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228화 (140/356)

< 낭만필드 - 228 >

“뭐, 다들 아는 사이지만, 일단 인사하라니까 한다. 반갑다. 이제부터 붉은 악마의 주장직을 맡게 된 주성배다.”

시즌 종료 후, 여러 팀들이 월드컵을 준비할 때 벨기에는 신생 벨기에의 탄생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크 빌모츠가 감독으로 부임하고 성배가 새로운 주장으로 선임된 벨기에는 불가리아를 홈으로 불러들여 친선 경기를 치렀다.

“저기 뱅상처럼 자주 본 친구들도 있지만, 이번에 처음 만나는 친구들이 더 많은데, 앞으로도 자주 봤으면 좋겠다.”

빌모츠 감독이 새롭게 팀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인 만큼, 이번 국가대표 소집에는 국가대표가 확실한 선수들보다 새로운 선수들, 국가대표와 상비군의 경계에 있는 선수들이 대거 참여했다.

평소에는 소집되지 못하다가 핵심 멤버들의 이탈 때 자리를 채워주는 역할인 올리비에 데샤흐트나 토마스 부펠 등의 선수들이었다.

“우리가 지금 리빌딩 중이라는 것, 세대교체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번에 새로 소집된 친구들은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하도록 해.”

그리고 새로운 유망주들도 대거 소집된 상태였다.

처음 성배가 벨기에 국가대표팀에 이름을 올렸던 2006년 말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 당시, 80년대 후반 출생의 선수들을 베이스로 1차적인 리빌딩과 세대교체를 단행했던 벨기에는 이제 세대교체의 마무리를 향해 가고 있었다.

“여기 합류해있다는 것만으로도 너희 또래에서는 최고라 꼽힌다는 이야기겠지. 좋아, 뛰어난 재능이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국가대표 소집 기회를 잡는 데 필요했던 것들이지. 이제 너희의 경쟁 상대는 여기 있는 우리들이다.”

성배의 눈빛이 이번에 처음 합류한 선수들을 훑었다.

지난 크로아티아와의 친선 경기에서 데뷔한 안더레흐트의 괴물 신인, 로멜루 루카쿠.

향후 분데스리가를 정복하고 맨체스터 시티로 합류할, RC 헹크 소속의 케빈 데 브라위너.

EPL을 주름잡는 괴물 스트라이커로 성장하지만, 지금은 스탕다르 리에쥬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크리스티안 벤테케.

뛰어난 선수지만 벨기에 2선 자원들의 강력함에 밀려 모로코 국가대표를 선택하는 메흐디 카셀라-곤잘레스 등.

점점 90년대 생들도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 너희 나이에는, 그리고 그 나이에 그 정도 활약을 보여줄 때는 아마 빅리그라는 곳이 쉬워 보일 수도 있겠지. 그리고 빅리그에 진출하지 못한 여기 선배들은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뛰어넘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

아직 벨기에에는 빅리그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이 부족했다.

4대 리그에 진출한 선수들은 반 바이텐, 성배, 콤파니, 베르마엘렌, 반덴 보레, 펠라이니였고, 펠라이니를 제외하면 모두 수비수였다.

그나마 반덴 보레는 주전으로 뛰지도 못했다.

물론 그 숫자는 중소 강호들과 비교하면 비슷하거나 좀 더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성배가 생각하는 벨기에의 위치는 그곳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은 좋다. 나도 그렇게 뛰었으니까. 처음으로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었던 2006년 말에 나는 언젠가 빅리그로 진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고, 언제든 내가 국가대표팀의 핵심 수비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젊은 선수들의 강한 자신감.

성배는 그것을 좋아했다.

성배의 경우에는 나이도 있고 흐름을 읽는 눈도 있어서 자신감이라기보다는 철저한 계산에 따른 예측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성배도 몇 년 전에는 그런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선수에게 그런 마음이 없다면 절대 최고로 올라설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감과 건방짐은 구별해라. 너희에게 그런 재능이 있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재능은 가능성일 뿐, 확실한 게 아니지. 유망주는 유망주일 뿐, 이라는 이야기는 너희도 잘 알고 있을 거다. 너희도 그저 그런 유망주에서 끝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은 없어.”

최고라 불렸던 유망주의 실패는 생각보다 흔했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주위에서 떠받들어주는 것은 그런 실패의 큰 이유 중 하나였다.

이들을 이끌고 벨기에의 전성기를 원래 역사보다 3년 이상 당기려 하고 있는 성배는 그런 것들을 용납할 수 없었다.

“만약 빅리그로 넘어가지 못한 여기 선배들을 실패한 선수들이라고 생각한다면, 배울 게 없다고 생각한다면 당장 생각 고쳐먹어라. 조금 아쉬운 선수 생활을 하고 있는 선배들에게서 하나라도 더 배워라. 그래서 너희 선수생활에는 그런 아쉬움을 남기지 마. 나는 그렇게 여기까지 왔으니까.”

이들은 아직 성배와 함께한 시간이 길지 않아 프랑스계와 네덜란드계의 반목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많은 선수들처럼 이는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었다.

그리고 어린 선수들은 분위기의 영향을 많이 받는 만큼, 이미 어느 정도 반목이 해소된 벨기에 국가대표팀의 분위기는 이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

“이런 자리도 좋은데? 생각보다 두 집단이 잘 뭉치네.”

함께 어울려 놀고 있는 선수들을 보며 데샤흐트가 말했다.

성배의 연설 이후에는 평소처럼 선수들끼리 친목을 다지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성배가 벨기에 국가대표팀의 주장을 맡게 되면서 젊은 선수들만 모이지 않고 대표팀의 모든 선수들이 모인 자리가 되었다는 것.

“당연하지. 젊은 친구들은 같이 모아놓고 떠들게만 해주면 금방 친해지는 거 아니겠어?”

한때, 성배와 데샤흐트가 안더레흐트와 벨기에 국가대표팀의 주전 레프트백 자리를 놓고 경쟁할 때는 둘의 사이가 그리 가깝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위상의 차이가 압도적으로 벌어진 지금에는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잠깐이나마 함께 활약했던 기억 덕분에 다른 선수들보다는 친근한 느낌이었다.

“프리미어리그가 어떠냐고? 하하, 뭐 특별할 건 없는데? 그냥 벨기에보다는 훨씬 거칠고 몸싸움이 자주 일어난다는 정도?”

성배의 옆에 데샤흐트가 있는 것을 보면 알겠지만, 이번 대표팀에는 확고한 주전이라 평가받는 선수들은 거의 소집되지 않았다.

성배를 제외하면 소집된 주전 선수는 몇 명 없었다.

콤파니와 저기서 유망주들의 질문을 받아주고 있는 베르마엘렌을 비롯, 데푸르 정도가 주전이었다.

때에 따라 주전과 백업을 오가는 선수까지 더하면 뎀벨레, 베르통헨, 아자르, 미랄라스 정도였다.

“프리미어리그의 다른 점을 물어본 건가? 간단하게 말해주지. 전체적으로 축구를 잘해. 끝.”

이제 막 프로 무대에 발을 내디딘 젊은 선수로서 빅리그, 특히나 벨기에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프리미어리그에 대한 궁금증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성배는 친절하게 한 마디 대답을 해주었다.

“야. 그게 뭐냐. 애들한테 너무 잔인한 대답 아니냐, 그거?”

성배의 대답에 벙찐 유망주들을 뒤로 하고 베르마엘렌이 투덜거렸다.

한창 무리의 중심이 되어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성배가 끼어들자 스포트라이트가 바로 성배에게 이동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둘의 위상 차이가 없지 않은 만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뭘, 사실인데.”

다른 선수들도 아니고 베르마엘렌과 콤파니가 합류한 이유는 간단했다.

아니, 데푸르나 아자르, 뎀벨레 등의 선수들보다 이들이 먼저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벨기에의 부주장과 3주장, 그리고 네덜란드계와 프랑스계를 대표하는 이들은 신생 벨기에의 시작을 알리는 이번 경기에 무조건 참여해야 했다.

“뭐야? 애들 분위기 좀 끌어 올리라고 완장 채워줬더니 왜 여기서 애들 기를 죽이고 있어? 왜 우리 애들 기를 죽이고 그래?”

그때, 뒤에서 낯익은, 하지만 여기서 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마크. 무슨 말을 그렇게 합니까? 딱히 애들 기를 죽이려고 한 건 아니고 제 생각을 말해준 것뿐인데요.”

벨기에의 감독, 마크 빌모츠였다.

성배가 주최한 선수들의 자리에 감독이 함께한다는 건 작지 않은 의미가 있었다.

자리의 주인공이 감독이 아니라 주장인 성배임에도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었다.

“좋은 얘기해 줘, 좋은 얘기. 아직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들을 나이라고.”

빌모츠 감독은 선수들과 스스럼없이 잘 어울렸다.

선수 시절에는 카리스마로 팀을 묶었던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지금은 서글서글한 동네 형과 같은 매력을 보였다.

빌모츠의 그런 모습은 단숨에 오늘 그를 처음 본 어린 선수들의 호감을 끌어모았다.

“아니, 무슨 유치원 애기들입니까? 따져보면 저랑 두 살에서 네 살 정도 차이밖에 안 납니다.”

사실 위의 연설도 그렇고 굉장한 선배처럼 이야기했지만, 성배도 이제 막 스물세 살이 된, 아직도 청소년 대표팀을 졸업하지 못한 나이의 젊은 선수였다.

“뭐, 굳이 따지자면 그렇지만... 너도 알지 않나? 너한테서는 절대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다는 거?”

그런데도 모든 사람들은 성배를 젊은 선수로 대우해주지 않았다.

국가대표팀에서 주장 완장을 찬 것도, 그리고 그것에 대해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도 전부 그런 의미였다.

막 스무 살을 넘겼던 수년 전부터 경기 중반에 감독의 전술과 반대로 움직이고 동료들마저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하는 성배를 경험이 부족한 젊은 선수라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뭐, 됐습니다. 저도 그쪽이 편하니까요. 진짜 나이처럼 대해주면 더 불편합니다.”

어리게 대해줘서 고마우려면 아직 30년은 더 지나야 했다.

아는 것도 많고 보이는 것도 많은데 남들이 정말 이 나잇대의 다른 선수들처럼 대해주었다면 답답해서 쓰러졌을 것이었다.

“삐지지 말라고. 좋은 뜻이니까.”

뭔가 찜찜했는지 빌모츠 감독이 한 마디를 보탰다.

“진짜 상관없습니다. 저도 이쪽이 편해요, 마크. 앞으로도 그렇게 베테랑처럼 대해주시면 됩니다. 경기 중에는 물론이고 외적인 부분들에서도 제 이야기 많이 들어주시고. 그러면 됩니다.”

궁극적으로 마크 빌모츠가 선수 시절 가지고 있던 위상과 힘을 넘어서는 것.

성배의 목적이었다.

벨기에 축구사에 전설적인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선수가 되려면 그라운드 위에서뿐 아니라 바깥에서까지 더 큰 힘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그건 됐고, 친구들이 빅리그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 같으니까 마크가 뭐라고 말이라도 해주시죠.”

빌모츠 감독도 분데스리가의 명문 클럽, 샬케에서 7년이나 활약한 경험이 있었다.

벨기에 올타임 넘버원이라 불릴 정도로 성공적인 선수생활을 했던 선수인 빌모츠였으니 유망주들에게 해줄 말도 많을 것이었다.

“그럴까? 사실 그러려고 온 거거든. 하하하.”

네덜란드어를 쓰려나, 아니면 프랑스어를 쓰려나.

두 가지 언어를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빌모츠지만, 한 번에 두 가지 언어를 할 수는 없었기에 고민이 될 것 같았다.

보통 프랑스계보다는 네덜란드계가 상대 언어를 더 잘 사용했기 때문에 함께 있을 때는 프랑스어를 사용했지만, 글쎄.

어떻게 대응할지 궁금하긴 했다.

***

“벤테케, 강력한 슈팅!! 아! 데 브라위너! 데 브라위너가 밀어 넣었습니다! 벨기에의 역전 골! 벨기에, 경기 종료 직전에 역전 골을 터뜨리면서 승리까지 한 걸음만을 남겨놓습니다!”

성배와 콤파니, 베르마엘렌 등이 후반 시작과 동시에 교체되면서 벨기에는 2진급과 유망주들로 불가리아전을 치렀다.

그리고 주전급 선수들이 모두 빠진 동안 선취 골을 내줬던 벨기에는 경기 종료 직전에 두 골을 몰아치며 역전에 성공했다.

“괜찮은데? 나이랑 커리어에 비하면 다들 잘해주고 있어.”

콤파니의 말대로였다.

아자르와 루카쿠가 합작해 만들어낸 동점 골에 이어 역전 골은 벤테케와 데 브라위너가 함께 만들어냈다.

새롭게 등장한 많은 유망주들 중에서도 특히나 중요한 선수들이 A매치의 중압감을 이겨내고 좋은 활약을 보여준다는 것은 굉장히 좋은 소식이었다.

유망주에게 A매치에서의 공격 포인트는 성장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줄 수 있었다.

“내가 말했지?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FIFA랭킹 1위 찍을 거라고.”

2015년 중반이 넘어서야 FIFA랭킹 1위를 차지했던 벨기에 국가대표팀.

성배는 그 기간을 최소 2년 이상 당길 생각이었고, 조짐은 좋았다.

< 낭만필드 - 228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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