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91 >
화려한 득점 장면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지만, 성배의 활약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공격과 수비를 넘나들며 존재감을 발산하는 플레이에 경기를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은 계속해서 성배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은존지, 오른쪽의 디우프에게, 아, 주! 주가 태클로 한발 앞서 걷어냅니다!”
디우프에게 패스가 이어졌지만, 뒤에서부터 빠르게 달려온 성배는 디우프와의 충돌 가능성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발 먼저 발을 뻗어 사이드라인 바깥으로 볼을 걷어낸 성배는 디우프와 충돌했다.
하지만 이미 예상하고 달려온 성배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제자리로 돌아갔고, 볼을 받기 위해 발을 들었던 디우프는 뒤로 나가떨어졌다.
“멋진 태클이네요! 주, 지난 시즌 후반기부터 수비력이 더 좋아진 모습이에요.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완성형이란 평가를 받았는데, 역시 어리긴 어렸는지 성장할 부분이 남아있었나 봐요.”
수비수에게 큰 단점이 될 수밖에 없는 몸싸움을 피하던 성향은 호날두에게 크게 데이면서 부상 트라우마를 극복해 사라졌다.
그리고 부상 트라우마가 사라진 이후부터 적극적으로 부딪히기 시작한 성배의 수비는 한층 더 발전했다.
단순 힘으로는 아직 평균 이상 정도에 불과했지만, 중심이 흐트러진 상황을 절묘하게 캐치해 달려드는 플레이에 상대 선수들은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나이스 태클! 뒤로 와서 자리 잡아!”
지난 시즌 맞부딪혔을 때도 성배를 상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디우프는 파이팅까지 장착한 수비에 완전히 발이 묶여 버렸다.
라인을 올리는 플레이에 어울리지 않아 비난을 받고 있지만, 그래도 3부 리그 생활까지 함께했던 맨체스터 시티의 주장으로서 라인 운용 능력만큼은 뛰어난 던은 성배에게 박수를 쳐주며 라인을 재정비했다.
블랙번의 역습은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막혔다.
“홈에서 펼쳐지는 이번 시즌 개막전인데, 블랙번, 이대로 무너지면 안 되거든요? 경기장을 가득 채워준 홈팬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줘야죠!”
경기 시작 후 30분 정도가 지났음에도 블랙번은 단 하나의 인상적인 플레이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오늘 경기에서 돋보이는 건 맨체스터 시티의 변화뿐.
블랙번은 홈팬들 앞에서 신생 맨시티를 돋보이는 역할에 그치는 굴욕을 겪고 있었다.
“제이콥슨, 스로인! 은존지, 다시 디우프에게.”
블랙번은 공격력이 형편없는 팀이었다.
‘빅 샘’, 샘 앨러다이스 감독이 뉴캐슬에서 경질당한 뒤, 맡은 팀으로, 당연히 롱볼 전술이 주요 전술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
다만, 팀의 핵심은 삼바를 중심으로 한 수비진으로 이미 전성기가 지난 맥카시와 로버츠에게는 기대할 게 없었고, 덕분에 지공 상황에서는 측면으로 볼이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흐름을 읽는 능력이 탁월한 성배에게 이런 전술을 읽어내는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주성배, 태클! 과감한 태클로 볼 따냅니다!”
이미 스로인으로 경기가 재개되던 순간부터 디우프에게 이어지는 패스 루트를 주시하던 성배였다.
그리고 예상대로 은존지의 패스가 디우프에게 이어진 순간, 성배는 디우프의 뒤쪽으로 접근해 태클을 시도, 볼의 진행방향을 다리로 정확히 가로막으며 볼을 따냈다.
“디우프를 밀쳐내며 일어납니다! 주, 전방으로 길게! 호비뉴!!”
성배가 볼을 따내자, 호비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전방으로 달려나갔다.
성배 역시 그런 호비뉴를 발견했고, 시간을 끌지 않았다.
‘크레이그, 오른쪽. 아데바요르는 중앙. 가레스, 나이젤은 너무 밑에 있어.’
호비뉴에게 볼을 투입한 뒤, 성배는 빠르게 동료들의 위치를 파악했다.
호비뉴를 도와줄 만한 선수가 보이지 않았다.
블랙번 수비진의 뒷공간을 노린 역습 상황이기는 했지만, 스로인 뒤 오른쪽 측면에 붙어있던 제이콥슨이 나름대로 호비뉴를 마크하는 상황이었기에 호비뉴가 직접 해결할 수는 없었다.
‘가자.’
상황 파악을 끝낸 성배는 전방으로 빠르게 올라갔다.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스피드로 달리기 시작한 성배를 막을 수 있는 선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호비뉴의 빠른 돌파! 멈추지 않습니다!”
세계 최고의 드리블러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호비뉴의 드리블은 그야말로 눈이 정화되는 장면을 만들어주었다.
제이콥슨이 옆에서 방해하고 있지만, 그의 방해를 느끼지도 못하는 듯 화려한 드리블을 선보인 호비뉴는 어느새 블랙번 진영 깊숙한 곳까지 치고 들어갔다.
‘측면에서 도와줄 필요는 없겠어.’
자신의 도움이 없어도 깊숙이 돌파해 들어간 호비뉴를 보면서 성배는 중앙 쪽으로 진로를 변경했다.
다른 동료들도 중앙 쪽에 몰려 있었고, 성배는 그라운드를 5등분 했을 때 왼쪽 측면과 정중앙 사이 정도 되는 장소에서 대각선으로 파고들었다.
아데바요르, 벨라미, 배리에게 몰려있는 블랙번의 수비진은 뒤쪽에서부터 빠르게 올라온 성배를 마크할 여력이 없었다.
“호비뉴, 주춤주춤, 위쪽으로 패스! 주, 엄청난 스피드!”
“언제 여기까지 왔나요!”
대부분의 팬들은 성배의 활동량이 굉장하다는 것을 잘 알지 못했다.
아무래도 성배의 최대 장점은 정밀한 킥과 완벽한 공수 밸런스, 영리하고 지능적인 플레이에 있었다.
대부분 세련되고 정돈된 느낌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고, 팀을 위해 헌신하는 블루 워커 느낌의 활동량은 이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성배의 활동량이 줄어드는 건 아니었다.
‘좋은 패스.’
성배는 호비뉴로부터 볼을 받아냄과 동시에 페널티 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배리를 마크하던 앤드류스, 아데바요르를 마크하던 기벗 두 선수는 급하게 성배를 막으라 달려왔다.
“뒤에서 접근한 앤드류스를 피해 중앙으로! 슈팅 찬스!”
성배는 오른쪽으로 볼을 꺾은 뒤 중앙으로 몇 발자국 정도 이동했다.
뒤에서 접근해 발을 뻗었다가 실패한 앤드류스는 다시 성배에게 달려들었고, 기벗 역시 성배를 따라붙었다.
‘한 번 더 치면 열리겠다.’
그리고 성배는 침착하게 슈팅 타이밍을 잡았다.
앤드류스는 옆에서 따라붙고 있었기에 슈팅을 방해할 수 없는 위치였다.
앞에서 슈팅 코스를 막고 있는 기벗만 제치면 슈팅을 날릴 수 있었다.
앞으로는 움직이지 않고 옆으로 이동하는 자신을 따라 사이드 스텝을 밟아 따라오는 기벗의 다리가 벌어지는 것을 발견한 성배는 한 번 더 치고 올라가면서 다리를 주시했다.
“빨리 처리해야... 슈팅! 기습!! 로빈슨이 몸을 날려보지만, 그대로 골망을 가릅니다! 두 번째 골! 주성배!! 오늘 경기 두 번째 골까지 필드골로 기록합니다!!”
기벗의 다리가 벌어지며 슈팅 코스가 생기기를 기다린 성배는 기다렸던 대로 루트가 생기자, 왼발 아웃 프론트로 볼을 툭 하고 밀어 넣었다.
중앙으로 움직이던 중에 움직이던 방향과 반대쪽으로, 게다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타이밍에 시도한 슈팅에 타이밍과 방향을 모두 빼앗긴 로빈슨 골키퍼는 볼을 막아낼 수 없었다.
“엄청난 센스! 골을 넣기 위해서 꼭 강하게 슈팅할 필요가 없다는 걸 보여주는 멋진 골이네요! 상대 골키퍼와 수비수의 타이밍을 빼앗은 한 박자 빠른 슈팅! 예상치 못한 슈팅에 블랙번 수비진은 꼼짝도 하지 못했어요!”
전혀 빠르지 않은 슈팅이었는데도 완벽하게 허를 찔린 블랙번 선수들이 전혀 반응하지 못했다.
여유롭게 골망을 가른 슈팅은 그대로 맨체스터 시티의 두 번째 득점으로 기록되었다.
“주, 이적 첫 경기부터 아주 날아다니는데요? 이 정도 활약을 보여주면 수비수 역대 7위의 이적료와 수비수 전체 주급 순위 7위의 계약이 전혀 아쉽지 않아요!”
두 번째 득점까지 필드골로 기록한 성배의 폭주가 무서웠다.
지금까지의 커리어 중 필드골 두 골을 한 경기에 기록한 건 성배도 처음이었다.
‘돈을 받으면 받는 만큼 해줘야지.’
개인적으로도 당연히 만족스러웠다.
맨체스터 시티의 유니폼을 입었고, 4년 계약을 맺으면서 엄청난 대박을 터뜨렸지만, 4년 뒤에도 스물여섯이었다.
4년 뒤의 더 큰 대박을 위해서 11만 유로로도 부족한 더 뛰어난 활약이 필요했다.
* * *
“주, 코너킥을 준비합니다. 맨체스터 시티 선수들, 모두 박스 안쪽으로 이동해 주의 코너킥을 기다립니다.”
성배는 비교적 빠른 시기에 이적한 편이었다.
덕분에 7월 중순부터 있었던 맨체스터 시티의 미국 투어부터 시작해 대부분의 프리 시즌 경기에 참여할 수 있었고, 팀 훈련 역시 한 달 이상 함께했다.
“주의 킥은 나노 단위로 조절이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굉장히 정확하거든요? 맨체스터 시티도 역시 주에게 코너킥을 맡기네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배의 킥은 동료들과 휴즈 감독에게 눈도장을 받았고, 맨체스터 시티의 코너킥과 프리킥 역시 성배의 것이 되었다.
물론, 토트넘 시절과는 달리 오른발 프리킥을 테베즈에게 넘겨야 했지만, 왼발 프리킥을 따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흠. 아데바요르, 아니면 던인가.’
세트피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센터백 두 명 중 리차즈의 신장은 콜로 투레보다도 작았다..
지난 시즌 토트넘에서 아스날을 상대할 때, 제공권을 공략했을 정도로 공중볼을 따내는 데는 좀 아쉬운 선수가 투레였는데 그보다도 더 작은 것이었다.
압도적인 피지컬이 있지만, 그래도 절대적인 신장의 열세는 아쉬운 부분이었다.
다만, 다행히도 190cm의 아데바요르가 있었기에 맨체스터 시티의 높이도 낮은 건 아니었다.
‘아데바요르를 한 번 믿어보자.’
안타깝게도 아데바요르는 성배가 굉장히 싫어하는 스타일의 선수였다.
기량과 재능만 믿고 관리와 훈련에 소홀한 타입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루하루가 치열한 경쟁인 프리미어리그에서 정상급 스트라이커로 살아남을 정도로 그 기량이 출중했다.
적어도 기량적인 측면에서는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블랙번도 의외로 높이가 높진 않네.’
피지컬이 좋은 선수들을 모았다고는 하지만, 의외로 신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194cm의 삼바가 압도적이기는 했는데, 센터백 파트너인 기벗도 181cm에 불과했고, 나머지 선수들도 커봐야 180cm였다.
맨체스터 시티의 높이도 그렇게까지 높은 편이 아니었지만, 상대 센터백의 신장도 작았고, 이렇게 되면 리차즈가 활약하는 상황이 나올 수 있었다.
“주, 왼쪽에서 코너킥! 중앙으로 높게 올라갑니다!”
성배는 삼바가 맡은 아데바요르보다는 조금 더 경쟁이 쉬운 던에게 코너킥을 올려주었다.
킥 자체는 훌륭했고, 위치도 좋았다.
‘음?’
그리고 성배의 눈이 반짝였다.
던에게 이어준 코너킥이었는데, 아데바요르가 큰 신장에 어울리지 않는 유연한 움직임으로 삼바를 떨쳐낸 뒤, 볼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아데바요르!! 헤더!! 골! 골입니다! 골망을 가르는 아데바요르의 멋진 헤더!!”
삼바를 떨쳐내며 앞으로 나온 아데바요르는 힘껏 뛰어올라 헤더를 시도했다.
아데바요르보다 1.5m 정도 뒤에 있던 던에게 맞춘 코너킥이었기 때문에 헤더로 이어가기에는 좀 버거운 높이였는데, 192cm의 신장과 아프리카 특유의 탄력 앞에서는 별다른 장애가 되지 않았다.
‘저런 건 반칙이지. 하!’
반칙에 가까운 피지컬이었지만, 어시스트를 만들어 주었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아데바요르의 골! 그리고 주는 오늘 경기 세 번째 공격 포인트를 기록합니다!”
“맨체스터 시티의 2009/10시즌은 주의 대폭발과 함께 시작되네요!”
그리고 성배는 멀티 골에 이어 어시스트까지 추가하면서 세 번째 공격 포인트를 추가했다.
성배의 맹활약에 사기가 오른 맨체스터 시티는 이어 아일랜드의 골까지 터지면서 블랙번에게 4-0 완승을 거두었다.
맨체스터 시티의 이번 시즌 성적을 부정적으로 전망했던, 전문가를 빙자한 빅4 서포터들에게 한 방 먹이며 기분 좋게 시즌을 시작했다.
< 낭만필드 - 19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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