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99 >
“발렌시아, 오른쪽 측면으로 빠르게 돌파 시도!”
결국, 성배에게 꽁꽁 묶여버린 박인진은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발렌시아와 교체되었다.
비록 개인 기량 자체가 위협적인 선수는 아니었지만, 열한 명, 한 팀에 속해있을 때는 그보다 더 위협적인 선수가 없는 박인진이었다.
그런데 공격은 물론이고 전반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성배의 수비가 박인진을 완전히 압살해버렸다는 뜻이었다.
‘안토니오 발렌시아. 더 쉽지.’
하지만 새롭게 투입된 발렌시아는 오히려 수비하기 더 쉬운 선수였다.
아직 새로운 팀에 적응도 완료되지 않았고, 플레이 자체가 단조로운 발렌시아라면 성배의 스타일상 수비하기 훨씬 쉬웠다.
‘백날 달려 봐라.’
직선 돌파 이후 크로스.
발렌시아의 플레이는 이게 전부였다.
크로스가 정확해 위협적이었지만, 돌파 자체를 허용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볼을 툭툭 건드리면서 움직이는 발렌시아의 앞에서 자세를 낮춘 채 태클 타이밍을 노렸다.
“툭, 툭, 치다가 치고 나가는데, 간단하게 볼만 빼내는 주성배의 태클! 완벽합니다!”
예상대로 발렌시아는 볼을 먼저 앞으로 때려놓고 빠르게 돌파를 시도했다.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 발렌시아의 앞으로 팔을 뻗어 움직임을 방해한 성배는 오른발을 뻗어 볼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윙어가 돌파를 시도했는데 풀백이 선 채로, 몸을 날리지도 않고 패스를 받은 것처럼 볼을 따냈다는 것은 윙어에게 엄청난 굴욕이었다.
“저런 태클이 나오나요? 저런 건 풀백의 기량이 확실하게 한 수 위에 있어야 나오는 장면이거든요? 너무 완벽하고 평화로운 태클이네요.”
박인진을 발렌시아로 바꿨지만, 여전히 맨유의 오른쪽 측면은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발렌시아의 단조로운 플레이 스타일은 성배와 철저히 상극이었다.
두 선수의 역학 관계가 여실히 드러나 버린 이번 플레이는 특히나 타격이 컸다.
껌을 갈아버리는 퍼거슨 감독의 아래턱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추가 시간 4분이 주어집니다. 골이 많이 터진 만큼, 추가 시간도 꽤 많이 주어졌습니다.”
오른쪽 측면은 완전히 죽어버렸지만, 회춘한 라이언 긱스가 버틴 왼쪽 측면의 힘으로 다시 3-3 동률이 되었다.
긱스가 기록한 두 개의 어시스트를 모두 받아먹은 플레처, 두 선수의 활약이 그나마 맨유의 자존심을 지켜주고 있었다.
“캐릭의 몸놀림이 조금은 무거워 보입니다. 아직 몸상태가 완벽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큰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퍼거슨 감독은 중원에서 계속 밀리자 어쩔 수 없이 결국 부상에서 100% 회복되지 않은 캐릭을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몸놀림이 조금 불편해 보였지만, 그래도 맨유 중원의 핵심 선수답게 캐릭이 투입되자 어느 정도 균형이 맞춰졌다.
스코어도 동률, 경기 분위기도 백중세, 골도 양 팀 도합 여섯 골이나 터진 치열한 경기가 계속되었다.
“라이트-필립스, 중앙의 배리에게. 배리, 다시 뒤쪽으로 돌립니다.”
“맨체스터 시티가 볼을 앞으로 전개하지 못하는 모습이네요. 마땅히 틈을 찾지 못하고 있죠?”
양 팀의 답답한 공격이 이어졌다.
경기 내내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던 양 팀 수비수들은 이제 더는 실점하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은 것인지, 경기 종료 직전이 되어서야 드디어 정신을 차린 모습이었다.
‘측면에서 흔들어야겠는데... 레스콧을 믿을 수가 없으니.’
2,400만 파운드라는 어마어마한 이적료를 지불하고 영입한 레스콧이지만, 이보다 더 불안할 수가 없었다.
수비수에게 필요한 하드웨어는 최강이지만, 소프트웨어가 MS-DOS였다.
즉, 훌륭한 피지컬을 낮은 축구 지능이 전부 다 까먹었다.
‘그래도 할 수 없지. 올라가는 수밖에.’
콤파니가 일단 센터백 자원으로 돌아가고 휴즈 감독의 신뢰를 다시 찾는다면 모르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올드 트래포드에서의 무승부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비진영에만 있으면 오히려 더 위험했다.
공격할 땐 해야 했다.
“리차즈, 주성배에게 패스, 앞으로 천천히 전진합니다.”
천천히 전진하면서 전방을 살폈다.
이미 맨유 수비진이 자리를 잡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돌파를 시도할 순 없었다.
‘중앙으로 가볼까.’
맨유 선수들이 조금 많이 뒤로 빠지는 느낌이었다.
수비진이 뒤로 물러나 나오질 않으니 중거리 슈팅을 시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벨라미에게 패스하고 다시 리턴 패스!”
성배는 볼을 넘기고 빠르게 중앙 쪽으로 올라갔다.
그 과정에서 팔을 사용해 앞을 막고 있던 발렌시아를 제껴내면서 공간을 확보했다.
“때려야죠!”
그 덕분에 벨라미로부터 볼을 건네받은 성배는 자유로운 상황에서 볼을 잡을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맨유 선수들이 내려간 상황이라 더 그랬다.
‘어차피 비겨도 상관없으니까.’
원래 성배는 프리킥을 제외하면 중거리 슈팅을 잘 때리지 않는 편이었다.
지금도 원래 이렇게 볼을 빼낸 뒤, 자신에게 맨유 선수들이 달려오면 비는 동료가 중거리 슈팅을 시도하도록 할 생각이었다.
‘어쩔 수 없나.’
하지만 성배가 중거리 슈팅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맨유의 선수들은 성배의 패스를 받아줄 동료들만 집중 마크하고 있었다.
다시 볼을 돌리거나 직접 슈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역시, 센스들이 좋아.’
성배의 선택은 직접 슈팅이었다.
그리고 성배가 슈팅할 것처럼 보이자, 맨시티 선수들은 성배의 슈팅 코스를 중심으로 양옆으로 벌어졌다.
덕분에 슈팅을 때릴 수 있는 코스가 넓어졌다.
“오른발로 강하게 슈팅!!”
살짝 먼 거리이기는 했지만, 역습을 당하지 않고 수비를 재정비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플레이를 마무리해야 했다.
그리고 딱히 마무리해줄 선수도 없었다.
‘이런...’
다만 아무래도 중거리 슈팅의 정확도는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슈팅 자체는 원바운드로 잘 날아갔고, 파워도 괜찮았지만, 거리도 좀 멀었던 데다가 코스도 완전히 구석으로 향하지는 않았다.
득점을 기대하기보다는 그저 플레이를 마무리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던 시점이었다.
“어, 어? 어! 포스터!! 포스터 골키퍼, 볼을 흘립니다!! 골라인 넘어서는 볼!! 주성배의 중거리 슈팅이 골라인을 넘어섭니다!”
엎드리면서 볼을 가슴으로 안으려던 포스터는 볼을 제대로 안지 못했다.
가슴에 튕기며 뒤로 빠진 볼은 포스터의 두 다리 사이로 빠져나가 골라인을 넘어갔다.
포스터가 바닥을 기면서 어떻게든 걷어내려 해보았지만, 이미 라인을 넘어간 후였다.
“아, 여기서 반 데 사르의 빈자리가 드러나나요? 포스터, 실수가 너무 많아요!”
반 데 사르가 손가락 부상으로 빠진 사이, 후계자 자리를 놓고 쿠쉬착보다 살짝 앞서 있던 포스터의 출전이 늘어났다.
하지만 반사 신경과 선방 능력이 아무리 좋아도 단 한 번의 실수가 실점으로 이어지는 골키퍼에게 경험과 안정감은 필수적인 요소였다.
포스터에게는 이것이 부족했다.
지지난 경기에서도 한 번 결정적인 실책을 저질렀던 포스터는 이번에도 알을 품으면서 맨시티에게 리드를 빼앗기는 결정적인 실점을 허용하고 말았다.
“음? 이게 들어가네.”
성배가 당황해 심정을 입 밖으로 내뱉을 정도로 어이없는 장면이었다.
이게 들어갈 거라고는 전혀 기대도 하지 않았던 성배였다.
당황해서 골 세리머니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어쨌든 이번 득점은 큽니다! 정규시간 종료 이후 추가시간에 접어들었는데, 이제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사실상 맨체스터 시티의 승리가 8할 정도 확정되었다고 봐도 무방하죠? 맨유, 위험해졌네요.”
추가 시간 이후 1분도 안 지났지만, 어쨌든 4분 중 1분이나 흐른 시점, 겨우 3분 남은 상황에서 맨체스터 시티가 한 골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아, 시간을 못 끌었네.’
워낙 어이없이 들어간 골이라서 제대로 세리머니를 하지 못했다.
골 세리머니로 시간을 끌었어야 했는데, 시간을 끌지 못한 것이 좀 아쉬웠지만, 주심이 경기를 급히 진행해 어쩔 수 없었다.
“추가시간도 어느새 3분 30초를 지나고 있습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마지막 공격!”
성배의 득점 이후 골 세리머니가 길어지지 않아 금방 경기가 재개되었다.
그 이후 맨유는 올드 트래포드에서, 그것도 맨시티에게는 패배할 수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사력을 다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맨시티 역시 사력을 다해 막아냈다.
“맨유, 이제 전방으로 길게 넘겨줍니다! 레스콧이 먼저 걷어냅니다!”
시간이 없다 보니 맨유도 어쩔 수 없었다.
한 번에 최전방으로 롱볼을 때려 넣었지만, 오늘 내내 엑스맨 역할을 했던 레스콧이 이제 통곡의 벽으로 변했다.
베르바토프까지 오언과 교체된 상황에서 제공권으로는 레스콧을 상대로 공중볼을 따낼 수 없었다.
“주성배 선수가 멀리 걷어냅니다! 그리고 4분이 지나갑니다!”
레스콧이 걷어낸 볼을 성배가 멀리 걷어냈다.
그러면서 추가 시간이 4분을 넘어갔다.
‘끝낼 생각이 전혀 없는데?’
그리고 볼을 걷어냄과 동시에 주심을 쳐다본 성배는 휘슬을 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모습에 당황했다.
‘OT 타임인가...’
사실 올드 트래포드에서의 홈 콜은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유명했다.
물론 홈 구장에서 조금 더 유리한 판정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지만, 맨유의 경우에는 그게 조금 심하다는 말이 많았다.
실제로 이 사례들을 조사해 발표된 논문도 여러 편 있을 정도였다.
“어이! 정신 차려! 여기 올드 트래포드야! 휘슬 불릴 때까지 긴장하라고!!”
성배가 외쳤지만, 맨시티 선수들은 이미 동요하고 있었다.
선수들이 흔들리며 분위기가 어수선해진 것이 누가 봐도 보일 정도였다.
“맨시티 선수들, 번갈아서 항의하고 있습니다. 어느새 5분을 넘어섰습니다.”
4분이 지났지만, 주심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경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맨유 선수들은 뜻밖에 주어진 기회에 어떻게든 동점 골을 넣기 위해 달려들었다.
맨시티 선수들은 볼과 관련 없는 곳에 있는 선수들이 번갈아가며 주심에게 항의하고 있었다.
“가레스 배리, 멀리 걷어냅니다! 맨시티 선수들 모두 주심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어느새 6분이 넘어가는 상황, 맨시티 선수들은 흥분해서 점점 이성을 잃어갔다.
“주심! 주심! 지금 시간이 몇 분입니까!”
성배도 결국 한마디를 던졌다.
맨시티 이적 후 첫 번째 맨체스터 더비인데, 꼭 이기고 싶었다.
“다시 한 번 길게 띄웁니다! 다시 한 번 레스콧이 걷어내는데, 긱스!”
그때, 캐릭이 멀리 띄워준 볼을 레스콧이 걷어냈는데, 그것이 긱스에게 이어졌다.
“긱스, 안쪽으로 킬 패스! 오언!!”
그리고 그 순간 오언이 수비수들 뒤쪽으로 침투했고, 긱스의 절묘한 패스가 이어졌다.
기븐이 어떻게든 막아보려 볼을 향해 몸을 날렸다.
“오언, 툭! 밀어 넣습니다!! 골!! 골입니다! 마이클 오언, 원더보이의 골이 맨유를 지옥에서 구해냅니다! 원더보이, 화려한 귀환!!”
“추가 시간 6분 57초, 7분이네요. 주어진 추가 시간만큼의 시간이 또 한 번 지난 상황에서 맨유의 골이 터졌습니다.”
오언의 골로 경기는 동점이 되었다.
< 낭만필드 - 19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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