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202 >
“주, 프리킥 준비합니다. 왼발로 찰 것처럼 보이는데요?”
오른쪽 측면에서의 프리킥이었지만, 성배는 오른발이 아닌 왼발로 프리킥을 준비했다.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감기는 오른발 킥에 비해 왼발 킥은 정확도가 조금만 떨어지면 골키퍼에게 볼이 넘어가거든요? 하지만 정확하게 찰 수만 있다면 골대 쪽으로 휘어지기 때문에 더 위협적일 수 있어요.”
오른발로 프리킥을 처리하면 볼이 휘면서 횡으로 선을 그리기 때문에 그 선 위에 존재하는 선수들이 모두 득점을 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왼발로 프리킥을 처리하면 종으로 선을 그리기 때문에 헤딩 슈팅을 시도할 수 있는 선수가 많아야 두 명, 보통은 딱 한 명에 불과했다.
‘세트피스는 반 바이텐이지.’
성배는 딱 한 명. 반 바이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 바이텐의 세트피스 파괴력은 엄청났다.
발이 느려 뒷공간을 내주는 경우가 많다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바이에른 뮌헨에서 중용되는 것은 역시 무시무시한 세트피스 가담 능력 덕분이었다.
수비력에서는 중상위권 클럽 주전 수준이라 평가받는데, 반 바이텐의 수비력을 불안해하며 욕하던 팬들도 세트피스 상황이 되어 반 바이텐이 최전방으로 올라오는 모습이 보이면 “오오, 오오오!” 하면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다니엘이면 무조건 슈팅까지는 간다.’
반 바이텐의 세트피스는 벨기에가 아니라 바이에른 뮌헨에서도 주요 공격 루트로 인정받고 있었다.
마르세유 시절 중앙 수비수임에도 불구하고 한 시즌 열한 골을 득점한 적이 있었고, 함부르크 시절에도 여덟 골을 넣은 적이 있었다.
‘다 필요 없고 다니엘이랑 골키퍼만 본다.’
콤파니, 베르통헨의 제공권이 좋다고 해도 세트피스 공격력에서는 반 바이텐에게 비교할 수 없었다.
어차피 반 바이텐에게 줄 거라면 조금이라도 상대 골키퍼와 수비수를 당황스럽게 만들 수 있는 왼발 킥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주, 왼발로 크게 올려줍니다! 골대 쪽으로 감겨 들어가는 볼!”
유럽에서 활동하는 축구 선수라면 반 바이텐의 위력을 모를 수 없었다.
하지만 알아도 막을 수 없는 것이 반 바이텐이었다.
무려 세 명의 선수가 달라붙어 있음에도 아무 문제 없다는 듯 솟구쳐올랐다.
오히려 에스토니아 선수 세 명이 중심을 잃고 밀려나는 모습을 보였다.
‘저거... 안 닿겠는데?’
그런데 문제는 반 바이텐이 공중전에서는 그들을 밀어냈어도 견제가 워낙 심해 위치 선정에서 살짝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것 때문에 반 바이텐이 우뚝 솟아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볼은 그의 머리 위 3cm를 날아갔다.
그런데.
“안으로! 골키퍼, 막지 못합니다!”
골키퍼도 반 바이텐의 헤딩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 바이텐은 물론 그 어떤 선수도 성배의 프리킥 궤적을 바꾸지 못했고, 반 바이텐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던 골키퍼는 골대 안으로 흘러가는 볼을 막지 못했다.
“골! 골입니다! 주의 프리킥이 그대로 골대 안에 꽂혔습니다!”
뒤늦게나마 몸을 날린 골키퍼의 손을 스치며 그물을 흔든 성배의 프리킥이었다.
후반 42분, 성배의 프리킥이 에스토니아의 골문을 열었다.
‘이게 들어가네.’
지난 맨체스터 더비에서 터진 중거리 슈팅도 그렇고, 오늘 프리킥 득점도 그렇고 요즘 들어 이상하게 득점 운이 따라주는 느낌이었다.
“와악! 좋았어! 어쨌든 들어가면 되는 거지!”
“역시! 주라면 뭔가 하나 해줄 줄 알았다고!”
볼이 상대 골대 안에서 구르는 것을 확인한 선수들은 반 바이텐을 필두로 성배에게 달려들었다.
전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떡대의 ‘근육텐’, 반 바이텐과 콤파니, 베르통헨 등 거구들이 달려들자 성배는 순간적으로 위협을 느꼈다.
“잠깐! 조금만 진정해라!”
골 세리머니가 없기로 유명한 성배지만, 본의 아니게 화려한 골 세리머니를 펼쳤다.
성배를 필두로 뒤에 다섯 명의 선수가 따라붙었고, 성배의 앞에서 네 명의 선수가 달려들었다.
잡히는 순간, 생명에 위협이 가해질 것같은 느낌에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동료들은 골도 골이지만, 평소 당황하는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는 성배가 당황하는 것이 재밌어서 끝까지 따라왔다.
“반 바이텐의 태클! 완벽한 태클입니다! 하하, 주성배 선수가 멀쩡한지 궁금할 정도로 완벽한 태클이 들어갔습니다.”
“멋지네요, 하하하. 두 선수 친한 사이겠죠? 그렇지 않다면 싸울 것 같은데요.”
결국, 성배는 반 바이텐에게 잡혀버렸다.
단순 스피드로는 상대도 안 되지만, 앞에서도 달려드는 동료들 때문에 제대로 도망갈 수 없었다.
“자, 이걸로 벨기에의 플레이오프 진출이 바로 눈앞까지 다가왔습니다. 상대가 어디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극적으로 한 번의 기회를 더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고, 오늘 경기 내내 에스토니아가 단 한 번도 위협적인 장면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사실상 벨기에의 승리가 유력해진 상황이었다.
스페인과 보스니아의 경기는 사실상 오래전에 끝났기 때문에 벨기에 선수들 역시 추가 득점에 대한 부담 없이 수비에 집중했다.
* * *
2010 남아공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 1차 라운드가 끝났다.
1조부터 9조까지 각 조 1위를 차지한 국가들이 월드컵 출전권을 획득했고, 다른 조보다 숫자가 하나 부족했던 9조 2위 노르웨이를 제외한 각 조 2위 팀들이 플레이오프, 2차 라운드에서 만나게 되었다.
형평성을 맞추기 위해 1조부터 8조의 2위 팀들이 자기 조 최하위 팀과 상대해서 얻은 승점을 제외하고 비교했는데, 그래도 노르웨이가 최하위였다.
최하위 아르메니아를 상대로 2승을 거둔 벨기에는 승점 6점을 빼고 13점이 되었는데, 전체 9개 2위 팀 중 7위로 좀 위험했지만, 어쨌든 2차 라운드에 합류할 수 있었다.
대체적으로 이변은 없었다.
각 조에서 강자로 분류되었던 팀들이 대부분 1위를 차지하며 월드컵에 가게 되었다.
1조에서 덴마크가 포르투갈을 꺾고 올라간 것과 3조에서 슬로바키아와 슬로베니아가 체코를 따돌리고 각각 월드컵 출전권과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한 것, 7조에서 프랑스가 세르비아에게 밀린 것 정도가 이변이라고 할 수 있었다.
2차 라운드에 진출한 팀은 1조부터 포르투갈, 그리스, 슬로베니아, 러시아, 벨기에, 우크라이나, 프랑스, 아일랜드였다.
여기서 FIFA 랭킹을 기준으로 상위 네 팀이 1포트, 하위 네 팀이 2포트로 나뉘어 Home&Away 방식으로 남은 네 장의 월드컵 진출권을 두고 경기를 펼치게 되었다.
FIFA 랭킹 9위 프랑스와 10위 포르투갈, 12위 러시아, 16위 그리스가 1포트에 소속되었고, 22위 우크라이나, 34위 아일랜드, 37위 벨기에, 49위 슬로베니아가 2포트가 되었다.
그리고 대진표가 결정되었다.
[프랑스 VS 아일랜드]
[포르투갈 VS 벨기에]
[그리스 VS 우크라이나]
[러시아 VS 슬로베니아]
벨기에는 1포트의 네 팀 중에서 최근 분위기가 가장 괜찮은 포르투갈과 만나게 되었다.
최근 문제가 심각한 프랑스나 그리스, 러시아는 그나마 가능성이 있었지만, 호날두가 버티고 있는 포르투갈과의 경기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다.
* * *
“플레처 헤더! 케빈 맥도날드! 뒤에서 달려들면서 골대 안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동점 골! 87분에 동점 골이 터집니다! 3-3 동점!”
벨기에가 극적으로 2차 라운드 진출에 성공하자, 이번에는 또 맨시티가 문제였다.
이래저래 소속팀과 벨기에의 분위기가 동시에 좋은 경우가 없었다.
토트넘 시절부터 이어진 징크스였다.
“결국, 이대로 경기 끝납니다. 먼저 두 골을 허용하고 세 골을 득점하며 역전했지만, 마지막 3분을 버티지 못하고 또 실점을 허용, 이번에도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서 지긋지긋한 5연속 무승부의 늪을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웨스트햄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그다음 경기인 아스톤빌라전에서 무승부를 거둔 뒤, 남아공 지역 예선을 마무리하기 위해 떠날 때까지만 하더라도 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복귀한 뒤, 지금까지 무려 네 경기 연속 무승부였다.
“마이카 리차즈의 부상 이후 수비가 무너졌어요. 왼쪽의 주는 괜찮긴 하지만, 시즌 초반의 압도적인 활약을 보여주진 못하고 있고, 사발레타는 아직 기량이 좀 더 올라와야 해요.”
아무래도 성배의 내구성으로는 시즌 초반의 활약을 한 시즌 내내 보여줄 수 없었다.
게다가 벨기에 국가대표팀에서 맡은 역할이 많아 자연히 많이 뛰어야 했고, 한 시즌을 치르기 위해서는 체력 배분이 필요했다.
체력을 배분하느라 성배의 활약이 조금 뜸해지고, 오른쪽의 사발레타는 아직 성장이 조금 더 필요했다.
하지만 맨시티 수비의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양 측면 풀백들은 그래도 1인분은 충분히 해주고 있어요. 맨체스터 시티의 가장 큰 문제는 레스콧과 투레의 중앙 수비진이 서로 호흡을 못 맞춘다는 거예요.”
레스콧과 투레의 센터백 듀오, 특히 그중에서도 레스콧의 문제가 심각했다.
이번 여름 맨체스터 시티에 합류한 레스콧은 피지컬적인 측면에서 흠잡을 곳이 없었지만, 축구 지능이 상당히 떨어지는 선수였다.
그래서 그에게는 뛰어난 커맨더형 파트너가 필요했다.
에버튼에서는 요보와 자기엘카라는 뛰어난 파트너가 있었고, 호흡도 오래 맞춰왔지만, 투레는 레스콧과 마찬가지로 이번 시즌 영입된 선수였다.
“레스콧은 실수를 줄일 필요가 있어요. 경기 내내 좋은 모습을 보여주다가 한두 개의 치명적인 실책을 범하면서 실점을 내주는데, 수비수는 결국 얼마나 실점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한 경기에 한 골의 실점은 무조건 내주는 수비수는 절대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어요.”
5연속 무승부로 휴즈 감독의 입지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이번 시즌을 앞두고 맨체스터 시티가 전력 강화를 위해 지출한 금액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그런 상황에서 5연속 무승부라니.
이건 구단주 만수르가 아닌 일반 팬들도 용납할 수 없었다.
* * *
“도대체 왜 뱅상을 쓰지 않으시는 겁니까?”
계속된 부진과 수비진 붕괴에 불만이 쌓인 성배는 휴즈 감독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사실 이미 많은 선수들이 면담을 신청해 대화를 나눈 상황이었다.
많은 돈을 투자했지만, 기량과 화제성 위주로 영입한 덕분에 트러블 메이커들이 적지 않은 맨체스터 시티였고, 몇몇 선수들은 이미 휴즈 감독과 사이가 벌어진 상태였다.
“뱅상은 이미 중용하고 있는데? 출전 경기 수도 적지 않고.”
지금까지 11라운드가 진행되는 동안 콤파니는 여덟 경기에 출전했다.
경기 수만 놓고 보자면 적은 출전은 아니었다.
“경기 수는 그렇죠. 그런데 출전 시간만 따지면 150분도 안 될 것 같은데요. 아닙니까?”
문제는 선발 출전이 단 한 번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나머지 일곱 경기는 교체 출전이었고, 교체 출전의 평균 출전 시간은 10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뭔가?”
휴즈 감독도 계속된 선수들의 불만 제기에 스트레스가 쌓였는지 지친 얼굴로 물었다.
“일단 졸레온이나 콜로의 자리에 뱅상을 한 번 시험이라도 해보시죠. 벨기에 경기를 보셨다면 뱅상이 수비형 미드필더보다 센터백으로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는 걸 잘 아실 텐데.”
기본적으로 성배는 아무리 벨기에 국가대표팀 동료라도 실력이 되지 않는데 선발 출전을 시켜달라 말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지금 맨체스터 시티의 수비가 완전히 무너졌고, 콤파니의 폼이 경쟁자들보다 좋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이었다.
“졸레온과 콜로의 몸값이 얼마인 줄 아나? 그리고 그 둘이 프리미어리그에서 보여준 게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나?”
성적의 압박이 커질수록 감독은 안정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안정적인 선택은 프리미어리그에서 많은 것을 증명한 레스콧과 투레였다.
“콤파니는 86년생, 레스콧은 82년, 투레는 81년생입니다. 한창 전성기인 둘과 한창 성장할 나이인 뱅상의 기량이 비슷하다면, 누굴 선택해야 하는지는 감독도 잘 알고 계실 텐데 말이죠.”
하지만 지금은 변화가 필요한 때였다.
5연속 무승부라니.
“굳이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앞으로도 계속 변화가 없으면 감독의 자리가 어떻게 될지 모두 알고 있습니다. 지난 에스토니아와 벨기에의 경기에서도 보셨겠지만, 뱅상은 수비형 미드필더로 뛸 때보다 센터백으로 뛸 때 훨씬 좋습니다.”
성배는 휴즈 감독의 상황을 건드리면서까지 콤파니의 기용을 요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콤파니의 기용을 요구했다기보다는 팀의 성적을 요구한 것이었다.
“뱅상을 기용하지 않아도 성적이 나온다면 상관없지만, 만약 다른 방법이 없다면 뱅상을 시험이라도 해보시죠. 1억 유로도 훨씬 넘게 썼는데, 유럽 대항전을 못 나가면 말이 안 되겠죠. 저도 다음 시즌에는 유럽 대항전에 무조건 나갈 거라 확신해서 맨시티로 온 겁니다.”
천문학적인 돈이 오고 가는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천문학적인 돈을 쓴 맨체스터 시티였다.
이에 대한 부담감, 자기도 모르게 볼 수밖에 없는 만수르의 눈치, 팬들의 비난, 선수들의 불만 등 많은 것이 휴즈 감독을 괴롭히고 있었다.
< 낭만필드 - 20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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