다 지금의 모습이 훨씬 더 보기 좋았다.

“그래. 이왕 나가는 김에 오다가 들러서 차도 한 대 뽑아야겠다. 음... 그래도 잉글랜드와서 처음으로 중심지 나가는 건데 더 예쁘게 꾸미고 싶으면 꾸미고 나와. 너 비행기 오래 타서 지금 장난 아니야.”

유빈이의 모습을 보면서 예쁘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지금 유빈이가 너무 초췌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곳이라고는 해도 여자인데 예뻐 보이고 싶어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차 문까지 열었다가 다시 문을 잠갔다.

***

“그, 오빠? 또 이런 말 해서 미안하긴 한데 이렇게 비싼 가구 필요 없...”

“유빈아. 내가 말했지? 그런 걱정할 필요 없다고.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또 한 번만 더 말하면 진짜 절약이라는 걸 배울 수 있게 바로 내쫓아버릴 거야. 알았지?”

맨체스터를 여행하는 아시아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셀프리지 백화점에 도착한 성배와 유빈은 필요한 가구 대부분을 최고급으로 맞춰버렸다.

책상과 의자는 물론이고 옷장, 화장대에 아직 많이 비어있는 성배의 드레스룸을 채워줄 행거와 수납장들까지 모두 굉장한 퀄리티를 자랑했다.

“좋아, 알았어! 내가 스무 살 여성의 지름신을 보여주지! 각오하라고! 후회하게 될 거야!”

설득하다 지친 성배의 장난 섞인 협박에 이제 유빈이도 마지막 남아있던 벽을 허물었다.

스무 살 여성의 지름신.

뭔가 이름만 들어도 무서운 분이었다.

“알았어. 절대 후회할 일은 없겠지만, 한 번 해봐.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드디어 속이 좀 후련하네.”

괜히 허영심에 찌들어 쓸데없는 것들에 사치를 부리는 것은 성배도 당연히 싫어했다.

하지만 있는 돈에 어울리는 소비 습관은 들여놓는 것이 좋았다.

자신이 직접 번 돈이 아니고 오빠 돈이라서 조심스러워하는 건 기특했지만, 유빈이는 아직 학생인 데다가 잉글랜드에서는 성배가 보호자였고, 그 정도 돈은 일주일만 있으면 채울 수 있었기에 부담스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자, 그럼 스무 살 여성의 지름신을 만나 뵈러 갈까? 가자, 패션관으로.”

흔히 여성들의 지갑도둑이라 불리는 옷, 가방, 액세서리 등의 패션 용품.

이제는 그들의 차례였다.

“이제 대학생인데 정장도 하나는 있어야지? 이제 정장도 사러 가자.”

사실 진짜 비싼 옷들은 정장이었다.

유빈이는 나이답게 정장보다 캐주얼한 차림을 선호했고, 성배도 유빈이에게는 그게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쇼핑백 몇 개를 채울 정도의 옷을 샀지만, 생각만큼 큰 금액이 들지는 않았다.

“와, 오빠 진짜 돈 많이 벌긴 했구나. 오빠가 나한테 이런 선물들을 해주다니.”

역시 아직 숙녀보다는 소녀에 더 가까운 것인지 그 비싼 가구들을 사줬을 때는 그냥 놀라기만 했던 유빈이는 마음에 든 옷들을 곧바로 긁어버리는 모습을 본 후에야 선망의 눈길을 보내왔다.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이제? 됐고, 드레스 정장 하나랑 투피스 정장 하나 사자. 너도 잉글랜드에서 대학 다니면 입을 일이 꽤 있을 거야.”

이젠 유빈이도 별말 없이 성배를 따라왔다.

단순히 성배를 따라다니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눈높이에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아, 그리고 내가 이렇게 많이 사주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야. 앞으로는 한 달마다 생활비로 줄 거고 선물은 특별한 날이나 내가 사주고 싶은 날에만 사줄 거야. 그러니까 균형 잘 잡아. 돈이 있으면 당연히 눈높이가 바뀌어야겠지만, 무너지면 안 돼. 그리고 어차피 내가 주는 생활비도 남들보다는 훨씬 많을 거니까 문제도 없을 거야.”

유빈이한테 한 달에 몇천만 원씩 용돈을 뿌려줄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말도 안 되게 몇십만 원으로 끝낼 생각도 없었다.

수백만 원 정도의 넉넉한 생활비를 줄 것이었고, 점차적으로 달라진 생활 수준에 적응할 수 있게 해줄 것이었다.

“알겠사옵니다, 오라버님. 소녀, 오라버님이 하자는 대로 따를 것이옵니다.”

음...

갑자기 너무 다른 세계를 소개해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닭살 돋으니까 됐고, 가서 속옷도 좋은 거 사. 저긴 내가 같이 가기 좀 그러니까 카드 줄게. 한 열 세트 사. 겉으로 보이는 옷들은 좀 불편해도 예쁜 게 장땡이지만, 속옷은 무조건 고급으로 사야지. 속옷은 무조건 비싸고 좋은 거 사.”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속옷 브랜드.

카탈로그만으로도 전 세계 남성들을 흥분시키고 전 세계 여성들의 로망을 건드리는 그 브랜드의 매장이 눈앞에 있었다.

“알겠사옵니다, 오라버님. 소녀는 가서 속옷 열 세트를 사오도록 하겠사옵니다. 저런 속옷을 매일 입을 생각에 소녀, 벌써부터 설레옵니다.”

유빈이는 장난에 대한 성배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계속 저 말투를 고수하고 있었다.

가볍게 꿀밤을 놓으며 카드를 건네준 성배는 근처 벤치로 가서 앉았다.

카드를 받아든 유빈이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속옷매장을 향해 걸어갔다.

‘그래도 역시 좋아하긴 하는구나. 자식.’

성배는 유빈이에게 과거부터 이어진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성공으로 인해 유빈이가 계속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자신은 그런 유빈이에게 엄청난 지원을 해줄 수 있었다.

‘이제야 겨우 마음이 좀 편해지네.’

계속해서 가지고 있었던 죄책감이, 마음의 빚이 이제야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지금까지는 유빈이가 학생이었기 때문에 크게 뭔가를 해줄 수 없었고, 그래서 계속 답답했다.

그래서 잉글랜드로 유학 온 유빈이에게 이렇게까지 해주는 것이었다.

“어? 주? 여긴 어쩐 일이에요?”

< 낭만필드 - 230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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