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229 >
“왔어? 짐은 이리 줘.”
2010년 5월, 드디어 성배의 여동생인 유빈이 잉글랜드에 도착했다.
스무 살이 되어 학교를 졸업하면서 유학을 오게 된 것이었다.
“으아, 힘들다. 잉글랜드도 꽤 머네? 그래도 덕분에 편하게 왔어.”
인천에서 잉글랜드까지의 비행시간은 대략 열두 시간.
짧은 시간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인천에서 출발해 런던에 도착하는 에티하드 항공 비행편이 존재했고, 맨체스터 시티는 성배의 가족인 유빈이를 위해 퍼스트 클래스 비행기 티켓을 준비해주었다.
“퍼스트 클래스 타니까 편하지? 앞으로도 비행기는 퍼스트만 타게 될 거야. 그러니까 한국도 자주 들어가서 부모님이랑도 놀아드리고 그래.”
가족이 모두 잉글랜드로 건너올지, 아니면 유빈이만 유학을 보낼지 고민하던 장석과 혜진은 결국 유빈이만 잉글랜드로 보냈다.
장석이 49세, 혜진이 45세로 아직 한창 일할 나이였기 때문에 차마 일을 그만두지 못한 것이었다.
“아이고, 알았네요. 그런데 공부하기 바빠서 시간이 나려나 모르겠네.”
그저 미술이 좋아서 예술 고등학교에 입학했던 유빈은 성배의 이런저런 조언에 자극을 받은 것인지 나름 진지하게 꿈을 찾았다.
그렇게 찾은 길은 쉽지 않은 길이었고, 공부의 산이 펼쳐져 있는 길이었다.
“그러니까 왜 그렇게 힘든 공부를 하려고 그래. 그냥 좋아하는 그림 열심히 그리면서 편하게 작업하지.”
성배는 그런 유빈이가 안타까웠다.
순수 미술이 돈을 벌기 힘들다고는 하지만, 이미 유빈이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성배가 번 돈이 천문학적인 수치를 찍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성배는 자기가 번 돈을 모두 직접 관리하지만, 작은 빌딩이나 아파트 한 채 사서 세를 놓고 그 수익을 유빈이에게 돌려주는 정도의 지원은 해줄 수 있었다.
“에이,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라며? 오빠도 축구가 좋아서 하는 거잖아? 나도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을 뿐이야.”
과거에 자신의 실패로 인해 유빈이까지 충격을 받아 꿈을 포기했던 것이 미안했던 성배였다.
그래서 유빈이가 어릴 때부터 꾸준히 하고 싶은 걸 찾아서 도전하라고 말해주었고, 성배의 엄청난 성공으로 그 말의 무게감이 커진 상황이었다.
결국, 유빈이는 예술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미술의 끈을 놓지 않았고, 잉글랜드로 유학까지 오게 되었다.
“아니, 그래도 너는 지금까지 미술만 해왔는데 건축이 웬 말이야? 건축은 예술이지만 또 공학이잖아. 너 공부 잘해?”
유빈이가 선택한 그 길은 건축가의 길이었다.
미대도, 공대도 아닌 그 어딘가에 존재하는 건축학.
그걸 배우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본인의 인생이니 어지간하면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미술 전공으로 예술 고등학교를 나와 그 험한 길로 들어서려는 유빈이가 겪을 고생이 눈에 선해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와, 오빠 지금 나 무시해? 내가 미술이 좋아서 미술을 한 거지, 머리 좋아! 공부는... 꽤 오래 했어. 그래도 거의 2년 정도?”
그나마 환상에 빠진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현실을 파악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성배도 자세히는 몰랐지만, 모든 대학생 중 피폐함의 정도가 상위권을 다툰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었다.
‘에휴, 잘 버티려나...’
그래도 일단 시험을 쳐서 지난 2월에 맨체스터 건축 대학에 입학허가를 받았을 정도이니 준비는 나름대로 꽤 한 것 같았다.
맨체스터 건축 대학이 속해있는 맨체스터 대학은 세계 30위권의 명문이었다.
건축 대학만 따져도 영국 건축협회 건축학교나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등 명문대학교보다는 좀 밀리지만, 그래도 영국 내에서 좋을 때는 5위권, 떨어져도 10위권에 드는 건축대학이었다.
정말 성배의 걱정처럼 유빈이가 미술만 해왔다면 합격할 수 없는 학교였다.
성배 덕분에 남들은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좋은 환경과 조건에서 공부한 덕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으면 입학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그래, 그래. 그렇게 좋은 학교에 입학까지 했으니 분명 네가 나보다 공부는 잘하겠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나야 출전 금지 안 당하려고 공부한 게 다니까.”
유럽은 유소년 선수들의 학교 성적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질 경우, 바로 클럽 차원에서 출전 금지를 때려버렸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한국의 유소년 선수들보다는 공부를 많이 하고 성적도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딱 그만큼이었고, 평범한 일반 학생들 정도의 성적이었다.
성배가 유빈이에게 공부로는 할 말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럼, 그럼. 공부는 내가 알아서 한다고. 히히.”
뭐 알아서 잘하겠지.
어차피 지 인생인데.
자신은 그저 나중에 유빈이의 공부가 마음처럼 잘 안 풀렸을 때, 먹고 살 길만 마련해주면 되는 것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건축학도보다 축구선수가 먹고살기 더 힘들지.’
축구를 직업으로 선택한 주제에 어쨌든 공부하겠다는 애한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런 것치고는 가족과 대화할 시간도 거의 없는 주제에 상당한 잔소리를 쏟아냈지만, 이제는 그냥 묵묵히 지원하며 응원해줄 생각이었다.
“그래, 그래. 알아서 하세요. 집이랑 생활비도 알아서 하시는 거겠죠?”
물론 놀리는 건 포기할 수 없지만.
“아, 오빠!! 진짜 치사하게 이럴 거야?”
“치사하다니. 땅을 파봐라. 10원, 아니 1펜스라도 나오나.”
인간이 이 땅에 모습을 드러낸 그 순간부터 경제권을 쥔 사람을 중심으로 가족이 생겨났다.
성배와 유빈이 함께 살게 된 이상, 모든 경제권을 쥐고 있는 성배가 갑의 위치에 설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유빈의 등록금과 생활비, 심지어 비행기 티켓을 포함하는 모든 경제적 지원이 성배의 지갑에서 나오는 것이고, 부모님의 돈은 전혀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어디다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와, 진짜... 있는 놈이 더하다더니.”
머나먼 이역만리 타국 땅에 오빠라고 있는 성배만 믿고 날아온 유빈은 배신당했다는 표정이었다.
“그 있는 놈이랑 우리 대화를 좀 나눠볼까? 식사 당번이라든지, 청소 당번이라든지. 뭐, 그런 거 있잖아?”
그런 유빈이의 반응이 귀여워서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온전히 마음을 열고 계산 같은 것 하나 없이 대할 수 있는 사람이 너무 오랜만에 곁에 나타나서 그런지 더욱 즐거웠다.
***
“우, 우와...”
성배의 집 앞에 도착한 유빈은 그냥 입을 떡 벌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정도로 성배의 집이 뿜어내는 아우라가 대단했다.
“뭘 그렇게 놀라?”
그런 유빈이의 표정을 보니 정말로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어 흐뭇해졌다.
역시 자신이 성공했음을 깨닫는 순간은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이 자신이 이룩한 것들을 보고 놀라줄 때였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이 굳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금의환향이라는 말이 괜히 있을까.
“이, 이게 오빠 집이라고? 말도 안 돼! 무슨 저택이 있어!”
성배가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한 이후, 유빈이가 잉글랜드에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올겨울에 혜진이 잠시 다녀가기는 했지만, 항상 함께하던 유빈이는 공부하느라 시간을 내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맨체스터에 있는 성배의 집은 2층에 정원이 딸린 단독 주택이었다.
“이 정도로 뭘 놀라. 잠깐 세 들어 사는 거야.”
내년이면 만수르가 준비하고 있는 펜트하우스가 제공될 것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만수르가 직접 준비하는 것인 만큼, 그 수준도 상상을 초월할 것이 분명했다.
모르긴 몰라도 드라마에 나오는 펜트하우스, 그 이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그렇지? 역시, 월세였어. 음음.”
그런데 유빈이는 월세라는 성배의 말을 다르게 해석한 듯싶었다.
놀란 표정이 살짝 덜어지고 그 공간을 못마땅함이 채운 느낌이었다.
“이렇게 돈을 펑펑 써서 어떡해? 이런 데서 세 들어 살 거면 차라리 평범한 집을 사는 게 훨씬 낫겠다. 에그에그, 이게 남자들의 허세라는 건가?”
유빈이의 반응에 성배는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의 연봉을 대충이나마 알고 있을 텐데도 이런 반응이라니.
공무원 두 분 밑에서 중산층 생활을 한 유빈이의 한계였다.
“허세는 무슨. 이런 집 사려고 하면 열 채를 사도 돈이 남는다, 마.”
맨체스터에서 집 한 채를 마련하는 평균 비용은 22만 파운드 정도.
런던보다 10만 파운드나 낮은 수준이었다.
물론, 성배가 살고 있는 집은 침실 네 개와 욕실 두 개, 응접실 두 개가 있는 집으로 맨체스터 평균 집값의 네다섯 배를 호가하는 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열 채를 사도 돈이 남는 건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열 채 정도로는 재산의 절반도 쓰지 못했다.
“진짜로? ... 그, 오빠? 오빠... 돈 얼마나 있어?”
성배가 정확히 얼마를 벌었는지는 장석과 혜진도 몰랐다.
이번에 얼마를 벌었다더라, 연봉이 얼마라더라, 하는 정도만 들어서 알고 있고, 계약금이나 투자 수익 등은 성배가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대충 클럽에서 받는 연봉이 수십억 정도 된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성배의 재산에 대해서는 가족 누구도 알지 못했다.
“글쎄. 지금처럼 써서는 평생 써도 1/5도 못 쓸 걸. 그러니까 너는 그런 걱정 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학교 졸업하면 지원은 없으니까.”
명품도, 차도, 파티도 좋아하지 않는 성배였기에 버는 돈은 족족 다음 투자처를 향해 이동할 뿐, 어디로 빠져나가질 않았다.
진짜 재벌들과 비교하면 아직 많이 부족한 수준이지만, 더 이상 돈을 벌 필요가 없을 정도인 건 마찬가지였다.
“와... 멋지다.”
쿨하게 한 마디를 남기고 집으로 들어선 성배를 보며 유빈은 아직도 충격에 빠져 있었다.
이런 집 열 채를 사도 돈이 남는다니.
최소한 10억은 넘을 것 같은 집이었기에 자신의 오빠는 100억이 넘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성배가 멋있어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가 주방이야. 여기 사는 동안 네가 매일 지내게 될 공간이지.”
성배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유빈이 쓰게 될 방보다 주방을 먼저 보여주었다.
식사 당번과 청소 당번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유빈의 표정은 울상이 되어갔다.
“저, 저기 오빠? 진짜 내가 밥해? 나 한 번도 밥해본 적 없는데?”
성배는 울상이 된 유빈이를 놔두고 지나쳐 다음 방으로 이동했다.
“여기 보면 청소기도 있거든? 이것도 하루에 한 번씩 돌려주면 돼. 내가 좀 예민해서 청소 제대로 안 되면 축구를 못해요. 그러니까 하루 한 번. 알았지?”
유빈이의 얼굴은 점점 더 구겨졌다.
“아니, 이 넓은 집을 어떻게 하루 한 번씩 청소해? 말도 안 돼! ...일주일에 한 번만 할까?”
아무래도 얹혀사는 신세이다 보니 평소처럼 쏘아붙이지도 못하고 쩔쩔매는 유빈이었다.
그 모습이 재미있었지만 그래도 장난은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푸하하하. 장난이야, 장난. 음식은 클럽에서 고용한 요리사분이 해주실 거고, 청소는 일 도와주시는 아주머니 계셔. 네가 주방에 들어갈 일은 목이 마르거나 가끔 배고파서 간식을 만든다거나 할 때 말고는 없을 거야. 청소기는 거의 잡을 일 없을 거고.”
유빈은 성배의 장난에 화도 내지 못하고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잠시지만 진심으로 영국 유학을 후회할 뻔했다.
“운동선수한테 음식이랑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 중요한 걸 너한테 맡기겠냐. 너는 공부나 열심히 하면 돼.”
컨디션 관리에 철저한 성배가 음식 한 번 안 해봤을 유빈이에게 식사를 맡길 리 없었다.
게다가 클럽 측에서 전문 요리사를 고용해주었는데 그걸 포기할 리도 없었다.
“아, 진짜 놀랐다...”
처음 공항에서 만났던 한 시간 전부터 계속 집안일에 대해 말해왔기에 유빈도 속을 수밖에 없었다.
하긴, 어제까지도 평범한 생활을 해오던 유빈에게 요리사와 가사도우미는 드라마에나 나오는 사람일 것이었다.
“이런 건 신경 쓰지 말고 네 방이나 가자. 2층에 있어.”
진짜 걱정했던 것인지 한숨을 쉬는 유빈을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양손에 짐을 든 성배가 앞장섰고, 유빈이 역시 비교적 가벼운 짐 두 개를 양손에 들고 따라 올라갔다.
< 낭만필드 - 22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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