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217 >
“콜도 섣불리 들어가지 못합니다. 대치가 좀 길어집니다.”
아무리 애쉴리 콜이라도 성배를 쉽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빠르게 달려온 콜은 성배를 앞에 두고 숨을 골랐다.
레프트백 포지션에서 최고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두 선수가 만들어내는 긴장감이 상당했다.
‘컷백? 크로스?’
애쉴리 콜은 EPL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도 최고의 자리를 논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선수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최고의 자리에 올랐고, 수년 동안 놓치지 않았다.
‘뭘 선택하든 콜의 공격력이면 충분히 막을 수 있어.’
보통 풀백 본좌라 불리는 선수들은 수비력보다 공격력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애쉴리 콜은 아니었다.
콜의 장점은 수비력에 있었다.
대인방어 스킬만 따지면 센터백들과 비교해도 압도하는 수준이고, 반응속도와 스피드가 매우 뛰어나 돌파 자체를 잘 허용하지 않았다.
거기에 경기를 보는 눈이 좋아 한발 앞서 예측한 뒤 막아내고, 선수에 따라 상대하는 법을 달리할 줄 알았다.
“과감한 직선 돌파 시도! 주, 떨어지지 않고 따라붙습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최고가 될 수 없었다.
최고 소리를 듣는 풀백답게 당연히 공격력도 나쁘지 않았다.
완벽에 가까운 공수밸런스를 갖추고 있다는 평가답게 오버래핑을 비롯한 공격력도 모두 수준급이었다.
신체 능력이 뛰어나 그렇지 않을 것처럼 보이지만, 깊게 파고들면 성배와 비슷한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완벽한 태클! 콜의 돌파를 간단히 막아내며 볼을 사이드라인 바깥으로 걷어냅니다!”
성배 역시 공격력보다는 수비력에 더 자신이 있었고, 공격력이 아닌 공수밸런스가 장점이었다.
공격 포인트가 높은 것은 킥이 워낙 좋았기 때문으로, 상대의 급소를 순간적으로 노리는 것이지, 마이콘이나 다니 알베스처럼 측면을 파괴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즉, 두 선수 모두 상대의 단단한 수비를 일대일로 뚫어낼 정도의 공격력은 갖추지 못했다.
“첼시의 스로인, 말루다에게! 주, 뒤에서 강하게 부딪힙니다!”
맨체스터 시티의 오른쪽 측면에서 첼시의 스로인으로 경기가 재개되었다.
볼을 건네받은 말루다의 뒤로 바짝 달라붙은 성배는 적극적으로 몸싸움을 펼치며 말루다를 밀어냈다.
“말루다, 돌아 나오려 하지만 끊깁니다! 주, 바로 올라갑니다!”
말루다에게서 볼을 빼낸 성배는 지체하지 않고 오른쪽 측면을 통해 첼시 진영으로 넘어갔다.
말루다는 아웃, 콜이 성배를 저지하기 위해 달려왔다.
‘돌파가 힘들다.’
성배는 자신에 대한 평가가 정확한 선수였다.
애쉴리 콜의 뛰어난 수비력과 자신의 공격력을 비교해봤을 때, 정면 돌파가 힘들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굳이 정면 대결을 고집할 필요는 없지.’
첼시를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둬야 한다는 것은 팀의 목표고, 개인적인 목표는 ‘애쉴리 콜보다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것’.
직접 정면으로 붙어서 꺾는다면 그것이 베스트겠지만, 그럴 능력이 아직까지는 부족했다.
‘어차피 콜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기만 하면 돼.’
콜의 공격적인 역할은 모두 직접 돌파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주, 돌파하지 않고 바로 길게 이어줍니다! 전방의 아담 존슨!”
성배에게는 이젠 자를 넘어 컴퓨터로 잰 듯한 정확한 롱패스가 있었다.
굳이 콜을 직접 상대하지 않고도 충분히 공격에서 큰 역할을 해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서로 돌파가 불가능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직접 돌파하지 않아도 되는 내가 유리하지.’
솔직히 말해서 애쉴리 콜처럼 상대 공격수들을 완벽히 압도할 자신은 아직 없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애쉴리 콜과의 맞대결에서 판정승 정도는 거둘 자신이 있었다.
애쉴리 콜이 강력한 검과 방패를 가지고 있다면, 자신은 활과 방패를 가지고 있었다.
“존슨의 크로스를 테베즈가 밀어 넣습니다! 맨체스터 시티, 선취 골! 스탬포드 브리지에서 선취 골로 앞서 나갑니다!”
성배의 롱패스는 곧바로 득점이 되었다.
애쉴리 콜이 뭔가를 해볼 틈도 없었다.
성배는 그와 전혀 부딪히지 않고도 하나의 득점을 만들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화살이라.’
성배와 콜.
두 선수가 팀의 공격에 기여할 수 있는 넓이의 차이가 드러난 맨체스터 시티의 선취 골 상황이었다.
***
전반전 종료 직전, 테베즈의 선취 골이 터졌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체력이 떨어지면서, 그리고 선취 골이 터지면서 맨체스터 시티 선수들의 몸에서 쓸데없이 들어가 있던 힘이 빠졌다.
본격적인 공세의 시작이었다.
“램파드, 볼을 받았는데 줄 곳이 없습니다! 오른쪽으로 억지로 벌려줍니다!”
맨체스터 시티 선수들의 좋은 컨디션이 드디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첼시의 미드필더들이 공격을 전개하려고 해도 패스를 할 곳이 없었다.
오늘 경기를 앞두고 첼시는 오른쪽 측면을 중심으로 한 전술을 준비했었기 때문에 줄 곳이 없으면 오른쪽으로 벌려주는 경우가 많았다.
“브리지의 중간 차단! 브리지, 공격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전술은 브리지가 맞이한 그 날에 막힌 지 오래였다.
안 그래도 경기 출전 기회가 적었던 브리지였다.
여기에 이번 사건까지 겹치며 경기력이 떨어졌을 것이라는 안첼로티 감독과 첼시 선수들의 예상을 한참 빗나간 브리지의 훌륭한 활약.
이미 경기 시작 전부터 첼시의 계산이 꼬여버렸다.
“브리지, 아일랜드에게 연결! 아일랜드와 배리, 데 용이 볼을 주고받습니다!”
윙어를 활용했지만, 중원 장악도 놓치지 않았다.
오늘 맨체스터 시티는 아데바요르를 빼고 아일랜드를 투입했다.
테베즈를 원톱으로 하는 4-2-3-1전술이었다.
“아일랜드, 배리에게! 배리, 왼쪽으로 원 터치 패스! 벨라미가 달립니다!”
만치니 감독은 중원 장악력에 초점을 맞출 때는 배리, 데 용에 비에라를, 중원에서의 공격 전개에 초점을 맞출 때는 배리, 데 용에 아일랜드를 조합했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 나쁘지 않은 모습으로 맨체스터 시티의 상승세에 한몫을 해주었다.
“이바노비치, 벨라미를 막지 못합니다! 중앙으로 툭 치고 바로 중거리 슈팅!! 골!! 골입니다!! 벨라미의 골! 맨체스터 시티, 벨라미의 추가 골로 두 골 차 리드를 잡습니다!!”
배리의 절묘한 패스와 벨라미의 한 박자 빠른 슈팅이 만들어낸 추가 골이었다.
후반전 시작과 거의 동시에 터진 추가 골.
스탬포드 브리지를 가득 메운 첼시 홈팬들은 싸한 기분을 느꼈다.
“콜, 왼쪽에서 오버래핑! 측면으로 달립니다! 다시 한 번 주와 맞대결!”
오늘 첼시의 측면 공격은 별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한창 좋을 때보다도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브리지의 활약이 인상적이었고, 성배의 활약이야 굳이 또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말루다와 콜, 콜과 이바노비치의 양 측면도 어디 가서 약하다는 소리는 절대 들을 일 없는 조합이었지만, 오늘 맨체스터 시티는 절대 패배하면 안 된다는 굳은 결의로 경기에 나선 상황이었다.
‘무서운 건 공격력 때문이 아니지.’
애쉴리 콜과 몇 번 붙어보면서 콜의 공격력은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고 확신했다.
경기 전에 분석했을 때도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붙어보면서 확신할 수 있었다.
애쉴리 콜이 부담스러운 이유는 그 수비력 때문이었다.
“콜의 돌파 시도! 아, 하지만 뚫어내지 못하고 뒤로 돌아섭니다!”
돌파를 시도하려던 콜은 성배의 수비에 저지당하면서 다시 뒤로 돌아나갔다.
돌파는커녕 볼을 지켜내는 것도 겨우 해냈고, 놀라서 물러났다.
“콜, 램파드에게 돌려주고 밑으로 내려갑니다.”
결국, 콜은 오버래핑을 포기하고 다시 조금 더 밑으로 내려가 자리 잡았다.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풀백 두 선수가 붙으니 이런 결과가 나오는군요. 활발하게 오버래핑을 올라가는 두 선수인데, 오늘은 영 그런 모습을 보기가 힘드네요.”
지금은 콜이 막혔지만, 성배 역시 매한가지였다.
그나마 롱패스라는 다른 무기를 활용해 공격에 한 손 보태고 있는 것이었고, 성배는 아예 돌파를 거의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이번엔 말루다에게 연결! 말루다, 주와 다시 한 번 맞붙습니다.”
하지만 두 선수 모두 수비에서는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존슨이 콜이 없는 틈을 타 어시스트를 기록하긴 했지만, 그다음부터는 꽁꽁 막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성배 역시 마찬가지였다.
“말루다, 중앙으로 몰고 들어가지만, 바로 태클! 간단히 빼냅니다!”
반대 발 윙어가 중앙 쪽으로 이동해 직접 득점을 노리는데 특화되어 있다면, 반대 발 풀백은 중앙으로 올라오는 상대 윙어를 막아내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안쪽 발이 주로 사용하는 발이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오는 상대의 움직임을 막아내기 수월해서라는 이야기가 있기는 했다.
“이번 시즌, 드디어 리옹 시절의 모습을 어느 정도 회복한 말루다인데, 주에게는 안 되네요.”
리옹에서 뛸 때는 그야말로 ‘말루 다’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활약을 보였던 말루다였다.
잘 키운 윙어 한 명이 팀을 먹여 살리는 경우였다.
그런데 첼시 이적 이후에는 리옹 시절의 폭발적인 드리블과 득점력이 나오지 않았고, 히딩크 감독 체제 이후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은 준수한 수준에 불과했다.
“다시 흘러나온 볼이 발락에게. 발락, 결국 포백 라인으로 볼을 돌립니다.”
결국, 발락은 볼을 아예 최후방으로 내리면서 다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첼시는 어쩔 수 없어요. 중앙을 노리는 수밖에 없어 보이네요.”
발락, 램파드, 아넬카, 드록바.
오늘 첼시 공격에서 그나마 기대를 걸어볼 선수들은 이들이 유일했다.
그나마도 측면에서 맨시티가 워낙 압도하고 있어서 비교적 할만하다는 이야기지, 중원에서 첼시가 우위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거 맨체스터 시티가 무난하게 브리지의 원수를 갚는 그림인데요? 역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승리하는 권선징악으로 마무리되나요?”
이미 전체적인 분위기는 맨체스터 시티가 확실하게 장악한 상황이었다.
스탬포드 브리지의 마법도 맨시티 선수들의 분노 앞에서는 그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
“테베즈의 골! 테베즈, 오늘 경기 두 번째 골입니다! 리그 15호 골! 첼시, 완전히 무너집니다!”
후반 30분, 테베즈의 골이 터졌다.
0-3.
스탬포드 브리지의 전광판에 떠오른 스코어였다.
첼시의 홈에서, 그것도 안 필드나 올드 트래포드 못지않은 홈팀의 성지라 불리는 그곳에서 첼시를 완벽하게 무너뜨린 것이었다.
“첼시, 이거 타격이 큰 데요? 이 경기는 그냥 리그 한 경기 이상의 의미가 있거든요? 경기 시작 전부터 테리를 향해 엄청난 분노를 퍼부은 테베즈가 두 골을 폭발시키네요. 분노의 힘인가요?”
테베즈가 두 골, 벨라미가 한 골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 두 선수의 공통점은 경기 시작 전 인터뷰에서 테리를 비난했다는 것이었다.
맨체스터 시티 선수들 모두 테리에게 분노했지만, 그것을 겉으로 표현한 선수는 테베즈와 벨라미, 그리고.
“이제 주성배 선수만 남았나요? 주까지 득점에 성공한다면 테리에 대한 완벽한 복수가 될 텐데요.”
성배였다.
‘나도 한 골 넣어야 하는 건가?’
성배도 신경은 쓰고 있었다.
정 뭐하면 어시스트라도 한 개 기록하고 싶었다.
경기의 분위기가 그렇게 만들었다.
< 낭만필드 - 21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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