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190화 (301/356)

< 낭만필드 - 190 >

[지금부터 1분간 바비 롭슨 경을 위한 추모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1분 동안 그의 명복을 빌면서 박수를 보내주세요.]

2009년 8월 15일, 맨체스터 시티의 2009/10시즌이 시작되었다.

장소는 블랙번의 홈구장인 이우드 파크.

하지만 프리미어리그가 개막되는 축제 날임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의 분위기는 숙연했다.

잉글랜드 축구의 기나긴 역사 중 무조건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전설적인 감독, 바비 롭슨 경이 2주 전, 암 투병 끝에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바비 롭슨 경을 추모하는 시간입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팬들은 숙연한 분위기에서 롭슨 경을 추모하며 박수를 보내주고 있습니다.”

“롭슨 경, 하늘에서도 지상에서처럼 멋진 인생을 보냈으면 해요. 거기서도 행복하세요.”

같은 축구인으로서 롭슨 경을 존경했던 해설자의 진심이 담긴 발언에 중계로 지켜보던 사람들은 뭉클함을 느꼈다.

하지만 오늘은 프리미어리그가 개막하는 날.

추모 시간이 끝나자, 사람들은 곧 시작될 경기를 기다리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자, 이번 이적시장 내내 모든 팬들의 이목을 끌었던 맨체스터 시티의 개막전입니다. 지난 시즌을 앞두고 갑부 구단주에게 인수되었던 맨체스터 시티가 본격적으로 팀을 새로 꾸린 뒤 맞는 첫 시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시즌 맨체스터 시티가 보여줄 성적에 대한 관심은 굉장했다.

첼시가 처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에게 인수되었을 때도 비슷했지만, 맨체스터 시티가 보여주는 움직임은 그것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저평가된 선수나 아직 터지지 않은 유망주들을 쓸어모아 그들의 성장과 함께 리그를 지배한 첼시와 달리 맨체스터 시티는 압도적인 자금력을 바탕으로 이름값이 높은 선수들을 쓸어모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항상 말해왔죠. 엄청난 돈으로 뛰어난 선수들을 모으면 과연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할 수 있을까? 언제나 논란이 되어왔던 주제인데요, 맨체스터 시티의 이번 시즌 성적을 통해 진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어요.”

다른 클럽과는 비교조차 힘든 자금력을 앞세워 뛰어난 선수들을 끌어모은 맨체스터 시티.

돈으로 최고의 선수들을 모으면 과연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릴 수 있을 것인가.

이 케케묵은 논쟁을 간접적으로나마 증명해줄 클럽이었다.

덕분에 이번 시즌 맨체스터 시티가 보여줄 경기력과 성적에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산타 크루즈가 빠진 블랙번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겠지.’

사실 당연한 일이지만, 맨체스터 시티는 아직 불안한 부분이 많은 클럽이었다.

돈으로 선수들을 끌어모았지만, 그 과정이 순식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선수들 간의 조직력이 일단 완벽하지 않았다.

그리고 새로운 선수들을 영입하면서 기존의 선수단을 완벽히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포지션이 겹치는 선수들도 많았다.

결정적으로 팀의 수장인 마크 휴즈 감독은 선수 영입에는 일가견이 있었지만, 그들을 활용하는 부분에서 약점이 있는 감독이었다.

‘누가 봐도 리차즈가 측면으로 빠지고 투레가 중앙으로 가는 게 맞지 않나?’

이는 수비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 맨체스터 시티의 수비 선발 라인업은 왼쪽부터 성배-리차즈-던-투레였다.

성배와 던을 제외하면 리차즈와 투레가 서로 자리를 바꾼 상황이었다.

지난 시즌, 리차즈-던의 센터백 라인이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투레는 센터백 외에도 라이트백과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에서 괜찮은 활약을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리차즈를 제대로 활용하려면 측면으로 빼는 게 나을 텐데.’

리차즈는 성배와 완전히 반대되는 포지션의 선수였다.

어마어마한 스피드와 황소처럼 우직하면서 파괴력 넘치는 드리블, 이 선수가 축구 선수인지 격투기 선수인지 구별할 수 없는 엄청난 상체 근육을 앞세우는 그야말로 재능형의 표본이었다.

이러한 장점 덕분에 지난 시즌 센터백으로 경기에 나서면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지만, 장점을 딱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풀백으로 뛰어야 이 장점들을 십분 발휘할 수 있었다.

‘투레라는 믿음직한 센터백이 들어왔는데도 리차즈를 중앙에 박으면 안 되지.’

물론 센터백이라는 포지션은 두 선수 간의 호흡과 조직력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좋은 대안이 있음에도 변화를 머뭇거리면, 선수들의 기량을 끝까지 뽑아낼 수 없었다.

노련하고 기량도 뛰어난 투레가 있는데 리차즈를 중앙에 박고 투레를 오른쪽으로 돌리는 건 좋은 스쿼드의 위력을 끝까지 끌어올릴 수 없는 선택이었다.

‘던이 불안하면 뱅상을 넣든지. 도대체 뱅상은 왜 이렇게 안 쓰는 거야.’

그리고 불만은 또 있었다.

휴즈 감독은 콤파니에게 신뢰를 보내지 않았다.

팀에서 완전히 겉돌던 콤파니는 지난 시즌을 기점으로 어느 정도 적응에 성공했는데, 휴즈 감독은 이번 시즌 다시 콤파니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간주했다.

수비형 미드필더와 중앙 수비수를 번갈아 소화하던 콤파니인데, 던이 불안해서 에버튼의 레스콧에게 거액의 비드를 넣어놓고도 콤파니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박아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나이젤 데 용과 가레스 배리라는 수준급 미드필더들이 영입되며 콤파니는 허공에 붕 떠버렸다.

‘젠장. 뱅상이 분명 대성할 거라는 건 알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네.’

콤파니는 조금의 경험만 더 쌓이고 적응에 성공하기만 한다면 분명 좋은 센터백이 될 것이었다.

친분이 깊은 자신도 있으니 기회만 주어지면 그 시기가 빠르게 다가올 것이었다.

그런데도 마땅히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더 답답했다.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으면... 한 판 붙어야지.’

이제 성배에게도 자격은 충분했다.

맨체스터 시티의 수비수 중 아스날 무패 우승의 주역 중 한 명인 투레 다음으로 많은 주급을 받았고, 선수단 전체에서도 주급 순위 4위였다.

또한,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까지 등에 업었다.

감독에게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개진할 자격은 차고도 넘쳤다.

‘좋아. 그럼 일단 오늘 경기부터 시작해볼까.’

그런 조건들이 있더라도 활약상이 별로라면 그 힘은 약해졌다.

그리고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대충 할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   *   *

“블랙번, 맨체스터 시티의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맨체스터 시티, 확실히 돈을 들인 티가 납니다.”

“경기력이 굉장하죠? 지난 시즌에는 호비뉴를 영입하고도 10위에 그치면서 조롱의 대상이 되었었는데, 오늘의 경기력은 굉장하네요. 아직 첫 경기지만, 이런 경기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만수르 구단주가 공언했던 챔피언스리그 진출도 꿈은 아닐 것 같네요.”

맨체스터 시티가 과연 어떤 경기력을 보여줄 것인지에 대한 관심은 굉장했다.

아무래도 기존의 빅4라 불리는 클럽과 비교하면 시청률에서 상대가 되지 않을 수밖에 없었는데, 오늘의 시청률은 그 네 클럽에 비해 크게 밀리지 않았다.

그 정도로 맨체스터 시티는 이번 시즌 프리미어리그의 중심이었다.

“일단 지난 시즌까지 약점이었던 수비진에는 아직 큰 문제가 보이지 않습니다. 배리, 데 용, 호비뉴, 라이트-필립스의 미드필드 진은 블랙번 미드필드를 완전히 압도하고 있고, 벨라미와 아데바요르의 최전방 역시 훌륭합니다.”

“수비진 이야기를 하자면, 아직 시험해볼 만한 상황이 나오지 않았어요. 블랙번이 워낙에 수세에 몰려있어서 이렇다 할 위기가 없었거든요? 다만 오버 페이 논란이 있었던 왼쪽의 주는 그런 논란만 빼면 확실히 다른 말이 필요 없는 선수네요.”

오늘 경기에서 블랙번은 지난 시즌까지 맨체스터 시티의 약점이었던 수비진을 공략하지 못했다.

경기가 너무 밀려서 그럴 정신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왼쪽의 성배는 자신의 장기인 빌드업 능력과 롱패스, 세트피스 등을 통해 가치를 충분히 증명해내고 있었다.

“주, 전방의 배리에게 내줍니다!”

이번에도 디우프를 가볍게 막아내며 무난하게 볼을 따낸 성배는 중원의 배리에게 볼을 넘겼다.

‘지금 타이밍이 괜찮은데.’

그리고 바로 전방으로 침투했다.

호비뉴와 성배가 자리 잡은 맨체스터 시티의 왼쪽 측면은 굉장한 위력을 보였다.

디우프와 제이콥슨이 지키는 블랙번의 오른쪽 측면은 경기 내내 이들의 정신없는 공격에 헤맸고, 지금도 성배에게 빈틈을 내보였다.

“배리, 뒤쪽의 데 용에게 넘깁니다. 디우프가 달려가 압박합니다.”

그래도 블랙번 역시 그렇게 약하지는 않았다.

블랙번 미드필더들의 강력한 저항에 맨체스터 시티의 공격은 일단 주춤했다.

“데 용, 다시 배리에게. 배리, 뒤쪽으로 내려갑니다.”

데 용에게서 다시 볼을 건네받은 배리는 몸을 돌려 일단 맨체스터 시티 진영 쪽으로 움직이며 숨을 골랐다.

‘지금이다!’

그리고 성배는 제이콥슨의 사각으로 움직여 몸을 숨긴 뒤, 빠르게 중앙 쪽으로 올라갔다.

자신의 동료들이 맨체스터 시티의 공격을 일차적으로 저지하자, 숨을 고르며 자리를 재배치하는 블랙번 수비의 빈틈을 파악한 것이었다.

“앞에 주!!”

그리고 그것을 발견한 호비뉴가 배리에게 소리쳤다.

호비뉴의 외침에 고개를 든 배리는 빈틈을 노려 빠르게 침투하는 성배의 모습을 보았고, 뒤로 움직이던 몸을 강제로 멈추고 다리를 비틀어 전방으로 볼을 투입해주었다.

“배리, 전방으로 길게! 주!!”

블랙번의 뒷공간은 텅 비어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맨체스터 시티의 공격이 저지되며 수비 라인이 내려오다가 다시 올라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었다.

제이콥슨까지 완벽히 따돌리고 침투한 성배는 중앙과 왼쪽 측면 사이 정도의 공간에서 홀로 달렸고, 삼바가 급히 따라오고 있었다.

‘삼바라...’

흑인 특유의 쫀득한 피지컬로 굉장한 힘을 자랑하는 삼바는 상대하기 쉽지 않은 타입이었다.

하지만 지난 시즌 호날두에게 당한 몇 번의 굴욕으로 몸을 사리던 약점이 사라진 성배의 다음 선택은 과감했다.

“볼 트래핑! 안쪽으로!”

‘따라와 봐.’

뒤쪽에서 날아온 배리의 패스를 살짝 몸을 띄우며 받아낸 성배는 왼발로 볼을 트래핑함과 동시에 안쪽으로 꺾었다.

중앙에서 측면으로 급히 내려오던 삼바는 퍼스트 터치로 볼의 경로를 바꾼 성배의 움직임을 따라가기 위해 거의 넘어지다시피 몸을 눕히며 경로를 수정했다.

-턱!

‘그래. 그럴 줄 알았어.’

하지만 몸을 눕혀 진로를 바꾸려던 삼바는 무언가에 몸이 가로막히는 것을 느꼈다.

바로 성배의 어깨였다.

‘다리는 뒤로 뺐어야지.’

몸을 눕힘과 동시에 발을 뒤로 빼서 중심을 잡으려던 삼바는 성배가 어깨로 몸을 받쳐주면서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다.

그리고 몸이 애매하게 눕혀지면서 뒤로 빠져야 했던 발도 그냥 들린 채 땅을 딛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는 성배가 의도한 바였다.

“다시 방향 전환! 삼바, 넘어집니다!”

성배는 삼바의 몸을 받쳐주었던 어깨를 순식간에 빼버렸다.

그리고 어깨를 뺌과 동시에 다시 반대쪽으로 볼을 옮기며 빠져나갔다.

말은 길지만, 순식간에 이어진 일련의 플레이에 삼바는 중심을 잃고 무력하게 쓰러졌다.

‘어딜. 꿈도 꾸지 마.’

발라당 누워버린 삼바는 마지막까지 발을 휘두르며 성배의 볼을 빼앗으려 했지만, 성배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간단한 터치 두 번으로 삼바의 거리에서 벗어났고, 기벗이 도착하기 전, 완벽한 슈팅 찬스를 맞이했다.

‘들어가라!’

솔직히 슈팅에는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노마크 찬스였고, 로빈슨 골키퍼 혼자 감당하기에 골대는 너무 넓었다.

“넘어지면서 왼발 슈팅! 그대로 골문 구석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엄청난 슈팅! 주, 엄청난 슈퍼 골을 성공시키며 팀에 리드를 선물합니다!!”

마지막 순간, 기벗이 거칠게 몸을 날렸지만, 성배는 뒤로 몸을 눕혀 피하면서 슈팅을 시도했다.

성배의 슈팅은 반대편 골대 상단 구석으로 정확히 날아갔고, 로빈슨 골키퍼가 몸을 날려보았지만, 턱없이 짧았다.

“주성배 선수, 왜 맨체스터 시티가 1년이 넘도록 자신을 원했고, 오버 페이 논란이 일 정도로 거액의 계약을 안겨주면서까지 영입했는가를 증명하네요! 정말 멋진 골이에요!!”

지난 시즌까지의 활약도 엄청났지만, 엄청난 계약의 주인공이 된 이상 그 이상의 활약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 득점 장면은 그 이상의 활약을 암시했다.

< 낭만필드 - 190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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