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201 >
“아아, 오셨습니까?”
라커룸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을 가장 먼저 발견한 건 성배였다.
“뭐하고 있어, 다들? 왜들 이렇게 쫄아있는 건데?”
바로 이번에 새로 수석코치로 부임한 마크 빌모츠였다.
A매치 73경기에 출전하며 90년대 후반과 00년대 초반 벨기에의 황금기에 에이스 역할을 하며 팀을 이끈 레전드인 그가 수석코치로 돌아온 것이었다.
“에밀! 터키전의 두 골은 아주 환상적이었어! 역시, 아직 죽지 않았군. 웨슬리! 너는 에밀보고 느끼는 거 없냐? 자식.”
“마크. 이제 나도 베테랑이거든요? 그렇게 막 대하지 말아줄래요?”
“베테랑은 개뿔!”
빌모츠가 순식간에 선수단에게 호의를 이끌어낸 이유는 별것 없었다.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현역으로 활동했던 빌모츠는 에밀 음펜자, 웨슬리 송크, 티미 시몬스 등 베테랑 선수들과 벨기에 국가대표로 꽤 오랫동안 함께 활약했다.
가볍지 않은 친분이 있었고, 베테랑들을 휘어잡으며 팀에 녹아들었다.
“어이, 토마스! 설마 쫄아버린 건 아니지?”
“에이, 마크! 설마요. 아직 예선이라고요.”
“에당! 너는? 이런, 너는 확실히 쫄았군.”
“...아닙니다. 괜찮아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프랑스계이지만, 벨기에 국가대표팀의 주장으로서 네덜란드어를 열심히 공부해 거의 원어민 수준의 네덜란드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짧지 않은 샬케 생활로 독일어까지 구사하는 빌모츠는 벨기에를 구성하는 네덜란드계, 프랑스계, 심지어 극소수의 독일계까지 모든 파벌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지도자였다.
이는 선수단의 호의를 얻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만약 아드보카트가 사임한다면... 마크를 다음 감독으로 요구해야겠어.’
그 덕분에 전생에서는 젊은 나이와 부족한 전술 능력에도 불구하고 2012년부터 벨기에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맡아 벨기에를 전성기로 이끌었다.
빌모츠의 부임이 앞당겨지고 그 영향으로 선수단의 화합이 빨라진다면, 벨기에의 전성기 역시 당겨질 수 있었다.
* * *
“약간은 답답한 경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미드필더들의 대거 이탈의 영향이 커 보입니다.”
벨기에가 아무리 암흑기에 빠져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에스토니아 정도에게 고전할 수준은 아니었다.
물론, 쉽게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공격력이 아쉬웠기 때문에 탄탄한 수비력 덕분에 최소한 지지는 않겠지만, 쉽게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경기 양상은 예상대로였다.
“펠라이니, 시몬스, 데푸르, 비첼. 이 정도가 현재 벨기에 대표팀의 1순위부터 4순위 중앙 미드필더 자원이거든요? 그런데 이 선수들이 모두 부상과 컨디션 난조 등으로 이번 대표팀에 참여하지 못했어요. 그러다 보니 중앙에서 공격을 만들어나가는 데 고전할 수밖에 없죠.”
이번 2연전은 정말 중요한 경기였기 때문에 주전 미드필더 라인의 대거 이탈은 치명적이었다.
다행히 터키전은 어찌어찌 승리했지만, 에스토니아와의 경기에서도 중앙에서 경기가 안 풀려 전체적으로 답답한 경기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무딩가이, 전방의 뎀벨레에게 이어주는 패스가 끊깁니다!”
주전 미드필더들의 대거 이탈로 오늘 벨기에의 중원에는 5순위 미드필더 무딩가이와 중심 센터백 콤파니가 나섰다.
두 선수의 수비력은 에스토니아의 미드필더진을 상대하기에는 너무 뛰어났다.
그리고 에스토니아의 밀집 수비를 뚫기에는 공격 전개 능력이 너무 부족했다.
“측면으로 계속 보내! 중앙 포기하고 측면만 노려!”
주전 중앙 미드필더들의 부재는 경기를 운영할 플레이 메이커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어떤 선수도 공격 전개에 대한 지시를 내리지 못했다.
미랄라스, 라마, 음펜자, 뎀벨레 등 공격수들은 볼을 받아 자신이 해결하는 선수들이지, 플레이 메이커 타입은 아니었고, 무딩가이는 수비력에만 능력이 집중된 미드필더, 콤파니는 센터백이었다.
“뱅상! 오른쪽!”
결국, 오늘 경기 운영은 오른쪽 측면 수비수로 나선 성배가 도맡아 하고 있었다.
반 바이텐, 베르마엘렌은 물론이고 레프트백으로 나선 베르통헨도 센터백이 원래 포지션이었기 때문에 공격력은 물론 공격 이해도 역시 낮기 때문이었다.
“콤파니, 오른쪽 측면으로 볼 빼줍니다. 이럴 때는 항상 주가 뭔가 만들어줬었거든요? 오늘도 주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음펜자, 뎀벨레 모두 제공권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에스토니아가 라인을 내리고 있는 상황에서 롱패스로 뭔가 만들어내기는 힘들다는 뜻이었다.
측면 돌파가 답인데, 미드필더들의 도움을 기대하기 힘드니 오른쪽 윙어 미랄라스와 자신, 둘이서 뭔가 만들어내야 했다.
“주, 천천히 올라갑니다. 공격 타이밍을 재고 있는 주성배!”
“분명 돌파력도 갖추고 있는 선수거든요? 지난 스페인전에서는 멋진 개인기를 선보이며 득점을 만들어낸 적도 있어요.”
오늘 경기에서 성배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측면 수비수로서 수비는 기본으로 해주어야 했고, 풀백의 역할인 측면 공격에 대한 지원 역시 평소보다 더 중요했다.
게다가 수비수임에도 불구하고 플레이 메이킹까지 신경 써야 했다.
주장 완장은 반 바이텐의 팔에 채워져 있지만, 그가 동료들을 뒤에서 받쳐주는 역할이라면, 실질적으로 그들을 이끄는 에이스 역할은 성배의 몫이었다.
“타비 란의 태클! 사이드라인 바깥으로 벗어납니다.”
스리백을 세운 에스토니아의 수비는 확실히 두터웠다.
미랄라스에게 전해준 패스가 사이드라인 밖으로 나갔고, 성배는 그사이 미랄라스에게 다가갔다.
“적극적으로 돌파를 노려. 그래서 파울을 얻어내자고. 세트피스는 우리가 유리하니까.”
성배의 선택은 결국 세트 피스였다.
자신이 플레이 메이커 비슷한 역할을 맡는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자신 역시 경기 조율 능력은 형편없었다.
그나마 다른 선수들보다는 경기를 읽는 눈에서 조금 더 나았기에 맡았을 뿐, 진짜 미드필더들과 비교하면 민망한 수준이었다.
“지금 골을 넣을 방법은 어차피 개인 전술로 다 제치는 거 아니면 세트피스밖에 없어. 수비벽이 워낙 두꺼우니까 개인 전술은 힘들 거고, 세트피스로 가자.”
그런 상황에서 결국 성배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세트피스밖에 없었다.
상대 수비가 두꺼울수록 비교적 허술한 측면 수비를 노려 측면 쪽 공격 비중을 높여야 했는데, 아쉽게도 레프트백 베르마엘렌의 공격 지원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 알았어. 온몸을 다 던져서라도 파울을 얻어 볼게.”
꼭 필드골에 집착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 벨기에의 상황에서는 뭘 만들어내는 것보다 무리하다시피 돌파를 시도해서라도 파울을 얻어내는 쪽의 득점 확률이 더 높을 수 있었다.
“다른 공격수들한테도 전해. 어떻게든 파울을 얻어내라고.”
미랄라스에게 말을 전한 성배는 스로인을 위해 사이드라인 바깥으로 나갔다.
세트피스도 세트피스지만, 일단 기회가 오기 전까지는 오른쪽 측면에서 최대한 에스토니아 수비진을 흔들어두어야 했다.
* * *
“자, 반대편에서는 스페인의 마타가 한 골을 추가하면서 스페인이 5-0으로 앞서나가고 있습니다. 경기 종료까지 10분도 남지 않았는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다섯 골 차이로 뒤져있기 때문에 거의 패배가 확정이라고 봐도 되겠습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다른 경기에서는 스페인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상대로 무려 다섯 골을 폭격하면서 5-0으로 앞서 있었다.
이대로라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최종 승점은 18점, 16점의 벨기에가 오늘 승리를 거두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제치고 2위로 뛰어오를 수 있었다.
“스페인은 지금 잘해주고 있는데, 스페인의 도움을 받으려면 일단 오늘 경기에서 이겨야 하거든요? 시간이 이제 그렇게 많지 않아요.”
하지만 벨기에는 여전히 에스토니아와 0-0 균형을 깨지 못하고 있었다.
6.5:3.5 정도로 일방적인 점유율을 가져갔지만, 공격은 무뎠다.
이대로 경기가 끝나면 1점 차이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게 2위 자리를 내줘야 했다.
[IN - 17. 에당 아자르 / OUT - 22. 롤란드 라마]
아드보카트 감독은 공격 강화를 위해 중앙 미드필더 무딩가이를 빼고 공격수 뷔펠을 투입한 것에 이어 라마를 빼고 아자르를 투입했다.
두 선수 모두 레프트 윙으로 포지션이 같지만, 라마의 활약이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이었다.
‘돌파만 잘해주면 되는데.’
프리킥 획득을 목적으로 공격 작업을 이어갔지만, 생각보다 많은 프리킥을 얻어내진 못했다.
밀집 수비 속에서 파울이라도 얻어내려면 드리블 스킬이 뛰어나야 했는데, 상대의 파울을 얻어내기에는 벨기에 공격수들의 드리블은 볼이 발에서 좀 멀리 떨어지는 편이었다.
“벨기에, 이제는 조금만 더 서둘러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경기 주도권을 잡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이젠 공격에 집중해야겠다.’
성배도 자리를 완전히 벗어나 하프라인을 한참 넘은 위치까지 올라왔다.
에스토니아의 역습이 이뤄질 수도 있겠지만, 반 바이텐, 콤파니에 베르마엘렌까지 포함된 두 명의 센터백과 두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가 잘 막아줄 것이라 믿었다.
“무딩가이, 오른쪽으로 빼주고 주가 많이 올라와 있습니다.”
다시 볼을 받은 성배는 조금이라도 더 전진하기 위해 전방을 살폈다.
하프라인 부근에서의 프리킥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최소한 위협적인 세트피스를 만들 수 있는 위치에서 파울을 얻어내야 했다.
‘에스토니아 정도는 이제 가볍지.’
상대하는 선수가 이미 자리를 잡은 상황이었지만, 성배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옆을 뚫고 지나쳤다.
이제 이 정도 기량의 선수는 일대일로 가볍게 벗겨낼 수 있었다.
‘어차피 높은 크로스는 의미도 없고. 얼리 크로스 아니면 프리킥을 얻어내는 게 답인데.’
시간이 급했기 때문에 지금 필요한 건 롱볼 전술이었다.
그래서 펠라이니의 빈자리가 너무 아쉬웠다.
‘될지 모르겠지만...’
에스토니아 선수들도 비교적 침착하게 수비를 잘 해주고 있었다.
섣불리 달려들지 않았고, 플레이도 그리 거칠지 않았다.
보통 기량의 차이가 도저히 어떻게 해보지도 못할 정도로 크면 플레이가 거칠어지는 경향이 있었는데, 벨기에 선수들의 기량이 그 정도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결국, 성배는 편법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주, 천천히 전진하고, 미랄라스가 앞으로 움직입니다!”
미랄라스가 성배의 앞쪽 공간으로 움직일 때, 성배는 그런 미랄라스에게 패스하는 척 하면서 볼을 띄워 에스토니아 수비수의 왼손을 노렸다.
‘닿았다!’
땅볼로 깔아 차는 쪽이 더 나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볼을 띄울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에스토니아 수비수의 반응이 늦었다.
성배의 패스는 에스토니아 수비수의 손에 맞고 그대로 앞에 떨어졌다.
“손! 손에 닿았습니다!”
볼이 손에 닿자마자 성배는 바로 팔을 높이 들어 어필했다.
바로 앞에서 지켜본 선심이 기를 들어 올렸고, 주심 역시 휘슬을 불어 프리킥을 선언했다.
“다 올라와! 가비, 토마스! 두 명만 남아!”
프리킥이 선언되자, 성배는 벨기에 진영을 향해 소리쳤다.
콤파니, 반 바이텐, 베르통헨까지 수비수들이 전부 올라오면 벨기에 세트피스의 위력은 굉장해졌다.
“절호의 찬스를 맞이하는 벨기에! 이번 프리킥은 무조건 살려야 합니다!”
“주의 왼발에 벨기에의 플레이오프 진출이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느새 85분을 지나가고 있거든요? 이제 10분도 남지 않았어요!”
중계진의 말이 들리진 않지만, 성배도 지금의 프리킥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후우... 제발 누구라도 닿아라.’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확한 킥에 있어서 누구에게도 밀릴 생각이 없을 만큼 자신감이 넘친다는 것과 190cm에 육박하는 피지컬, 제공권 괴물들이 세 명이나 있다는 것이었다.
< 낭만필드 - 20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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