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208화 (314/356)

< 낭만필드 - 208 >

“아, 이 형 진짜 너무했어. 인진이 형, 봤어요? 이 형 하는 거?”

도착하자마자 성배에게 눈을 흘기는 어린 친구 하나가 있었다.

바로 어제, 성배에 의해 완벽히 막힌 게 한이 된 듯했다.

“아서라, 아서. 급이 달라. 나도 마찬가지인데, 뭘.”

바로 이번 시즌부터 볼턴 원더러스에 합류해 프리미어리거가 된 임채영이었다.

볼턴도 그레이터 맨체스터 주에 속한 클럽이었다.

박인진의 맨유와 성배의 맨시티까지 모두 그레이터 맨체스터 주에 속한 클럽으로, 만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나 진짜 아무것도 못 했어요, 하하.”

볼턴과 맨체스터 시티는 지난 16라운드에서 맞대결을 펼쳤다.

처음 이적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볼턴 전통의 킥 앤 러시 전술에 어울리지 않을 거라는 의문 섞인 시선을 받았던 임채영은 의외로 팀의 핵심 공격자원으로 인정받으며 볼턴의 새로워진 팀 컬러를 상징하는 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성배에게는 힘을 쓰지 못했다.

“당연하지. 내가 유럽 무대 경력이 얼만데. 내가 못 이기면 그게 더 말이 안 되지.”

임채영도 플레이 옵션이 많지 않은 클래식 윙어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성배를 상대로 재미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클래식 윙어에다가 슛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해서 성배가 수싸움을 펼치기 수월했다.

“에이, 유럽 물 먹은 햇수로 따지면 이 리그에 나보다 적은 선수가 어딨어요. 다 나보다 많지.”

임채영도 지금까지 실패 없이 달려온 선수였다.

성배와는 다른 방법이었지만, 병역 문제도 없었고, K리그 명문 클럽 소속으로 뛰면서 승승장구 끝에 스물한 살의 어린 나이에 프리미어리그까지 진출했으니 그야말로 엘리트 코스를 걸어왔다고 볼 수 있었다.

“그건 됐고. 승우는 준비 잘하고 있는 거지? 소식 좀 알아?”

하지만 이번 생에서의 성배는 그런 엘리트 코스 선수들에게 전혀 꿀릴 게 없었다.

꿀릴 게 없는 정도가 아니었다.

“뭐, 형네 에이전시 느낌 좋던데요? 저도 덕분에 준비 잘하고 왔으니까. 승우도 느낌은 좋다고 하더라고요. 뭐, 정확한 건 다음 시즌 되어봐야 알겠지만.”

임채영이 말한 것처럼 임채영과 김승우는 성배의 에이전트인 버크만이 수장으로 있는 알랭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은 선수들이었다.

선수로 있기는 하지만, 알랭 에이전시의 서열 2위이자 대주주인 성배였기 때문에 성배 밑에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래. 준비 잘하라고 해라. 우리 에이전시 앞으로 커야 되니까. 하하.”

전생만큼만 해줘도 충분했다.

이들이 모두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어줄 것이었다.

*   *   *

[우우우--]

그라운드 위로 모습을 드러낸 맨체스터 시티 선수들을 향해 3만5천 관중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맨체스터 시티에는 트러블 메이커들이 많았다.

아데바요르, 테베즈, 호비뉴 등.

하지만 이 야유는 그들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토트넘 홈팬들, 이제는 맨체스터 시티의 유니폼을 입고 나타난 주성배 선수에게 야유를 보냅니다.”

바로 성배를 향한 것이었다.

지난 시즌까지 토트넘의 대체 불가능한 자원으로 활약하다가 바이아웃 금액에 이적한 성배를 향해 토트넘 홈팬들이 야유를 보냈다.

“엄밀히 말하면 야유 반 환호 반이네요. 일반적인 반응이고, 특별하진 않네요.”

아무래도 이적할 때 서로 감정이 상했던 것도 아니고 토트넘 소속으로 있을 때는 전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었기 때문에 야유가 많지도, 심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토트넘 소속으로 9년 만의 칼링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선수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환호도 나왔다.

“오랜만이네. 요즘 잘 나가더라?”

“뭐, 너도 잘 나가던데, 뭐.”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베일은 성배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원래였다면 아직 풀백으로 뛰면서 고전할 시기였지만, 성배의 존재로 인해 일찌감치 윙어로 포지션을 변경한 베일은 리그 정상급 윙어로 자리 잡았다.

아직 투박한 부분이 많았지만, 윙어로 뛴 기간에 비해 성장세가 대단해 지금보다 미래가 더 기대된다는 평가였다.

“이적하자마자 맨체스터 시티가 우리보다 위에 있네. 역시... 지난 시즌에도 얼마 차이 안 나서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주가 이적하면 승점 몇 점 정도 차이 금방 역전되는 거지, 뭐.”

여전히 두 사람은 연락을 유지하고 있었다.

베일이야 마음고생을 끝내고 프리미어리그에 자리 잡게 해준 성배에게 좋은 감정이 있기 때문이었고, 성배는 베일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과 혹시나 이적 결정에 영향을 주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연락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 봐야 오늘 경기 결과에 따라 바뀔 수 있을 정도인데. 큰 의미도 없지.”

토트넘도 에코토가 성배의 빈자리를 어느 정도 잘 메워주면서 이번 시즌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두 팀은 승점 27점으로 동률, 리그 5위와 6위에 올라 있었다.

물론, 유럽 대항전으로 인해 리그 일정이 한 경기 밀린 맨체스터 시티 쪽이 한 경기를 덜 치렀지만.

“친정팀이라고 봐주지는 않겠지?”

베일이 씩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아직도 나를 몰라서 그런 걸 묻는 건가?”

성배 역시 마주 웃었다.

*   *   *

“이제 토트넘 공격진의 에이스로 떠오른 가레스 베일에게 볼이 연결됩니다. 베일, 돌파 시도! 그 앞으로 리차즈가 자리 잡습니다.”

오늘 베일과 리차즈가 맞부딪힌 맨체스터 시티의 오른쪽 측면은 그야말로 괴수들의 격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인간이길 포기한 스피드의 베일과 리차즈가 신나게 부딪히고 있으니 보는 입장에서는 그보다 더 시원할 수가 없었다.

누가 이기든, 응원하는 입장이 아니라 그냥 축구 경기를 보는 입장이라면 속이 뻥 뚫리는 장면들이 이어졌다.

“베일이 먼저 달리고 리차즈가 따라갑니다! 리차즈, 따라 잡은 뒤에 베일을 튕겨냅니다! 볼 따내는 마이카 리차즈!”

하지만 아직은 리차즈가 미세하게 위였다.

베일의 타고난 신체적 능력치도 분명 엄청난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리차즈의 하드웨어는 그 차원이 달랐다.

두 선수 모두 아직 나이가 어리고 커리어가 짧아 투박한 면이 있었는데, 리차즈는 타고난 하드웨어만으로도 차기 주장감이라는 평가를 받는 선수였다.

테크닉이나 다른 부분에서의 재능은 베일이 더 나았지만, 그건 아직 꽃을 피울 시간이 필요했다.

‘저긴 무슨 히어로 영화 찍나.’

반대편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성배는 어이가 없었다.

베일과 같은 재능이 다른 재능에게 잡아먹히는 이 세계가 참 징글징글했다.

‘재능이 너무 뛰어나도 문제야.’

리차즈의 재능은 참 찬란하게 빛났다.

그리고 찬란하게 반짝거리는 만큼 에너지가 소진되는 모습도 보였다.

저런 움직임과 근육을 인간의 몸이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레넌의 돌파 시도! 중앙 쪽으로 꺾고 튀어 나가지만, 콤파니의 커트! 데 용에게 연결합니다.”

성배 혼자서 막았을 때도 더없이 든든했던 맨체스터 시티의 왼쪽 측면이었다.

하지만 콤파니가 중용되기 시작한 이후, 성배는 수비 스타일을 바꿨다.

혼자서 맡아 처리하지 않고, 함정을 파서 기다리다가 콤파니에게 먹잇감을 넘기는 식의 수비를 더한 것이었다.

“이런, 조금 더 스마트하게 막았어야지. 아직 멀었군.”

“네가 너무 널찍하게 놔준 거겠지.”

겉으로는 항상 투닥거려도 이 둘의 호흡은 완벽했다.

성배와 콤파니가 함께 배치된 이후, 조금 더 쉽게 수비가 되고 있었고, 슬슬 위험한 것이 아닌가, 했던 성배의 체력도 세이브되는 중이었다.

“데 용, 배리에게. 배리, 다시 뒤쪽으로 돌립니다. 주가 볼 잡고 전방 주시!”

토트넘은 최후방에서 볼을 잡은 성배의 위력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클럽 중 하나였다.

최후방 라인이지만, 단번에 득점 찬스를 만들어낼 수 있는 성배의 킥을 잘 알았기에 레넌부터 적극적으로 압박해 들어왔다.

‘이제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라서.’

하지만 이제 후방 빌드업은 성배 혼자만의 역할이 아니었다.

“주, 콤파니에게 연결! 콤파니, 위로 전진합니다!”

성배가 롱패스로 한 번에 찔러주는 빌드업을 선호하는 것에 비해 콤파니의 빌드업은 종류가 좀 달랐다.

거의 논스톱으로 미드필더진에게 볼을 연결해 역습을 노리거나 직접 볼을 몰고 전진해 위험지역으로 볼을 투입해주는 것이 콤파니의 빌드업이었다.

“콤파니의 전진! 데포가 달려들었지만, 밀려나고, 전방으로 찔러줍니다! 아일랜드!”

콤파니의 패스 한 번에 공격형 미드필더에게 볼이 연결되었다.

토트넘 페널티박스 바로 바깥에 볼이 도달하면서 순식간에 공격 찬스를 맞이한 맨체스터 시티였다.

“아일랜드, 테베즈에게, 테베즈 볼 흘리고! 주가 또!!”

그리고 콤파니가 전진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전속력으로 올라온 성배였다.

그런 성배를 확인한 테베즈는 아일랜드의 패스를 받는 척만 해서 촐루카를 흔든 뒤, 그대로 뒤로 흘렸다.

그리고 성배가 도착했다.

“주, 논스톱으로!”

테베즈에게 속은 촐루카가 뒤늦게 성배에게 따라붙었다.

성배는 중앙의 아데바요르와 측면에서 올라가는 테베즈를 번갈아 보며 상황을 비교했다.

‘스피드로 붙이는 게 낫겠어.’

그 유명한 토트넘의 유리몸 수비진.

이번에도 킹과 유리게이트, 아니, 우드게이트는 부상으로 이탈한 상황이었다.

지난 시즌 어쩐 일로 30경기 가까이 출전하나 했더니, 이번 시즌에는 초반부터 이탈해버렸다.

도슨과 바송이 나름대로 잘 버텨주고 있지만, A급에 오르지 못한 이들에게는 뛰어난 피지컬의 반작용으로 인한 민첩성 부족을 커버할 판단력이 부족했다.

“꺾어서 테베즈에게! 테베즈, 한 명 벗겨내고 슈팅! 골! 골입니다! 테베즈,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선취 골을 터뜨립니다!!”

성배의 선택은 크로스가 아니었다.

땅볼로 깔아서 테베즈에게 볼을 투입해주었고, 성배의 패스를 받은 테베즈는 침착하게 도슨을 벗겨낸 뒤, 정확한 슈팅으로 토트넘의 골문을 열었다.

“주성배 선수가 전 소속팀의 심장에 비수를 꽂네요. 리버풀의 부진으로 그렇게도 바라던 챔피언스리그 진출의 희망을 보기 시작한 토트넘인데, 주성배의 맨체스터 시티가 그 앞을 떡 하니 가로막고 있어요.”

토트넘은 그 어떤 클럽보다도 맨체스터 시티를 잡아야만 했다.

항상 챔피언스리그 출전권을 독점했던 빅4 중 리버풀이 부진한 사이, 그 자리를 놓고 경쟁 중인 클럽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홈에서 자신들이 놓친 성배의 어시스트로 인해 선취 골을 빼앗기고 말았다.

“토트넘도 정말 운이 없습니다. 리버풀의 부진과 맨체스터 시티의 약진이 같은 시즌에 일어나다니, 정말 이렇게까지 안 풀릴 수 있습니까?”

이럴 것을 예상하고 지난 이적시장에서 어떻게든 성배를 붙잡으려 했던 토트넘이었다.

성배가 이전에 받았던 주급보다 160% 이상 올려서 8만 유로까지 제시하면서 어떻게든 잔류시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11만 유로가 넘는 주급을 제시한 맨체스터 시티에게 돈으로 이기는 건 절대 불가능했고, 결국 이적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역풍이 불었다.

“지금 맨체스터 시티에서 주가 보여주는 활약상을 감안하면, 만약 토트넘이 주를 보내지 않았고, 맨체스터 시티가 주를 얻지 못했다고 가정했을 때, 두 팀의 순위는 반대가 되어 있을 확률이 높아요. 사실, 맨체스터 시티가 챔피언스리그 출전권을 노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성배를 잃었고, 얻은 두 클럽.

주성배라는 선수가 한 클럽의 순위에 변화를 줄 수 있을 정도의 영향력이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 낭만필드 - 208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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