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205화 (311/356)

< 낭만필드 - 205 >

“주, 1번 키커는 자넬세. 자신 있겠지?”

승부차기를 앞두고 양 팀 선수들은 모두 하프라인 근처에 모여 휴식을 취하며 승부차기를 준비했다.

양 팀 감독, 코치, 팀 닥터들이 바쁜 시간이었다.

승부차기 순서를 정하면서 아드보카트 감독은 벨기에의 1번 키커 역할을 성배에게 맡기려 했다.

“뭐, 아무런 문제 없습니다. 맡겨만 주시죠.”

1번 키커의 역할은 굳이 말로 할 필요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5번 키커보다도 더 중요한 역할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런 1번 키커의 역할이 성배에게 왔다는 것은 감독이 바뀌어도 성배의 입지에 변화가 없을 정도로 완벽히 자리를 잡았다는 의미였다.

“좋아. 그러면 1번 키커로 주가 나가고... 다음은, 보자...”

성배를 비롯해 뎀벨레, 베르마엘렌, 미랄라스, 시몬스로 승부차기 키커가 결정되었다.

‘후우.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네. 좀 떨리나.’

마지막 승부차기.

진짜로 이젠 더 이상 갈 곳도 없었다.

1차 예선 탈락 직전에 세계 최강 스페인까지 잡아내며 파죽의 4연승, 벼랑 끝에서 되살아나 조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벨기에였다.

그리고 1차전에서 0-1로 패배하며 불리한 위치에 몰렸다가, 2차전에서 다시 1-0으로 승리, 연장전까지 거쳐 승부차기까지 넘어왔다.

진짜 마지막의 마지막.

이제 더 가고 싶어도 갈 데가 없었다.

*   *   *

“히카르두, 시몬스의 킥을 막아냅니다. 아, 정말 잘 막네요. 두 개나, 벨기에의 승부차기를 두 개나 막아내면서 포르투갈에게 승리를 안겨줍니다.”

승부차기 결과는... 벨기에에게 웃어주지 않았다.

1번 키커 성배와 3번 키커 베르마엘렌, 4번 키커 미랄라스가 킥을 성공시켰지만, 2번 키커 뎀벨레와 마지막 키커 시몬스의 킥이 히카르두에게 막혀버렸다.

덕분에 포르투갈은 5번 키커 데쿠가 킥을 하지 않았음에도 승리를 확정지었다.

“정말 명성에 어울리는 활약이었네요, 히카르두 골키퍼. 멋진 선방을 두 개나 보여주면서 포르투갈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포르투갈 선수들이 벤치를 박차고 나와 월드컵 진출을 자축하는 동안, 벨기에 선수들은 그라운드에 주저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몇몇 선수들은 그 모습조차 지켜보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에당. 고개 들어. 너는 잘했어.”

특히 후반전 종료 직전에 절호의 찬스를 살리지 못하고 골포스트를 맞춘 아자르는 그라운드에 엎드려 흐느껴 울었다.

벨기에의 중심 선수이자 팀 내 젊은 선수들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는 성배는 그라운드를 돌면서 주저앉은 동료 선수들을 격려했다.

“내, 내가... 그때 그것만 넣었어도...”

분명 아자르의 후반 마지막 슈팅은 정말 아쉬웠다.

하지만 모든 득점 기회를 득점으로 연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회를 놓친 것 때문에 자학하면 모든 공격수는 정신적 피로가 쌓여 절대 선수생활을 오래 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괜찮아. 네가 우리 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렇게 크지 않으니까. 굳이 오늘 경기의 책임을 따지자면 주장인 다니엘이 첫 번째고 다음은 나야. 그 뒤로 티미, 마루앙, 토마스 등 많은 선수가 있겠지. 네 자리는 한참 뒤야.”

아자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성배는 다른 동료들에게로 이동했다.

성배도 물론 속상했다.

하지만 원래 결과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동료들에게 만족할 수 있었고, 실망하기보다는 오히려 기뻤다.

“비록 월드컵 진출권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한 희망을 봤습니다. 선수들의 성장이 눈에 보였고, 슬슬 전력이 완성되는 게 보였습니다.”

벨기에는 결국 월드컵 진출에 실패했다.

하지만 얻은 것이 없진 않았다.

지난 유로 대회 예선 때도 사실 마찬가지이긴 했지만, 어쨌든 이번에도 예선 막판에 무서운 뒷심을 보이며 연승 행진을 달린 것이었다.

“이번에도 희망 고문일까요? 아니면 이번에는 정말일까요? 이번에는 진짜였으면 좋겠네요. 2년 전에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선수들이 슬슬 잠재력을 터뜨릴 때가 되었거든요? 혜성처럼 나타났던 80년대 후반 출생 선수들이 이제 본격적으로 빅리그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시점이고, 암흑기를 잘 버텨준 베테랑 선수들이 아직 건재하니까요.”

2년 전, 월드컵 예선 막판에 연승 가도를 달렸을 때는 강팀이라고 할 만한 팀이 폴란드 정도가 다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파이팅은 넘쳤지만, 유망주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2년 전과 달리 수비진이 확실히 정돈된 느낌을 주었고, 그때는 부족했던 중원과 공격진도 재건의 가능성이 보였다.

스페인과 터키가 포함된 4연승 행진 역시 벨기에 팬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다음 유로는 분명히 올라가겠어. 2년만, 딱 2년만 더 참자.’

전생에 비해 현재 벨기에의 FIFA 랭킹은 10계단 이상 올라와 있었다.

또, 벨기에의 팀으로서 완성도 역시 훨씬 나았다.

원래는 2014년, 12년 만에 메이저 대회에 복귀했던 벨기에지만, 성배는 2012년 유로 대회부터 복귀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   *   *

플레이오프의 결과로 프랑스, 그리스, 포르투갈 등 1포트 팀 세 팀과 슬로베니아가 월드컵 진출권을 획득했다.

프랑스와 아일랜드의 경기에서 앙리의 핸드볼 반칙이 선언되지 않아 결승 골로 이어져 크게 논란이 되었고, 아일랜드가 재경기를 요구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등 문제가 생겼지만, 성배는 관심이 없었다.

성배의 관심은 이제 맨체스터 시티에게 쏠렸다.

그리고 맨체스터 시티의 팀 분위기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 아주 가지가지 하는구나.’

성배는 한심하다는 듯 어딘가를 주시하고 있었다.

다만 성배의 그런 태연한 태도와는 달리 주변은 난리도 아니었다.

“말려! 일단 떼어놔!”

“저것들 제대로 붙으면 난리나! 안 다치게 일단 떼어놓으라고!!”

맨체스터 시티의 훈련장, 두 명의 거구이자 굉장한 피지컬을 자랑하는 아데바요르와 투레가 한 판 붙었다.

아프리카 특유의 쫀득한 피지컬을 자랑하는 두 선수의 대결에 주변 선수들이 말리느라 고생했다.

‘신생팀이라 확실히 어수선하긴 해.’

팀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선수가 없이, 그러니까 중심을 잡아줄 선수 없이 에고가 강한 스타 선수들을 모아놓다 보니, 아무래도 조직력에 문제가 없을 수는 없었다.

당장 투레만 하더라도 아스날 시절, 성격 좋기로 유명했던 선수이고, 맨체스터 시티 이적 직후부터 주장직을 맡은 선수였다.

그런데도 이번 시즌 팀에 합류했다는 건 같았기 때문에 아스날에서 함께 뛰었던 아데바요르임에도 컨트롤이 되지 않았다.

‘뭐, 이거야 시간에 맡기는 수밖에 없으니.’

그래도 성배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해결해줄 것이었고, 최근 분위기가 좋진 않지만, 팀의 전력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굳이 저런 것에 스트레스받지 않아도 맨시티는 올라갈 팀이었다.

*   *   *

“맨체스터 시티, 지긋지긋한 무승부의 늪에 빠져 있습니다. 덕분에 시즌 초반 기세 좋게 1위를 노렸던 순위도 어느새 7위까지 떨어졌습니다.”

플레이오프가 끝나고 복귀한 뒤, 첫 경기였던 리버풀과의 경기에서도 맨체스터 시티는 무승부에 그쳤다.

2-2, 무승부로 6연속 무승부라는 지긋지긋한 무승부 행진을 달리며 여섯 경기에서 승점 6점밖에 따내지 못했고, 순위까지도 수직 하락했다.

“참 대단하죠? 6연속 무승부 행진을 달리는 동안 리그 최하위권의 팀들도 있었고, 빅4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리버풀도 있었는데, 그 모든 팀과 무승부 행진을 이어가고 있어요.”

계속된 무승부 행진에 맨체스터 시티 팬들이 분노한 것은 물론이고, 시즌 초반 맨체스터 시티의 연승행진에 잠시 조용해졌던 빅4 팬들 역시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뭔가 어정쩡한, 끝이 찝찝한 무승부의 연속에 오히려 더 답답해했고, 더 통쾌해 했다.

“이젠 이길 때도 된 것 같은데, 17위의 헐시티를 상대로도 영 힘을 쓰지 못합니다. 이번에야말로 지긋지긋한 무승부 행진을 끝낼 찬스였는데 말입니다.”

지난 시즌, 뉴캐슬 더피의 자책골 덕분에 천운으로 잔류에 성공한 헐 시티는 이번 시즌에도 강등이 유력한 클럽이었다.

그런 헐 시티를 홈으로 불러들인 상황에서 맨시티는 무조건 승리를 거둬야만 했다.

“이제 다음 경기 상대는 첼시거든요? 오늘도 무승부 행진을 끝내지 못하면 다음 경기에는 무승부 행진은 깨져도 무승 행진은 이어갈 확률이 높아요.”

헐 시티와의 홈경기에서까지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 다음 상대가 첼시였다.

그건 맨체스터 시티의 부진이 장기화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6연속 무승부도 기나긴 부진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길어지는 일은 막아야 했다.

“오늘은 맨체스터 시티가 드디어 이기는 겁니까? 1-0으로 앞선 채 80분이 넘어갑니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무승부 행진에 종지부를 찍기 직전이었다.

경기 종료까지 10분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1-0으로 앞선 것이었다.

“라이트-필립스의 득점이 결승 골이 되나요? 일단 지금까지는 그럴 확률이 높은데요.”

맨체스터 시티의 홈이었지만, 헐 시티는 마지막까지 승점 획득을 위해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섰다.

강등 경쟁을 하는 팀들은 골 득실 싸움으로 갈 확률도 높았기 때문에 1점 차 패배에 만족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헐 시티가 이렇게 나선다는 건 가능성을 보았다는 뜻이었다.

최근 맨체스터 시티의 경기력이 별로 좋지 않음을 증명하는 장면이기도 했다.

“알티도어에게 연결되는 볼! 알티도어, 박스 바깥으로 빼주고, 불라드에게!”

알티도어, 헤셀링크, 불라드 세 명이 헐 시티의 공격을 이끌었다.

그리고 이 세 명의 공격에 맨체스터 시티 수비진이 흔들렸다.

자체 징계로 빠진 아데바요르와 투레의 빈자리는 상당했다.

그나마 불안한 수비진을 성배와 함께 커버해주었던 투레의 이탈, 연속 골 행진을 벌이던 아데바요르는 공수의 중요 인물이었다.

이래저래 운도 따르지 않는 맨시티였고, 마지막까지 불안한 경기를 펼쳐야 했다.

“불라드, 박스 안으로 볼 투입! 아! 선수 놓쳤습니다!”

오늘 레스콧은 그래도 리차즈와 함께 좋은 수비를 보여주었다.

아무리 레스콧의 축구 지능이 낮아도 헐 시티가 펼치는 공격이 레스콧을 흔들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안타깝게도 집중력을 잃고 말았다.

“태클! 걸려 넘어집니다!”

헤셀링크의 침투를 순간적으로 놓친 레스콧은 급히 따라가 몸을 날렸다.

그리고 볼은 골라인 밖으로 흘렀고, 헤셀링크는 박스 안쪽에서 넘어졌다.

“주심의 휘슬이 울립니다! 페널티 스팟을 가리킵니다! 헐 시티, 페널티킥을 얻어냅니다!”

페널티킥이었다.

맨체스터 시티 홈팬들의 고개가 일시에 꺾였다.

‘하. 오늘도 무승부냐.’

성배 역시 허리에 손을 얹고 고개를 저었다.

이제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오는 중이었다.

*   *   *

[맨체스터 시티, 마크 휴즈 감독 전격 사임!]

결국, 맨체스터 시티의 마크 휴즈 감독은 7연속 무승부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1억 유로가 넘는 이적 자금을 지원받고 7연속 무승부에 그쳤으니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계속 마크 휴즈 감독에게 신임을 보내주며 대인배 칭호를 얻은 만수르 구단주도 더 이상은 참지 못했다.

< 낭만필드 - 205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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