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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사라진 필드-186화 (297/356)

< 낭만필드 - 186 >

“여기 좀 봐주세요!”

한국을 떠난 성배는 잉글랜드로 입성하기 전에 잠깐 벨기에에 들러 스케줄을 소화했다.

사실 벨기에 국적을 가지고 있고, 벨기에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지만, 성배가 벨기에에서 생활하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주 활동 무대가 대륙이 아닌 섬으로 바뀐 이후, 성배가 벨기에에 올 일이 별로 없었던 것이었다.

가족은 한국에 있고, 활동 무대는 잉글랜드이니 벨기에에 굳이 찾아올 이유가 없었다.

“맨체스터 시티 이적은 어떻게 되고 있는 겁니까?”

“레알 마드리드와 첼시, 리버풀도 적극적으로 움직인다던데, 이번 시즌에 이적하시는 겁니까?”

“벨기에 국가대표팀의 월드컵 진출 가능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그렇다 보니 성배가 벨기에에 입국할 때마다 공항은 기자들로 가득 찼다.

성배가 가진 화제성과 팬들의 관심에 비해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지 않다 보니 모습이 보일 때 최대한 많은 것을 뽑아내려 하는 것이었다.

‘내가 벨기에를 너무 소홀히 여겼군. 그래도 내 커리어의 베이스인데.’

그 모습들을 보면서 성배는 벨기에 시장을 소홀히 한 자신의 행동을 반성했다.

인터뷰나 광고 촬영 등 최소한의 활동은 소홀히 하지 않았지만, 정작 모습을 보이는 빈도가 너무 낮았던 것이었다.

활동 무대가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국가대표로서 자신의 팬베이스는 벨기에 국민이었다.

앞으로는 조금 더 벨기에 활동을 신경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자, 너희도 잘 아는 선수지? 토트넘이 주성배, 맨체스터시티의 뱅상 콤파니 선수다.”

벨기에에서 고작 3일 만에 기자회견을 포함해 지면과 잡지, 심지어 방송에 나가는 인터뷰까지 해치운 성배는 마지막 일정으로 친정팀, R.S.C 안더레흐트를 찾았다.

“오늘 하루 동안 너희와 같이 훈련해주면서 이런저런 도움을 줄 거니까 많이 배워라. 이상.”

안더레흐트의 유소년 팀 감독은 그렇게 둘을 소개해주고 뒤로 빠졌다.

이제부터는 성배와 콤파니의 시간이었다.

“뭐, 우리 둘 다 수비수라서 공격수나 미드필더, 골키퍼는 불만이 좀 있겠지만, 그래도 모든 건 결국 하나로 통한다는 말처럼 우리 정도 되면 적어도 너희보다는 훨씬 더 잘 알 거다. 그러니까 너무 실망하지 말고 같이 잘 해보자.”

실제로 성배나 콤파니 정도 위치에 오르면 고작 유소년 선수들보다는 다른 포지션에 대한 이해도도 높을 수밖에 없었다.

혼자 하는 스포츠가 아니고 팀 스포츠이기 때문에 다른 포지션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야 좋은 선수가 될 수 있었다.

“음... 이 자식은 원래 이렇게 재수가 없으니까 너무 심각하게 듣지 말고. 그래도 말은 맞는 말이다. 혹시나, 그럴 리는 없겠지만, 우리가 수비수라고 해서 우리 이야기를 무시하고 그러지는 마라.”

“하하하. 안 그래요!”

“그럴 리가! 최대한 많이 배울 거예요.”

“뭐, 무시해도 상관없다. 뱅상은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별로 상관없는 일이니까. 우리의 조언을 무시하면 손해 보는 건 너희지, 내가 아니거든. 집중해서 뭐 하나라도 배우려고 하는 친구들 가르치기도 부족한 시간인데, 열의도 없는 친구한테 할애할 시간은 없어.”

콤파니의 넉살에 한결 풀어진 분위기였는데, 굳이 성배가 한 마디를 더 보태면서 살짝 무거워졌다.

아무래도 가르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런 분위기가 더 마음에 들었다.

코치가 지나치게 강압적인 한국식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코치의 권위가 지나치게 낮은 유럽식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수들이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것과 동시에 코치의 권위도 서야 한다는 것이 성배의 지론이었다.

“음... 이 친구 때문에 대화는 여기까지. 본격적으로 한번 시작해볼까?”

콤파니가 손뼉을 치면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프랑스계와 네덜란드계의 갈등이 첨예했던 벨기에 대표팀을 나름 잘 통솔했던 미래의 모습이 언뜻 비쳤다.

“저 친구 어때?”

“훌륭하네. 확 눈에 띌 정도로 수준이 달라.”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훈련을 봐준 뒤, 선수들의 연습 경기를 지켜보던 두 사람은 한 명의 유소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고작 열여섯 살이라고 들었는데, 신장은 물론 피지컬까지도 어마어마했다.

제대로 전성기에 접어들 나이가 되면 어느 정도의 괴물이 될지 기대될 정도였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주, 뭐였지?”

“쯧. 벌써 치매냐. 그렇게 부상을 당하더니 머리도 다쳤나 봐.”

조금 전에 유소년 선수들 앞에서 자신을 놀렸던 걸 잊지 않은 성배였다.

한 마디로 복수한 성배는 이어 입을 열었다.

“로멜루 루카쿠. 다음 시즌부터 1군에 합류한다고 하더라.”

“벌써? 고작 열여섯에? 대단하네.”

두 선수의 시선을 동시에 잡아끈 선수는 바로 로멜루 루카쿠였다.

콩고 민주 공화국 국가대표 출신 아버지와 함께 벨기에로 이주한 루카쿠는 당시 주필러 리그 소속 클럽이었던 리에르세에서 축구를 시작해 2년 동안 68경기 121골을 넣었다.

그리고 리에르세가 강등당한 이후 안더레흐트로 이적했고, 93경기에 131골을 넣었다.

그 활약을 인정받아 지난 시즌 마지막 경기에 1군 무대에 데뷔했고, 다음 시즌부터는 1군에 합류하기로 되어있는 상황이었다.

“너도 열여섯에 데뷔하고 열일곱부터 1군에서 주전으로 뛰었잖아. 그런 식으로 자기 얼굴에 금칠하는 거냐.”

“아, 들켰나.”

물론, 루카쿠도 대단하긴 하지만, 콤파니 역시 열여섯에 1군 무대에 데뷔한 선수였다.

엄밀히 따지자면 열여섯 살에 데뷔해 바로 주전 자리를 차지한 콤파니보다는 좀 느린 페이스였다.

그렇다고 해도 엄청난 속도인 것은 맞았다.

‘참... 내가 엄청난 사람들 사이에 있었군. 요즘 들어 자꾸 까먹는다니까.’

최근 일이 잘 풀려가면서 지금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지를 자꾸 잊어버렸다.

전처럼 그런 선수들을 보면서 위축된다거나 자기 자신을 비하하지는 않았지만,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 사실들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절대로 잊어버리면 안 돼. 지금 나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다 이런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니까. 조금만 방심하면 바로 역전당한다.’

이런 괴물들이 판을 치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절대로 마음을 놓지 말아야 했다.

그래야 최대한 오래도록 이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저 친구도 괜찮네. 너랑 같은 포지션인 것 같은데?”

“조단 루카쿠. 아까 그 친구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이라고 하던데. 확실히 아버지도 콩고 민주 공화국 국가대표였다고 하더니, 유전자가 달라.”

“... 뭐야. 아깐 관심 없는 척하더니 다 알고 있네.”

“그래도 가르치려고 온 거고 벨기에의 미래들인데 유망한 친구들은 미리 알아봐야지. 그 정도도 안 하고 온 거냐.”

수비수 중에서도 한 명이 눈에 띄었다.

성배와 같은 레프트백, 조단 루카쿠였다.

형인 로멜루 루카쿠처럼 압도적인 재능을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국가대표팀을 왔다 갔다 할 정도의 재능은 충분해 보였다.

“그리고 미드필더의 데니스 프라엣이랑 저기 열두 살짜리 유리 틸레망스도 꽤 한다더라. 영상도 잠깐 본 적 있는데, 프라엣은 분명 가능성이 보이고, 틸레망스는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일단 아예 핫바지는 아닌 것 같아.”

성배와 콤파니가 함께 움직였으니 당연히 언론도 이들을 따라붙었다.

지금 성배와 콤파니가 서 있는 옆에도 언론사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사진도 찍고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일일이 기록중인 그들은 지금 성배의 이 말도 당연히 기록하고 있었다.

“야. 너무한 거 아니냐. 너만 우리나라 유망주들한테 관심 많고 나는 완전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잖아.”

“사실인데, 뭘.”

오기 전에 따로 공부한 보람이 있었다.

향후 벨기에 국가대표팀의 핵심으로 성장하는 선수들인 만큼 전생에서도 이름은 들어본 적 있었다.

게다가 혹시나 해서 미리 숙지까지 하고 온 상황이었다.

아마 내일쯤 되면 벨기에의 축구팬 사이에 성배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로 오를 것이었다.

***

“내가 기사에서 봤는데, 너 재산이 어마어마하다던데, 어떻게 번 건지 좀 가르쳐줘봐.”

일정을 마치고 오랜만에 펍에 들러 가볍게 맥주 한 잔씩을 시킨 뒤, 콤파니가 성배에게 질문을 던졌다.

실제로 콤파니는 축구 선수 중 손에 꼽히는 사업 수완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직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지만, 전생에서 돈을 번 뒤, 맨체스터 MBA 과정을 수학하고 리무진 서비스 회사, 스포츠바, 음악 프로덕션 사업까지 손을 대다가 나중에는 3부 리그 클럽을 인수하기까지 했다.

그 정도로 사업과 재테크에 관심이 많았으니, 성배의 투자 수완에 대해 궁금해할 수밖에 없었다.

“운이 좋았지. 그냥 전문가 이야기 듣고 아, 저거다! 해서 투자하면 바로 대박이 나니까. 뭐, 별다른 비법 같은 건 없는데.”

성배의 재산은 지금까지 실제로 번 돈의 두 배를 넘어 세 배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게다가 아직 집도 한 채 없이 지금까지 세를 살아왔고, 그리 비싸지 않은 중형차 한 대 이외에는 딱히 사치품이라 할 만한 것도 없었기에 생활비와 세금을 제외한 대부분의 수입이 그대로 쌓였다.

그 덕에 지금은 수백억대의 자산가가 되어 있었다.

“뭐, 그 말을 그대로 믿긴 힘들지만, 그렇다고 하니 할 말은 없네. 어쨌든, 부럽다.”

“부럽긴. 어차피 한 철 장사인데 벌 수 있는 만큼 벌어놔야지.”

성배의 자산은 이미 십 년 이상 월드클래스로 활약해온 선수들에게도 밀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축구 선수 전체의 수익을 따져도 30위권 안에 들어갈 정도였으니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리 월드클래스 선수로 활약하면서 버는 돈이 많아도 결국 돈을 벌기 위한 방법으로는 투자가 최고였다.

“나중에 내가 사업하면 투자나 좀 해라.”

“개뿔. 원래 친한 사이에는 투자하는 거 아니다. 아예 줄 생각으로 조그맣게 줄 순 있지만, 투자할 생각은 없다.”

농담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이쪽으로는 확실하게 할 생각이었다.

지금과 비교하면 전체 재산의 1%도 안 되는 돈이지만, 전생에서 가용 가능한 전 재산에 가까웠던 돈을 친한 사이라고 생각했던 동료에게 투자했다가 날려 먹은 적이 있었다.

어차피 두 배, 세 배의 수익을 낼 수 있는 투자처가 널려 있으니 이번 생에서는 절대로 지인에게 투자할 생각이 없었다.

“혹시나 나중에 네 사업도 잘되면 같이 돈 합쳐서 클럽이나 인수하자. 혼자서는 아무리 잘 벌어봤자 2부 리그 이상 클럽 인수하긴 힘드니까. 돈 모아서 2부 리그 클럽이라도 인수해야 뭐라도 해보지.”

“오, 안 그래도 내 꿈 중 하나가 구단주 자리에 앉아서 클럽 운영하는 거였는데. 잘됐네.”

한국 프로스포츠는 적자 내서 모기업 홍보하는 수단으로 시작했고, 여전히 그랬지만, 유럽의 프로 스포츠는 투자해서 수익을 내기 딱 좋은 아이템이었다.

특히나 2부 리그 클럽을 1부 리그로 승격시킨 뒤 다시 매각하면 그 차액이 어마어마했다.

“뭐, 생각해 놓은 클럽이라도 있어?”

“지금 돈도 없는데 생각은 무슨... 굳이 꼽으라면 역사도 있고, 팬도 많은데 성적은 안 나오는 클럽이 좋겠지. 성적만 내면 바로 돈방석이니까.”

유럽 축구계에서 가장 비싼 프리미어리그로 승격한 QPR 지분 66%가 2011년에 팔릴 때 600억 대였다.

규모가 작은 벨기에 리그, 그것도 2부 리그에 머무르고 있는 클럽이라면 아무리 역사와 전통이 있더라도 100억에도 한참 못 미치는 가격에 인수할 수 있을 터였다.

성배 혼자서도 운영은 가능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싸고 돈도 많이 드는 프리미어리그의 웨스트 브롬 구단주 제레미 피어스는 전 재산이 1,000억에도 못 미쳤는데, 벨기에와 잉글랜드의 규모 차이를 감안하면 벨기에 2부 리그 클럽 정도는 지금 당장이라도 인수해 운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설, 부대시설, 경기장 주변, 선수 영입 등 돈이 들어갈 곳은 많았고, 리스크를 분담하는 것까지 감안하면 공동 인수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 클럽이 있나? 우리나라는 축구계가 크지 않아서 역사도 깊고 팬도 많으면 거의 1부 리그에 있을 텐데?”

“왜, 있잖아.”

성배가 가볍게 미소 지었다.

“로얄 앤트워프.”

< 낭만필드 - 186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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