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225 (9권) >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
이번 맨체스터 더비는 시작하기 전부터 모두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던 빅매치였다.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았지만, 이번 시즌부터는 결과를 절대 예상할 수 없는 더비였고, 프리미어리그를 지배하는 전통의 강호와 치고 올라오는 신흥 강호의 대결이기도 했다.
언제나 새로운 바람이 불기를 원하는 팬들의 기대치를 채워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경기이기도 했다.
소문난 잔치였다.
“깁슨, 다시 볼을 뒤로 물립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오늘은 정말 안정적으로 경기를 운영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먹을 게 없었다.
비록 잉글랜드가 아닌 한국의 격언이었지만, 사람 사는 건 어디든 다 똑같았다.
잉글랜드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며 일주일, 아니, 그 이상의 시간 동안 축구 팬들의 관심을 받았던 이번 맨체스터 더비.
아직 전반 중반에 불과하지만, 지금까지는 실망스러웠다.
“맨체스터 시티가 이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그리고 퍼거슨 감독에게도 부담스러운 상대가 되었다는 거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이렇게까지 안전하게 플레이하는 건 오랜만에 보네요.”
양 팀이 딱히 보여주는 게 없고 경기 대부분이 게임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었다.
말이 좋아 만들어나가는 거지, 알기 쉬운 단어로 이야기하면 그냥 볼을 돌리고 있었다.
중계진도 중계하기 곤혹스러운 경기 내용이었다.
“스콜스, 오른쪽으로 크게 벌려줍니다!! 드디어 돌파 나옵니까? 아, 박, 다시 중앙으로 돌려주고, 플레처, 밑으로 내려갑니다. 왼쪽의 에브라에게.”
스콜스의 패스가 그라운드를 세로로 가르며 측면으로 연결되었을 때, 중계진은 소리를 지르며 분위기를 띄워보려 노력했다.
별것 아닌 전진 패스 한 번에 목소리를 높일 정도로 경기 자체가 루즈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을 다시 한 번 배신하면서 맨유 수비라인으로 다시 볼이 내려갔다.
‘나올 생각을 안 하니 뭘 할 수가 있나.’
맨체스터 시티의 후방 라인에 자리 잡은 성배는 그라운드 전체를 눈에 담았다.
경기가 워낙 루즈하고 느리게 진행되다 보니 뒤에서 분석할 시간도 많았다.
‘일단 공간이 나와야 뭘 하든 말든 할 텐데.’
맨체스터 시티가 프리미어리그 우승도 차지하는 등 본격적인 전성기에 접어들기 시작하려면 아직 1, 2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전성기의 맨체스터 시티와 지금의 맨체스터 시티는 살짝 성격이 달랐다.
지금의 맨체스터 시티는 아직 미완성의 팀이었다.
“맨체스터 시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나오질 않으니까 아무것도 못 합니다.”
지금 맨체스터 시티의 선수 구성을 보면 경기가 소강상태에 접어들거나 상대가 공간을 내주지 않았을 때, 억지로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창의적인 선수가 없었다.
다비드 실바, 사미르 나스리 등의 플레이 메이커는 아직 맨체스터 시티에 합류하지 않았다.
“배리, 오른쪽으로 볼 투입, 아담 존슨의 돌파 시도! 아! 에브라를 뚫어내기엔 무리였습니다. 에브라, 볼 빼내서 깁슨에게.”
그래서 맨체스터 시티의 공격은 단순해질 수밖에 없었다.
플레이 메이커가 없다는 맨체스터 시티의 약점을 후벼 판 퍼거슨 감독의 전술에 맨시티는 홈에서 답답한 경기를 펼쳐야 했다.
“데 용, 테베즈에게 이어줍니다. 테베즈, 상당히 내려와서 플레이하고 있습니다.”
볼 자체가 잘 돌지 않으니 최전방의 테베즈나 아데바요르에게 볼이 쉽게 투입되지 못했다.
활동량이 넓은, 쉽게 말해 루니와 비슷한 역할을 맡아 줄 수 있는 테베즈는 답답함에 직접 내려와서 볼을 받아주기 시작했다.
‘카를로스가 자꾸 저렇게 내려오면 마무리하기가 힘들어질 텐데.’
하지만 테베즈에게도 한계는 있었다.
공격형 미드필더와 윙어까지도 소화할 수 있는 선수이긴 하지만, 전문 공격형 미드필더들처럼 창의적인 패스를 투입해주는 선수는 아니었다.
테베즈의 장점은 어디까지나 활동량과 부지런한 수비 가담, 낮은 무게중심을 활용한 돌파 등 개인 기량에 있었다.
팀의 공격을 조율해주길 바라는 건 무리였다.
‘알렉스 퍼거슨. 역시 무섭네.’
최근 맨체스터 시티의 기세는 무서웠다.
세 경기에서 열네 골을 득점했다는 것이 이를 증명했다.
하지만 퍼거슨 감독은 평소와 같은 선발 명단으로 이런 맨체스터 시티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저런 걸 보면 감독도 참... 머리도 아프겠지만, 재미있겠어.’
생각한 대로 게임이 이뤄진다는 것.
그리고 그런 선수들을 데리고 있다는 것.
생각해보면 참 재미있을 것 같았다.
***
“전반전이 드디어 끝납니다. 이야, 정말... 기대했던 경기가 이렇게 흘러갈 거라고는 예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맨체스터 시티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것까지는 퍼거슨 감독의 예상대로 이뤄졌다.
하지만 만치니의 수도 완전히 막힌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만치니의 선수단이 해낸 일이었다.
수비에 먼저 신경을 썼던 맨유의 선수단 역시 맨시티의 수비를 뚫어낼 정도의 공격력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었다.
“일단 전반전은 끝났는데요, 양 팀 모두 하프타임에 뭔가 변화가 필요할 거예요. 처음부터 컨셉을 잡고 나온 맨유야 그렇다 치더라도, 만치니 감독의 머리는 좀 복잡해지겠는데요?”
굳이 전반전의 승자를 꼽으라면 맨유였다.
맨유도 이렇게까지 지루한 경기를 생각하진 않았겠지만,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나왔을 것이었다.
맨유의 설계로는 이런 경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후반전에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가야 해. 여긴 우리 홈이고, 무승부로 끝나면 우리 손해야.”
하프 타임, 만치니 감독은 맨시티 선수들을 모아놓고 후반전 구상에 들어갔다.
현재까지는 퍼거슨 감독과의 지략 대결에서 완벽하게 패배하며 끌려가고 있었다.
“맨유가 이렇게까지 수비적으로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내 잘못이야.”
1974년부터 감독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퍼거슨과 1981년에 선수로 데뷔한 만치니.
두 사람의 감독 경력 차이는 굉장했다.
그리고 이런 경력 차가 아니더라도 퍼거슨과의 지략 대결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지금 잘잘못이 문제가 아니고, 후반전에 어떻게 경기를 운영해야 하는지, 그게 중요한 것 같은데요.”
성배의 말처럼 지금 와서 누구의 잘못인지 가리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미 경기의 절반이 끝나버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후반전에 역습을 가할 수 있고, 승리를 따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 그 말이 맞아. 이대로 끝낼 수는 없으니까.”
비록 1승 2무로 이번 시즌 상대 전적에서 앞서고 있다고는 하지만, 맨유를 향한 복수의 칼날을 갈아왔던 것도 맨시티였다.
맨유의 의도대로만 흘러가다가 무승부로 끝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가레스. 나이젤. 맨유의 핵심은 중원인데, 어떻게 생각해?”
오늘 맨유 전술의 핵심은 역시 두터운 중원에 있었다.
그 중원을 직접 상대하는 배리와 데 용이 그 약점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약점은 대런이죠, 뭐.”
배리가 입을 열었다.
“당연히 깁슨 말하는 거지? 플레처 말고.”
데 용이 웃으며 말을 보탰다.
오늘 맨유 중원을 담당하고 있는 세 명의 선수 중 깁슨과 플레처의 성은 스펠링 한 개를 제외하고 똑같았다.
발음도 거의 비슷한 대런.
하지만 둘의 기량 차이는 상당했다.
“역시. 그렇다면 어떻게 공략해야 할 것 같은데?”
대런 플레처가 본격적으로 포텐셜을 폭발시킨 건 2008/09시즌 중반부터였다.
왕성한 활동량과 준수한 수비력, 타고난 성실함을 바탕으로 수비형 미드필더 포지션이 약점이었던 맨유에 없어서는 안 될 선수로 성장했다.
하지만 깁슨은 아니었다.
“뭐... 그냥 자연스럽게 놔두면 공략이 될 것 같은데요? 활동량도 부족하고 뛰지도 않는 데다가 중거리 슈팅만 조심하면 마땅히 위협적인 선수도 아니니까요.”
배리의 말이 깁슨의 현재 위상을 정확히 설명했다.
뛰어난 중거리 슈팅 능력, 그리고 기대 이하의 여타 능력들.
인상적인 중거리 슈팅 능력으로 퍼거슨 감독의 기대를 받으며 중용된 깁슨이었지만, 중앙 미드필더치고는 턱없이 부족한 활동량을 비롯, 다른 약점들도 많아 계륵이 되어가고 있었다.
“가레스 말대로라면 중앙 공략에 해답이 있겠네요.”
성배도 깁슨의 그러한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팬들마저도 왜 이렇게까지 깁슨을 중용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다크 템플레처’라는 별명이 생길 정도로 존재감이 약했던 플레처도 퍼거슨 감독이 중용한 끝에 포텐셜이 터졌기 때문에 가만히 두고 보는 것이지, 감독이 퍼거슨이 아니었다면 이미 예전에 비판이 쇄도했을 것이었다.
“좋아. 정확해. 지금 보면 깁슨의 부족한 활동량을 박이 메워주는 그림이야.”
퍼거슨 감독도 그런 깁슨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약점을 박인진의 활동량으로 메우는 중이었다.
덕분에 박인진의 공격은 제한되고 있었지만, 적어도 중원에서 밀리는 일은 없었다.
“카를로스. 후반전에는 일단 중원으로 자주 내려오도록 해. 그리고 뱅상하고 콜로. 라인을 좀 높여. 중원 싸움에 도움을 줄 수 있을 정도로.”
퍼거슨 감독이 윙어 박인진을 중원 장악에 활용한 것처럼 만치니 감독 역시 테베즈와 센터백 라인을 활용하기로 했다.
일단 숫자부터 맞춰놓고 보자는 것이었다.
테베즈는 2선에서도 충분히 제 몫을 해줄 수 있는 선수였고, 두 명의 센터백은 발이 빨라서 라인을 높인 채 유지해줄 수 있는 선수들이었다.
‘투톱을 계속 쓸 거라면 활동량이 좋은 윙어가 필요하겠는데.’
투톱을 활용하면서 중원 쪽에 투입될 인원이 적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왼쪽 윙어인 벨라미는 본래 공격수 출신이었고, 오른쪽 윙어인 존슨은 체력이 좋지 않아 활동량과 수비 가담 능력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안 그래도 중원의 숫자가 적은 상황에서 양쪽 윙어의 활동량이 부족하다는 것은 오늘과 같은 문제점을 노출할 수밖에 없는 약점이었다.
“후반전은 그렇게 가고, 박이 중앙으로 자주 이동하게 만들어. 그러다 보면 왼쪽 측면에서 기회가 생기겠지. 크레이그, 그리고 주. 그 기회를 놓치지 마.”
박인진이 오늘 맡은 역할은 굉장히 중요했다.
오늘 맨유 전술의 핵심인 중원 장악을 위해 깁슨이 가지고 있는 활동량의 약점을 커버해야 했고, 기량이 상당히 많이 떨어진 네빌까지 도와야 했다.
그 정도로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고, 잘 수행하고 있는 박인진이지만, 맨시티는 구멍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맡은 역할이 과중한 박인진을 교란시키기로 했다.
“아무리 사람 같지 않은 체력 괴물이라고 해도 계속 뛰어다니다 보면 지치겠죠. 알겠습니다.”
박인진이 흔들리면 중원과 오른쪽이 동시에 흔들리게 될 것이었다.
그 정도로 박인진의 역할이 중요했고, 퍼거슨 감독은 박인진에게 큰 신뢰를 보내주고 있었다.
‘잘만 되면 바로 끝이겠는데.’
맨시티의 의도대로 경기가 흘러가 박인진이 빠진 상황에서 왼쪽 공략이 이뤄진다면, 이제는 노련함밖에 남지 않은 네빌 혼자서 리그 최고 수준의 파괴력을 자랑하는 벨라미와 성배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박인진이 흔들릴 경우, 그 역할을 대신해 줄 선수는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전반전 내내 기분 나쁘게 끌려가야만 했던 맨시티는 후반전을 앞두고 반격을 준비했다.
< 낭만필드 - 225 (9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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