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94 >
“일단 지금까지는 괜찮아요. 한 골 정도는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고, 나름대로 잘 막아주고 있습니다.”
전반전이 끝난 라커룸, 벨기에 선수들은 각자의 취향대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전반전 막판, 다비드 실바의 어시스트와 다비드 비야의 득점, 두 명의 다비드가 만들어낸 골로 인해 한 골을 먼저 실점한 상태였다.
“어차피 한 골도 내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한 적도 없어요. 이 정도면 훌륭한 선방입니다. 그렇지만, 패배해서는 안 되는 경기이니 후반전에는 조금 더 공격적으로 나가야겠죠.”
나름대로 선방했다고는 하지만, 선취 골을 내준 이상 경기가 쉽지만은 않을 터였다.
이 경기에서도 패배한다면 남은 경기를 다 잡아내도 승점 16점.
승점 30점까지 따낼 수 있는 리그전에서 16점으로 2위를 차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후반전에는 에당과 무사, 베슬리가 조금 더 전진해주세요. 수비를 우선시하는 건 그대로지만, 주와 뱅상의 롱패스로 역습을 좀 더 적극적으로 노리겠습니다.”
콤파니 역시 최근에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더 많이 뛰었기 때문에 패스가 꽤 좋아졌다.
성배와 콤파니, 두 명의 최후방 컨트롤 타워를 보유한 벨기에의 역습은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저 자식들이...’
그런데 문제는 무사 뎀벨레와 베슬리 송크가 베우스만테른 감독의 지시를 흘려듣고 있다는 것이었다.
베우스만테른 감독은 안더레흐트를 지휘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프랑스계 감독으로, 네덜란드어를 거의 하지 못했다.
뎀벨레와 송크는 네덜란드계로, 프랑스어를 대충은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그닥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이래서 스페인을 어떻게 이기려고.’
아직 하나가 되지 못한 벨기에 대표팀의 현 주소였다.
반 바이텐과 성배의 노력으로 선수단 사이의 반목은 그나마 조금 나아졌지만, 아직 감독이나 기타 코칭스태프들을 대할 때의 반목은 여전했다.
‘있는 힘을 다해도 스페인 수비도 못 뚫을 놈들이.’
두 선수의 기량이 압도적이냐고 물으면 그것도 아니었다.
벨기에의 부족한 공격 자원 중 그나마 나았기에 주전으로 투입되는 것이지, 그렇게 뛰어난 선수도 아닌 것들이 오늘처럼 중요한 경기에서 저러고 있으니 성배의 속도 타들어 갔다.
“마루앙.”
어차피 발이 느린 두 선수였다.
역습 상황에서 두 선수가 스페인 수비진을 뚫어낼 거라 기대하지 않았고, 성배는 따로 자신을 도와줄 선수를 찾았다.
“응? 왜.”
성배의 선택은 펠라이니였다.
펠라이니라면 스페인 수비진의 약점인 피지컬과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지금 잘해주고 있어. 덕분에 차비랑 알론소가 제대로 힘을 못 내고 있으니까.”
일단 전반전의 벨기에 미드필더들은 합격점을 받을 만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물론, 수비하는 데 급급했지만, 스페인의 무지막지한 미드필드 진용을 상대로 이 정도 모습을 보여준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었다.
“고마워, 하하. 그나저나 힘들어 죽겠네.”
테크닉에서 딸리니 어쩔 수 없이 몸으로 버틸 수밖에 없었다.
활동량이 뛰어난 데푸르와 펠라이니도 조금은 지친 모습이었다.
‘괜찮으려나.’
성배의 생각에 후반전의 키 플레이어는 아자르와 펠라이니였다.
각각 스페인 수비진의 약점인 스피드와 테크닉, 제공권과 피지컬을 갖춘 선수들이었다.
이들은 절대로 그라운드 위에서 힘을 잃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미안한 이야기인데, 후반전에는 전반전보다 더 많이 뛰어줘야겠다.”
불안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체력이 방전되어 빠지더라도 지금과 같은 플레이만 반복하면 그냥 스무스하게 패배하는 그림이었다.
“나보고 위로 올라가 달라는 거지?”
성배가 요구하고 싶은 바를 바로 이해한 펠라이니였다.
수비형 미드필더로 커리어를 시작했던 펠라이니는 그 후 공격 재능을 각성해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로 뛰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격 재능을 유럽에 알렸던 경기는 성배의 주문에 따라 깊숙이 올라갔던 이탈리아와의 A매치였다.
모예스 감독이 펠라이니를 영입하겠다고 마음 먹었던 경기도 바로 그 경기였다.
“그래. 푸욜과 부스케츠를 흔들어. 둘 다 피지컬과 제공권이 약하니까 너라면 충분히 볼을 따낼 수 있을 거다.”
이건 리스크가 큰 노림수였다.
펠라이니가 중원에서 미친 듯이 달려 준 덕분에 사비와 사비 알론소, 실바의 스페인 중원을 상대로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펠라이니가 공격 쪽으로 나가기 시작하면 아무래도 중원이 조금 헐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건 자신있는데... 그렇게 했을 때 우리가 버틸 수 있을까?”
펠라이니도 그것을 걱정했다.
“물론 수비할 때는 지금처럼 해줘야 해. 그래도 공격까지 나가기 시작하면 어쩔 수 없이 좀 약해지겠지만... 그건 티미랑 스티븐에게 맡겨야지.”
성배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시몬스와 데푸르가 더욱 더 미친 듯이 뛰어주는 방법밖에 없었다.
나머지 두 선수도 어디 가서 활동량이 부족하다는 말은 듣지 않았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자, 자! 후반전에도 힘내서 나가자고! 스페인도 어차피 열한 명이야! 별다를 건 없어!”
펠라이니와 대화를 마친 성배는 시몬스, 데푸르, 콤파니, 반 바이텐 등을 찾아가 자신의 요구에 대해 전달했다.
펠라이니가 가끔이나마 수비라인에서 빠지게 되었기에 이들이 조금 더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하프 타임이 끝날 시간이 되었다.
주장 시몬스가 선수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소리를 질렀고, 다른 선수들 역시 이에 반응했다.
‘음...’
베우스만테른 감독이 지시할 때, 네덜란드계 선수들의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해서 그런 것인지, 이상하게 오늘따라 그런 모습들이 자꾸 보였다.
아까는 네덜란드계 선수들이었다면, 이번에는 프랑스계 선수들이었다.
네덜란드계인 시몬스의 파이팅에 대한 반응이 미적지근한 것이었다.
‘저 어린 자식이 벌써부터...’
그리고 그중에는 아자르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작 91년생 아자르가 벨기에 국가대표팀의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자 주장인 76년생 시몬스를 쉽게 본다는 이야기였다.
‘초장부터 잡아놔야지.’
아자르는 향후 벨기에의 키 플레이어로 성장할 선수였다.
이대로 가만히 놔두었다가 아자르가 월드클래스로 성장하면 애써 하나로 모은 벨기에 대표팀이 다시 나뉠 지도 몰랐다.
“에당.”
생각을 마친 성배는 선수들이 모두 나가는 상황에서 아자르를 붙잡았다.
“아, 주. 웬일이에요?”
서양에는 선후배 관계가 없다는 편견이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서양에도 신입생 길들이기나 신고식 등이 존재하는 등 선후배 관계가 엄연히 존재했고, 심지어 철저하기까지 했다.
선후배 관계가 없다고 착각하는 건 기본적으로 상호 존중이 바탕에 깔려 있어 선배도 후배를 존중해주기 때문이었다.
이룬 것이 더 많고 증명한 것이 더 많은 선배에게 후배가 더 큰 존중을 보내주는 것은 당연했다.
“에당. 다음번에도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그런 행동 하다가 걸리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성배는 목소리를 깔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번 모임 때 너 부르면서 우리가 뭐라고 했지? 파벌 가르는 행동은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고 했을 거다. 티미가 벨기에 대표팀에서 뛴 경기가 몇 경기인데 이제 시작하는 네가 무슨 배짱으로 그런 행동을 보인 거냐.”
85년생 이하의 벨기에 국가대표급 선수들에게는 모두 성배의 영향력이 미쳤다.
엄밀히 말하면 성배가 주최하는 모임의 영향력이 미치는 것이었다.
오늘의 뎀벨레처럼 아직 모임 바깥의 반대 계열에게는 마음을 열지 않은 선수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어느 정도 마음을 연 상황이었다.
“만약 오늘 네가 시몬스나 다른 네덜란드계 친구들이랑 호흡이 맞지 않아서 문제가 생긴다면, 그래서 스페인에게 패배하게 된다면!”
성배의 단호한 말투에 아자르는 살짝 주눅이 든 모습을 보였다.
지금의 아자르는 이제 막 데뷔해 가능성을 인정받기 시작한 유망주에 불과했다.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풀백이 된 성배의 다그침을 가볍게 넘기기 힘들 것이었다.
“그때는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아무 일 없이 넘어가고 싶다면, 미친 듯이 뛰어. 어쨌든 네가 오늘 우리 공격의 핵심이니까.”
말을 마친 성배는 아자르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라커룸을 나섰다.
마지막에는 아자르의 가치를 인정하며 말을 끝냈다.
아자르가 아직은 이런 칭찬에 헬렐레할 정도로 순수하길 바랄 뿐이었다.
* * *
“사비의 킬패스! 토레스, 슈팅! 콤파니가 몸을 날려 막아냅니다!”
선취 골을 넣은 스페인의 후반전 공격은 매서웠다.
이미 골 맛을 보았고, 벨기에도 한 골을 만회하기 위해 전반전 정도의 수비적인 플레이를 고집할 수는 없었다.
이 틈을 스페인의 화려한 패스가 헤집었다.
“다시 실바가 볼 잡는데, 시몬스! 끈질기게 달려들어 볼 빼냅니다!”
하지만 벨기에 선수들의 투지도 만만치 않았다.
정신적 지주이자 주장인 시몬스, 젊은 선수들을 이끄는 성배와 콤파니를 중심으로 한 벨기에 수비진은 몸을 아끼지 않는 플레이로 어떻게든 스페인의 공격 전개를 막아냈다.
“하지만 다시 사비에게! 사비, 측면으로 넓게 벌려줍니다! 왼쪽의 카프데빌라!”
측면 윙어가 없는 스페인 전술의 특성상 측면 공격은 양쪽 풀백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른쪽의 아르벨로아는 공격적인 재능이 없다시피 한 선수였고, 왼쪽의 카프데빌라는 푸욜보다도 나이가 많은 선수로, 전성기의 스피드를 잃은 상태였다.
“주! 카프데빌라의 돌파를 막아냅니다!”
전성기가 지난 카프데빌라는 성배의 수비를 벗겨내지 못했다.
‘지금이다!’
카프데빌라에게서 볼을 뺏어낸 성배의 앞길이 뻥 뚫려 있었다.
스페인이 경기를 압도하는 가운데, 벨기에 수비수들의 육탄 방어로 중앙이 뚫리지 않자 양쪽 풀백이 높이 올라온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풀백이 볼을 빼앗겼으니 측면이 헐거울 수밖에 없었고, 성배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라인 타고 빠르게 올라갑니다!”
측면이 빈 것을 발견한 부스케츠가 빠르게 밑으로 내려왔다.
대인 마크 능력은 확실히 부족하지만, 미리 패스 루트를 파악하고 차단하는 능력만큼은 뛰어난 선수였기에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너 혼자서는 못 막아!’
그렇다면 패스를 하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펠라이니가 따라 올라오고 있을 터였다.
끝까지 돌파해 들어간 뒤 크로스 한 번이면 기회를 만들 수 있었다.
“주, 계속해서 돌파를 이어갑니다! 부스케츠와 경합을 펼칩니다!”
패스할 것처럼 간단하게 페인트를 건 이후 성배는 돌파를 이어나갔다.
조금 더 사이드 라인 쪽으로 붙었고, 몸을 부딪쳐오는 부스케츠와의 몸싸움이 이어졌다.
‘덩치값 좀 해라!’
189cm의 거구지만, 피지컬과 제공권 등에서 신체적인 장점을 살리지 못하는 부스케츠였다.
페인트를 통해 유리한 상황까지 만든 성배였기에 부스케츠와의 몸싸움에서 밀리지 않을 수 있었다.
“부스케츠를 떨쳐냅니다! 파죽지세로 올라가는 주성배!”
몸싸움에서 승리한 성배는 드리블을 멀리 치면서 스피드를 끌어올렸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판단한 것인지, 푸욜이 측면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푸욜이 내려와서 자리 잡습니다!"
"빨리 처리해야죠! 푸욜까지 제치기에는 시간이 없어요!"
스페인 선수들도 빠르게 복귀하는 중이었다.
그만큼 벨기에 선수들도 위로 올라오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역습을 막아야 했기 때문에 많은 선수들이 올라오지는 못했다.
‘좋아.’
하지만 푸욜의 움직임은 성배가 기다렸던 마지막 퍼즐이었다.
푸욜이 중앙으로 내려오면서 중앙 쪽은 상대적으로 수비벽이 얇아질 수밖에 없었다.
“중앙으로 빠른 크로스! 높게 떠오릅니다!”
펠라이니가 도착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성배는 평소보다 더 높고 느린 크로스를 올려주었다.
제공권은 펠라이니가 피케에게 밀릴 이유가 없었다.
“펠라이니와 피케, 자리 다툼! 펠라이니가 먼저 헤더!!”
성배의 기대대로 펠라이니는 성배의 크로스에 먼저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
하지만 피케도 만만치 않았다.
피케와의 몸싸움 때문에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한 펠라이니의 헤더는 골대 쪽으로 향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펠라이니가 의도한 바였다.
“왼쪽으로 떨궈주고, 아자르!!”
왼쪽 측면에서 아자르가 빠르게 침투, 펠라이니가 떨궈준 볼을 향해 달려들었다.
< 낭만필드 - 194 > 끝
ⓒ 미에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