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218 >
“맨체스터 시티의 승리가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스탬포드 브리지의 분위기가 침울합니다.”
3-0으로 앞선 채 후반전 40분이 지나갔다.
스탬포드 브리지에서 첼시를 위한 OT 타임이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따라잡기 힘든 차이였다.
첼시 팬들은 당연히 침울해하고 있었다.
1차전 맨체스터 원정에서도 패배했던 첼시였다.
홈에서 펼쳐지는 후반기 경기마저도 패배하면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었지만, 이미 패배가 확실시되어버렸다.
“배리, 오른쪽으로 열어줍니다. 라이트-필립스에게 연결되는 볼. 라이트-필립스, 콜을 상대합니다.”
첼시가 힘도 쓰지 못하고 패배한 원흉을 꼽으라면 몇몇 선수가 있었다.
체흐의 부상으로 대신 출전한 골키퍼 힐라리오, 벨라미를 막지 못한 이바노비치와 테베즈를 전혀 방해하지 못했던 카르발료 이 세 선수였다.
그리고 이외의 선수들도 주역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전혀 책임이 없을 정도로 잘해준 선수도 딱히 없었다.
그나마 애쉴리 콜은 제몫을 다한 선수 중 한 명이었다.
“라이트-필립스, 돌파 포기하고 돌아 나옵니다. 비에라에게 내주면서 숨을 고르는 맨체스터 시티.”
물론 애쉴리 콜도 공격적인 공헌을 해주진 못했다.
다만, 본업인 수비에서는 단단한 수비력을 선보였고, 자신이 막힌 것처럼 성배도 막아냈기에 패배에 큰 지분은 없었다.
“비에라, 오른쪽으로. 주, 올라오면서 받아냅니다.”
반면, 맨체스터 시티에서는 아쉬운 선수가 한 명도 없었다.
공격수, 수비수, 그리고 골키퍼까지도 모두 좋은 활약을 보여주면서 맨체스터 시티의 승리에 한 팔을 거들었다.
“주, 천천히 앞으로 전진합니다. 애쉴리 콜과 다시 한 번 만납니다.”
테리와 브리지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작지 않은 관심을 받았던 성배와 콜의 맞대결은 의외로 많이 벌어지지 않았다.
두 선수 모두 서로의 수비가 부담스러워서 돌파 자체를 거의 시도하지 않은 탓이었다.
공격 옵션이 많고 승리팀 맨체스터 시티 소속인 성배가 좀 더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둘 사이 맞대결의 승패는 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콜이 성배의 위에 있는 상황이 변하지 않을 터였다.
‘이제 좀 방심했으려나.’
그런 결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것도 만족스럽긴 하지만 어차피 이긴 경기, 마지막 시도 정도는 해볼 필요가 있었다.
‘오늘 마지막 맞대결이 될 것 같으니.’
둘의 오늘 게임 분위기를 봤을 때, 남은 5분 정도의 시간 동안 자주 부딪힐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마지막 대결에서 승리를 거둔 것으로 경기를 끝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서의 승리가 팬들의 뇌리에 남을 것이었다.
“오늘 두 선수가 직접접으로 맞부딪히는 장면은 기대했던 것만큼 많이 나오지 않았거든요? 콜의 돌파는 거의 통하지 않았고, 주는 돌파 자체를 시도하지 않았어요.”
풀백이라는 포지션은 팬들에게 어필이 잘 되는 포지션이 아니었다.
이는 평균 연봉과 몸값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포지션이든 최고를 가린다고 하면 이슈가 될 수밖에 없었고, 오늘 두 선수의 맞대결에 많은 관심이 쏠린 이유이기도 했다.
“주. 다시 한 번 반대편으로, 아닙니다! 돌파 시도!”
지금까지 애쉴리 콜과의 맞대결을 계속 피하고 킥으로 플레이를 전개했던 성배였다.
애쉴리 콜이 아무리 최고의 수비력을 보유한 선수라고 할지라도 방심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99% 이상의 확률이었다.
“콜이 뚫립니다! 주성배, 측면 돌파!”
그리고 성배는 그 틈을 노렸다.
80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돌파라는 선택지를 배제했던 것은 이 한 번을 위한 것이었다.
정확히 86분이라는 시간을 투자해 깔아놓은 성배의 함정에 애쉴리 콜마저도 당하고 말았다.
‘이걸로 승부는 끝이다.’
단 한 번의 돌파와 한 번의 기회.
86분의 시간을 투자해 겨우 잡아낸 이 한 번의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주, 오른발 크로스! 반대편으로 길게!”
아데바요르와 산타 크루즈가 없는 상황에서 평범한 크로스로는 득점을 노릴 수 없었다.
성배의 선택은 반대편 측면.
이바노비치를 떨쳐내고 침투한 벨라미를 향해 성배의 크로스가 떨어졌다.
“벨라미, 슬라이딩! 힐라리오의 옆구리 밑을 지나갑니다! 벨라미의 두 번째 골!! 맨체스터 시티, 경기 종료 직전에 네 번째 골까지 성공시키며 첼시를 완벽하게 침몰시킵니다!!”
벨라미의 두 번째 골, 그리고 성배의 어시스트가 첼시의 마지막 숨통까지 끊어버렸다.
테리를 향해 직설적인 비난을 가한 두 명의 공격수가 모두 두 골씩을 기록했고, 한 명의 수비수는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테리를 비난했던 모든 선수가 공격 포인트를 찍어냈다.
“첼시, 이렇게 박살이 나나요! 테리-브리지 사건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주목을 받았던 경기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치욕적인 스코어를 기록합니다!”
4-0.
첼시에게는 이보다 더 치욕적일 수 없는 스코어였다.
게다가 경기가 갖는 의미 역시 가볍지 않았다.
갑부 구단주의 힘으로 강팀이 되었다는 공통점과 잉글랜드를 뒤흔든 테리-브리지 스캔들이라는 스토리까지 있는 경기에서 첼시는 완벽하게 침몰했다.
***
마지막 순간, 1:1에서 애쉴리 콜을 완벽하게 제쳐내고 어시스트를 기록한 성배의 모습은 두 선수의 맞대결을 기다리던 팬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경기 내내 애쉴리 콜보다는 성배의 활약상이 더 눈에 띄었고, 만능형 풀백 애쉴리 콜의 플레이가 단조로워 보일 정도로 다양한 플레이 옵션을 자랑했다.
[김빠진 최고 레프트백 대전. 재미없는 주의 판정승.]
[“그래도 아직은 애쉴리 콜이죠.”. 승자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애쉴리 콜과 성배의 위상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두 선수의 정면 대결은 거의 펼쳐지지 않았고, 풀백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수비력에서는 둘 다 단단한 모습을 자랑했다.
다만, 선수의 실력을 떠나 누가 더 활용도가 높은 선수인지는 확실히 결론이 났다.
애쉴리 콜을 지지하는 팬들도 애쉴리 콜이 더 좋은 수비수지만, 선수로서 더 활용도가 높고 팀 전술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선수는 성배라고 인정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애쉴리 콜이라... 좋아. ‘아직은’이라는 단어가 붙은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야.’
그리고 성배는 그 결론에 만족했다.
애쉴리 콜과 자신의 나이 차이는 무려 7살.
이제 서른 줄에 접어든 애쉴리 콜이 슬슬 하락세를 맞이하게 되었다면, 스물세 살의 성배는 아직 전성기가 오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탑의 자리도 한 번 노려볼 수 있겠어.’
물론, 애쉴리 콜에 이어 등장할 경쟁자들도 만만치 않았다.
레이튼 베인스나 가엘 클리시, 파트리스 에브라가 콜의 자리를 놓고 지금도 경쟁 중이었고, 세자르 아스필리쿠에타 처럼 몇 년 안에 등장할 경쟁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신체 나이가 전성기로 접어드는 시점에 등장할 그들을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은 어느새 성배의 가슴속에 가득 차 있었다.
1, 2년 전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에브라는 한 세대 전 선수라고 봐야 하고, 베인스나 클리시는... 동년배라고 봐야 하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어. 아스필리쿠에타는... 좀 위협적인가.’
이들과 경쟁이 된다는 것 자체가 놀랄 만한 일이지만, 더 놀랄 일은 지금은 성배가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레프트백.
성배는 조금씩 천천히, 그렇지만 느리지 않게 그 자리를 향해 가고 있었다.
***
첼시와의 경기를 마친 성배는 크로아티아와의 친선 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국가대표팀에 합류했다.
크로아티아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월드컵 예선에서 잉글랜드를 밀어내고 포트A를 차지하며 1번 시드를 받았을 정도로 최근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모드리치, 콜파르트를 피해 중앙으로 내주고 크란차르, 슈팅!! 아. 크란차르의 슈팅이 골망을 가릅니다. 크로아티아의 선취 골.”
하지만 그 잉글랜드와 같은 조에 속하는 불운이 크로아티아를 따라왔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게까지 밀리며 조 3위로 월드컵 진출권을 놓쳤다.
그렇지만, 벨기에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성장한 유망주들을 중심으로 강팀으로 가는 과정에 있었다.
가까운 미래에 유럽 축구계의 주류가 될 가능성이 있는 벨기에와 크로아티아의 경기에 유럽 축구팬들의 관심이 모였다.
“크로아티아, 역시 어려운 상대네요. 시무니치를 중심으로 스르나, 프란지치, 올리치 등이 버텨주는 사이 신예들이 대거 나타나며 신구 조화가 완벽하게 이뤄졌습니다.”
분데스리가에서 잔뼈가 굵은 요시프 시무니치, 빅리그 소속 선수가 아님에도 세계 최고의 라이트백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다리오 스르나, 마찬가지로 분데스리가 정상급 스트라이커로 오랫동안 활약한 이비차 올리치와 견실한 미드필더 다니엘 프란지치.
다보르 수케르를 앞세워 월드컵 4강에 진출했던 구 유고슬라비아 황금세대의 은퇴 이후 잠시 주춤했던 크로아티아를 이끌고 여기까지 버텨온 베테랑들이었다.
“그렇습니다. 80년대 중반에 태어난 유망주들이 대거 나타나면서 굉장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망주를 넘어 크로아티아의 에이스가 되었다고 봐야 하는 85년생 루카 모드리치는 이제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 위로 84년생 니코 크란차르, 83년생 에두아르두 다 실바가 있었고, 그 아래로는 86년생 베르단 촐루카와 마리오 만주키치, 88년생 이반 라키티치와 89년생 데얀 로브렌까지.
“벨기에와 크로아티아 유망주들을 섞으면 최고의 팀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서로의 유망주들이 부럽겠어요.”
벨기에가 수비수 유망주들을 앞세워 팀의 리빌딩을 꾀하고 있다면, 크로아티아는 뛰어난 미드필더들, 플레이 메이커들을 앞세워 리빌딩을 꾀하고 있었다.
‘음. 우린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어.’
성배는 이 경기를 벤치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성배의 위상은 이미 언터쳐블의 위치에 있었고, 의외로 유리몸인 벨기에의 주전 수비수들을 받쳐줄 백업 멤버의 발굴이 필요하기도 했다.
‘1, 2년 정도는 더 필요할까.’
벨기에와 크로아티아는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전성기에 접어들기 직전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유망주가 집중된 포지션의 차이 외에 또 하나의 작은 차이도 있었다.
크로아티아의 핵심 유망주들이 80년대 중후반 출생의 선수들이라면, 벨기에의 핵심 유망주들은 80년대 중후반 출생과 90년대 초반 출생이 섞여 있었다.
“루카쿠, 옆으로 떨궈주고 아자르의 슈팅! 크로스바 위로 벗어납니다!”
그리고 아자르에 이어 90년대 초반에 태어난 또 한 명의 유망주, 로멜루 루카쿠가 국가대표로 데뷔했다.
오늘의 활약은 그렇게까지 인상적이지 못했지만, 나이를 감안하면 나쁘지 않았다.
‘이제 몇 명 안 남았어.’
나세르 샤들리, 케빈 데 브라위너, 라자 나잉골란, 크리스티안 벤테케, 시몬 미뇰레.
향후 1년에서 2년 사이 합류하게 될 벨기에 황금세대의 핵심 선수들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또 1, 2년이 지나면 디보크 오리지나 티보 쿠르트아 등도 합류하게 될 것이었다.
‘유로 2012부터 시작한다.’
오늘 경기는 0-1, 이대로 패배할 분위기였다.
하지만 성배는 겨우 친선 경기 결과에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 낭만필드 - 218 > 끝
ⓒ 미에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