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213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경기를 조심스럽게 운영하기 시작합니다.”
그 어떤 주심도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결국, 루니는 한 개의 옐로우 카드를 더 받으면서 퇴장당했다.
안 그래도 선수들의 체력이 빠지는 시점에서 루니까지 퇴장당해 수적인 열세에 놓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수비적으로 경기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연장전과 승부차기까지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공격의 핵심인 긱스, 스콜스가 아무래도 나이가 있다 보니 체력적으로 부담이 있거든요. 그렇다고 교체해주기에는 두 선수의 비중이 워낙 커서 그것도 힘들고요.”
루니의 퇴장 이후 공격수가 없어진 맨유는 캐릭을 빼고 베르바토프를 투입했다.
그리고 수비적인 경기를 운용하기 위해 박인진의 위치를 아예 거의 중앙 쪽으로 옮겨버렸다.
어차피 오늘 오른쪽에서는 공격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부담 없이 옮길 수 있었다.
‘연장전으로 가도 나쁘진 않지만.’
그리고 맨체스터 시티 입장에서도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수적으로 부족해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시간이 지날수록 체력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맨시티도 조금 더 시간을 끌면서 맨유 선수들의 체력을 바닥낸 뒤 공격을 진행하는 선택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굳이 무리하지 않았다.
‘선택권은 어차피 우리한테 있지.’
확실한 것은 경기 운영에 대한 선택권을 맨시티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맨시티가 원하는 대로 몰아칠 수도 있었고, 체력 소모를 목적으로 볼을 돌릴 수도 있었다.
“벨라미의 돌파가 에반스에게 막히고, 스콜스가 따라갑니다.”
에반스가 클리어한 볼이 오른쪽으로 흘렀다.
스콜스가 볼을 따라가고 있었는데, 오버래핑해 올라온 성배와도 가까운 위치였다.
‘하나 만들 수 있겠어.’
상황을 확인하고 생각을 마친 성배는 스콜스의 뒤에서 전력으로 따라붙었다.
“뒤에서 주! 주! 주가 끊어냅니다!”
뒤에서 빠르게 다가간 성배가 스콜스보다 한발 앞서서 왼발로 볼을 건드렸다.
빠르게 다가와 몸을 들이밀며 볼을 따낸 성배로 인해 스콜스의 중심이 흔들렸고, 그 사이 볼은 성배의 차지가 되었다.
“맨유의 수비라인, 아직 정비되지 않았습니다!”
조금 전 벨라미의 돌파로 흐트러진 맨유의 수비진이 정비되기 전이었다.
성배는 천천히 전진하면서 맨유 수비라인을 확인했다.
‘이건 틈이 나오겠다.’
계산을 끝낸 성배는 벨라미에게 볼을 내주고 박스 안으로 파고들었다.
볼이 벨라미에게 연결되면서 에반스의 시선이 벨라미에게 옮겨갔다.
그 틈을 타 성배는 에반스의 등 뒤로, 에반스와 하파엘 사이로 파고들어 박스 안쪽에 진입했다.
“벨라미, 원터치로 다시! 일대일 찬스!”
벨라미의 패스가 수비진 머리 위를 넘어 다시 성배에게 이어졌다.
반 데 사르 골키퍼가 급히 따라 나왔고, 에반스는 성배의 침투를 몰랐기 때문에 한참 뒤에 있었다.
퍼디난드는 성배를 반 데 사르에게 맡기고 비어버린 골대를 커버하기 위해 달려갔다.
‘좋아. 아무도 못 막겠다.’
그렇게 수비수들의 위치를 파악한 성배는 노마크로 놓인 동료를 발견했다.
테베즈.
테베즈가 페널티박스 중앙 부근에서 혼자 달리고 있었다.
“일대일 찬스에서 중앙으로! 테베즈 침투하면서 헤더!! 골! 골입니다! 종료 직전에 테베즈의 골이 터집니다!!”
원하는 대로 볼을 컨트롤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성배는 몸을 날려 제기를 차는 것처럼 인사이드로 테베즈에게 넘겨주었다.
테베즈는 몸을 날리며 머리를 가져다 댔고, 퍼디난드가 어떻게든 막아보려 몸을 날렸지만, 볼은 그를 스치며 골망을 갈랐다.
“이건 크네요! 맨체스터 시티, 2-2 동점을 만들어냈어요! 1차전에서 맨체스터 시티가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이대로라면 맨시티가 결승에 진출하게 되는데요!”
85분.
루니의 퇴장 이후 5분 만에 터진 테베즈의 동점 골이었다.
‘쟤들 약속이라도 한 건가.’
결정적인 골을 기록한 테베즈는 골 세리머니를 하며 달려갔다.
전반기 아스날전에서 아데바요르가 보여준 것과 비슷한 세리머니였다.
“테베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서포터들 앞으로 미끄러집니다!”
아데바요르도, 테베즈도 이전 소속팀과 관계가 좋지 못했다.
테베즈는 팬들의 지지는 받고 있었지만, 이후 불가침 지역인 퍼거슨 감독을 건드리면서 팬들에게도 비난을 받았다.
“맨유 서포터즈, 테베즈를 향해 거센 야유를 보냅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본인들이 완전 영입을 포기한 테베즈에게 결정적인 실점을 허용하며 칼링컵 결승 진출이 좌절되는 분위기입니다!”
물론, 칼링컵이 그리 비중이 큰 대회는 아니었지만, 중요한 건 칼링컵의 비중이 아니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이번 4강전에서 맨체스터 시티와의 맨체스터 더비를 맞아 1차전과 2차전 모두 주전 선수들을 모두 출전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강에서 탈락한다는 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자존심을 구기는 결과였다.
“기분 되게 좋은가 보네.”
“당연하지. 아주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라고. 하하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자존심을 종이짝처럼 구겨버린 그 골의 주인공이 테베즈였다.
테베즈의 밝은 표정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서포터들의 분노한 표정이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 *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부딪힌 칼링컵 4강전의 스타는 카를로스 테베즈였다.
마지막 결승 골도 결승 골이었지만, 세리머니의 임팩트가 강렬했다.
세리머니 한 방으로 칼링컵 4강전의 임팩트는 테베즈가 모두 가져갔다.
[맨체스터 더비의 진주인공 주성배. 맨시티의 결승을 이끌다.]
[억울하게 스포트라이트를 잃은 진짜 주인공.]
[선취 골, 루니의 퇴장, 결승 골 어시스트까지. 주성배, 맹활약!]
하지만 테베즈가 모든 이슈를 끌어갔다고 해서 진짜로 승리를 이끌었던 성배의 활약이 묻힐 리 없었다.
테베즈의 세리머니와 사연이 임팩트가 흘러넘쳤을 뿐, 승리의 일등공신이 성배라는 것은 모두 알고 있었다.
맨체스터 시티의 왼쪽 측면을 단단하게 잠갔고, 답지 않은 화려한 돌파로 선취 골과 어시스트까지 기록하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에이스, 웨인 루니의 퇴장까지 이끌었으니 누가 봐도 승리의 일등공신이었다.
ㄴ 주성배... 진짜 어떡하지? 중요한 순간마다 일을 풀어주는 건 항상 주성배야. 진짜 이 사람 안 데려왔으면 도대체 어쩔 뻔했음?
ㄴ 뭘 어떡해. 우리 망하는 거지. 혹시 진짜 ‘Prophet’인 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래?
ㄴ 확실히 대단하긴 대단하네요. 작년에는 맨유 만날 때마다 고전해서 굳이 데려올 필요 있나, 싶었는데 맨유가 아니라 호날두가 문제였나 봐요.
ㄴ 하는 거 보면 전혀 걱정이 안 됩니다. 작년에는 몰라도 앞으로도 계속 호날두한테 밀릴 거라는 생각은 안 든다고 해야 할까요? 어쩌면 미래의 All-Time NO.1 레프트백을 보고 있는 것일 수도...
ㄴ 에이, 그 정도는 아니다. 정말 좋은 선수이긴 하지만, 타고난 조건이 좀 떨어져서 올타임까지는 좀. 한 시대를 풍미할 수준까지는 무조건 올라가겠지만, 그 이상은 힘들 것 같음.
이번 시즌 성배의 기량은 지난 시즌까지보다 또 한 계단 올라온 모습이었다.
지난 시즌 막판, 과거의 잔재였던 하나의 벽을 깨뜨린 성배는 치명적이었던 약점 하나를 없애고 또 한 번 발전한 모습을 선보였다.
프리미어리그의 레프트백 중 독보적인 위상을 자랑했던 애쉴리 콜의 위치까지도 위협하는 수준이었다.
11만 2천 유로의 주급이 거품이라던 사람들조차 지금과 같은 활약을 계속 보여줄 경우, 그 돈이 아깝지 않다고 말할 정도였다.
* * *
이번 겨울 이적시장은 겨울 이적시장이라는 게 믿기 힘들 정도로 조용히 지나갔다.
프리미어리그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유럽의 모든 팀들이 이번 겨울을 조용히 보냈고, 겨울 이적시장만의 특징인 패닉 바이가 한 건도 없었다.
이번 이적시장에서 가장 비싼 이적료를 기록한 선수는 파르마에서 인테르로 이적한 맥도날드 마리가로 몸값이 1,000만 유로도 되지 않는 유망주였다.
본명은 맥도날드 마리가 완야마.
그리고 성배의 기억 속에는 나름 유망한 선수였지만, 나중에는 사우스햄튼 소속의 빅터 완야마의 친형으로 더 많이 알려질 선수였다.
맨체스터 시티 역시 미들스브로에서 유망주 윙어 아담 존슨을 영입하는 것에 그쳤다.
미드필더 두 명, 수비수 두 명을 영입하겠다던 만치니 감독은 비에라를 임대하고 아담 존슨을 영입하는 것으로 이번 이적시장을 끝냈다.
반면 내보낸 선수들은 많았다.
야심차게 영입했던 조와 호비뉴, 두 명의 브라질리언 공격수들이 임대를 가장해 사실상 팀을 떠났고, 나름 유망주로 키워주었던 블라디미르 바이스 역시 아담 존슨의 합류로 볼턴으로 임대를 떠났다.
이외에도 펠리페 카이셰도, 벤자니 음와루와리 등이 팀을 떠나며 탁신 친나왓이 구단주로 있을 때 영입했던 선수들 중 전력 외 판정을 받은 선수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 * *
“여어. 이게 누구야? 프리미어리그에서 가장 무섭다는 레프트백 아니야?”
포츠머스와의 경기를 앞두고 성배는 그라운드 위에서 누군가와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서로 대화를 나누는 언어도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였다.
“뭐,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뭘 그 정도가 아니야. 요즘 제일 뜨겁던데.”
바로 제노아에서 이번에 임대되어 합류한 안토니 반덴 보레였다.
성배와 함께 안더레흐트에서 활약하며 콤파니와 함께 벨기에의 수비진을 이끌 미래로 불렸던 반덴 보레는 성배보다 1년 늦은 2007/08시즌, 벨기에를 떠나 세리에A의 피오렌티나로 향했다.
“그건 됐고. 너는 어때?”
그리고 그때부터 반덴 보레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피오렌티나로 합류한 첫 시즌, 리그 두 경기, 시즌 다섯 경기 출전에 그친 반덴 보레는 반 시즌 만에 바로 제노아로 임대되었다.
그리고 다음 시즌, 제노아로 이적한 반덴 보레는 스물다섯 경기를 뛰며 커리어 역사상 최다 출전을 기록했지만, 인상적인 경기력을 보여주진 못했고, 이번 시즌을 앞두고 포츠머스로 임대된 상황이었다.
“뭘 어때. 당연히 안 좋지. 솔직히 말하면 별로 뛰고 싶은 마음도 안 들어. 팀 분위기가 이 정도까지 막장일 줄은 몰랐네.”
포츠머스는 첼시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유태인계 석유재벌이 구단을 인수하면서 제2의 첼시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를 받았던 클럽이었다.
공격적인 투자로 2007/08시즌 FA컵에서 69년만의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지만 그게 마지막.
구단주의 사업이 망하고 핵심 선수들이 싼값에 유출되면서 이번 시즌 승점을 9점이나 삭감당했다.
이런 클럽에 임대로 합류했다는 것부터 반덴 보레의 현재 위상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다음 기회를 노리려면 열심히 뛰어. 분위기 마음에 안 든다고 거기서 커리어 끝낼 거 아니면.”
반덴 보레의 몰락으로 벨기에의 라이트백 포지션이 구멍이 될 뻔했다.
성배가 오른쪽 측면을 커버할 수 있는 선수가 아니었다면 벨기에의 부활이 몇 년 늦어질 뻔했던 상황이었다.
‘허.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건지.’
성배가 처음 안더레흐트에 합류했을 때, 그때 반덴 보레와 성배가 벨기에와 안더레흐트에서 차지하던 위상의 차이를 생각하면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었던 변화였다.
< 낭만필드 - 21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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