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82 >
“이제 시작하는 것치고는 괜찮은 거죠? 뭘 알아야지.”
잉글랜드에서의 바쁜 일정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온 성배는 급한 일정들을 몰아서 처리한 뒤, 마지막으로 K.I.S FC와 관련된 사항을 확인했다.
이제 이것만 끝나면 아무 생각 없이 쉴 수 있었다.
일정 중간중간 비는 시간에 짬짬이 쉬어오긴 했지만, 아무 생각하지 않고 좀 쉬고 싶었다.
“나도 잘 모르는데 나름 괜찮은 시작이라고 하더라.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고 예상보다 훨씬 좋은 수치라던데?”
이 자리에는 성배뿐만 아니라 박인진과 윤기표도 참석해 있었다.
K.I.S FC는 세 선수가 함께 투자해 만든 클럽이었지만, 세 선수 모두 해외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직접 관리할 수는 없었다.
당연히 직원들도 뽑았고, 전문 경영인도 고용한 상태였다.
이 자리는 그 전문 경영인과 직원들, 그리고 외부 전문가들이 분석한 내용을 듣고 앞으로 어떻게 운영해 나갈지 토의하는 자리였다.
“주성배 선수도 잘 알겠지만, 지난번에 아마추어 축구계 관련 이슈가 크게 터지면서 학부모들의 불안감이 커졌습니다.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기존 엘리트 축구 선수 부모들의 문의도 상당합니다.”
석영균 감독과 성배의 일이 터지고 난 뒤, 연쇄작용으로 다른 비리들까지 터져나왔다.
그간 입을 다물고 꾹 참아왔던 다른 피해자들까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덕분이었다.
물론, 그래봐야 빙산의 일각이었고, 흐지부지 넘어갔지만, 자기 자녀들의 일인 학부모들에게는 굉장한 충격이었다.
“음... 사실 저희도 그 부분이 아쉽습니다만, 어쩔 수 없어요. 아직 우리나라 유소년 축구는 클럽 중심이 아니라 학교 중심이니까요.”
윤기표의 말처럼 어느 정도 나이가 찬 유소년 선수들은 K.I.S FC에서 어떻게 관리해줄 방법이 없었다.
유럽에는 프랑스의 클레어퐁텐처럼 유소년들만 전문적으로 키워내는 클럽팀이 존재했고, 이적료를 받고 그들을 프로팀에 보내주는 역할을 했지만, 한국에서는 시기상조였다.
모든 유소년 선수들이 학교팀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클럽을 만들 수는 있겠지만, 진지하게 프로를 노리는 선수들은 아무래도 학교에 소속되어야 했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비리가 걱정되는 거라면, 우리가 나서서 법률 자문 역할을 해주는 건 어떨까요? 사실, 몰라서 당하는 거지, 전문가가 도와주면 멋모르고 당할 일은 거의 없을 겁니다.”
전문가 집단의 한 사람이 의견을 개진했다.
실제로 법률 자문만 제대로 해주고 아이들과 학부모들에게 제대로 된 정보만 제공할 수 있다면 심각한 비리는 잡아낼 수 있었다.
“글쎄요. 과연 그게 쉬울까요?”
하지만 성배나 박인진, 윤기표는 그 효과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이론적으로만 생각하는 전문가 집단과는 달리 직접 경험해본 선수 출신들만 알 수 있는 문제였다.
“이 바닥은 생각보다 좁아요. 찍히면 끝이라는 얘기입니다. 자, 그렇게 해서 감독 한 명을 날려버렸다 칩시다. 그러면 다음 감독이 들어올 겁니다. 그런데 그 감독이 전 감독과 모르는 사이일까요? 건너 건너 결국 다 아는 사이고 선후배 사이입니다.”
성배가 입을 열었다.
취지도 좋고 의도도 좋지만, 세상일은 이성적으로만 돌아가지 않는 법이었다.
“그렇다면 새로운 감독이 전 감독을 날려버린 선수를 어떻게 대할까요? 불법적이지 않은 한도 내에서 어떻게든 괴롭혀대겠죠. 그러면 그 선수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축구화 벗는 겁니다.”
아쉬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불법적인 행동이 포함되지만 않는다면 어떻게 제재할 방법이 없었다.
“자, 일단 이 부분은 조금 더 고민을 해보도록 하죠. 일단 설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중점적으로 고려했던 미취학 아동들 혹은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 관리부터 튼튼하게 해놓자고요.”
박인진이 나서서 분위기를 정리했다.
나이가 있는 유소년 선수들에 대한 관리는 철저하게 준비하고 조사해서 들어가야 했다.
중고등학교에서도 선수 생활을 하는 아이들은 프로를 노리는 경우가 많았고, 단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이나 잘못된 만남이 인생을 흔들게 될 것이었다.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
***
“으아... 힘들다. 차라리 A매치를 두 경기 뛰고 말지, 이건 못할 짓이야.”
회의가 끝나자마자 윤기표가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확실히 익숙하지 않은 일이어서 그런지 경기를 뛰는 것보다 더 피곤했다.
“뭐, 그래도 기분은 좋네요. 생각보다도 더 잘되고 있으니까.”
성배의 말처럼 K.I.S FC의 성장세는 무서웠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세 선수가 함께 세운 클럽이었다.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경상도랑 전라도의 학부모들이 언제 오냐고 문의한다더라. 그것도 고려해봐야지.”
수도권에 하나, 강원도에 하나, 충청도에 하나씩 존재하는 K.I.S FC였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학부모들은 언제 자신들의 지역에 들어오는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생각보다 재미있네. 이왕 이렇게 된 거 은퇴하면 귀국해서 본격적으로 뛰어들어볼까.”
77년생인 윤기표는 슬슬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생각할 시점이었다.
이미 프리미어리그를 떠나 리그앙, 그것도 중하위권 팀으로 이적해 뛰고 있었다.
이번 시즌에도 풀타임 주전으로 활약했고, 훌륭한 활약을 보여주며 몇 시즌 정도는 끄떡없을 거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아무리 미뤄도 2-3년 안에는 은퇴하게 될 것이었다.
“형이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죠. 그래도 천천히 생각해보세요.”
“그러니까. 너무 서둘러서 생각하지 마. 다른 일 하면서도 충분히 병행할 수 있으니까. 우리가 딱히 할 일이 많은 것도 아니고.”
성배와 박인진 입장에서는 윤기표가 맡아주면 믿음직스럽긴 했다.
아무래도 해외에 계속 있어야 하는 두 사람이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믿음직한 윤기표가 맡아주면 걱정할 일이 줄어들 것이었다.
하지만 일단 윤기표의 의사가 가장 중요했다.
“뭐, 나도 당장 은퇴하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천천히 생각해봐야지. 내 나이도 벌써 서른셋인데.”
윤기표는 물론이고 박인진도 벌써 스물아홉, 20대의 끝자락에 서 있었다.
한창 전성기를 달릴 나이지만, 선수생활이 그리 길게 남은 것도 아니었다.
생명이 짧을 수밖에 없는 운동선수의 숙명이었다.
“자, 그런 의미에서 내가 할 말이 있는데.”
잠시 무거워진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박인진이 입을 열었다.
“뭔데?”
윤기표와 성배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박인진은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방송 하나만 같이 나가자.”
“방송? 갑자기 무슨 소리야? 혹시 지난 번에 그거 말하는 거야? 나는 한다고 했는데?”
“방송이요? 저는 방송 출연 할 생각 없는데...”
박인진의 말에 윤기표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성배는 당황했다.
뜬금없이 나온 말이었다.
“얼마 전에 토크쇼 섭외가 들어왔는데, 성배 네가 거절했다며? 나한테 설득해달라고 하더라.”
“응? 성배 거절했어?”
방송 출연을 칼같이 거절했고, 연락이 오는 것도 무시했더니 박인진을 공략한 듯했다.
자신과 두 사람이 친하다는 것을 알고 함께 K.I.S FC를 설립했다는 것도 알았기에 이쪽을 공략한 것이었다.
“네. 아무래도 방송은 부담스럽기도 하고, 별로 나가고 싶지도 않아서요. 피곤하기만 하고, 제가 방송하는 사람도 아니고요. 차라리 푹 쉬면서 다음 시즌 준비하는 게 낫죠.”
어차피 방송을 통해 얼굴을 비추지 않아도 인지도는 충분했다.
몇몇 기업과 이미 광고 계약을 마쳤고, 촬영까지도 끝냈다.
단기 계약도 아니었고, 메인은 어디까지나 유럽 활동이었기 때문에 굳이 인지도를 올릴 필요도 없었다.
“그래도 얼굴 한 번 비추면 좋잖아. 은근히 재미도 있어. 운동만 하다가는 오래 못 간다. 가끔 다른 것도 해봐야지. 혹시 알아? 체질일지.”
박인진은 설득을 포기하지 않았다.
성배가 생각보다 완고했지만,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취지도 좋고 괜찮을 것 같은데. 후배들이나 어린 애들한테 도움도 될 것 같고. 우리가 그렇게 후배들 만날 기회는 별로 없잖아. 성공한 선배로서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좋은 일이지.”
윤기표도 거들었다.
다만, 방송 출연은 애초부터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내용인지도 확인하지 않았는데, 대충 멘토링 비슷한 형식인 듯했다.
“...방송 내용이 뭔데요?”
성배가 전생의 성격을 다 버린 건 아니었다.
전생의 성격이 나오는 몇 안 되는 경우 중 하나가 축구 선수를 목표로 운동하는 어린 친구들을 대할 때였다.
아무래도 자신이 고생고생해서 이 자리까지 올라왔기 때문에 다른 모든 부분에서는 냉정해지려 노력해도 유소년 선수들에 대한 관심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우리 이야기 잠깐 하고, 대부분은 관객들한테 질문받고 조언해주는 거야. 아무래도 우리가 성공한 선수들이니까 운동선수 특집으로 한다더라. 관객들도 운동선수들이래.”
“2군 선수들도 있고,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한 아마추어 선수들도 있고, 유소년 선수들도 있다던데. 아무래도 성공한 선수들한테 직접 조언을 구할 기회가 없으니까. 우리 둘은 나간다고 했으니까 이미 모집 시작했는데, 경쟁률이 엄청나다더라.”
박인진과 윤기표는 열정적으로 성배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취지는 좋았다.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동종업계의 성공한 선배들의 조언을 들을 기회였다.
당연히 경쟁률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음...”
절대로 방송 출연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성배지만, 두 사람이 이렇게까지 설득하는 데다가 취지 또한 좋았기 때문에 마음이 흔들렸다.
과거의 자신이 간절히 바랐던 기회이기도 했다.
어떻게든 한 번이라도 박인진이나 윤기표와 만나 조언을 구하고 싶었다.
그런 자신이 지금은 이들과 동일선상에서 같은 취급을 받으며 여타 선수들의 선망을 받게 된 것이었다.
‘제길. 다른 사람들한테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는데.’
과거로 돌아오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신경을 끄고 자신의 인생만을 살기로 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꽤 잘 지켜오면서 살았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좀 고민이 되었다.
‘방송이라는 것만 빼면 그냥 애들한테 몇 마디 해준다고 생각하면 되는 건데...’
조금씩 출연하는 방향으로 마음이 돌아서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나가려고 하는 것도 자기만족이었다.
자신이 아이들을 위해 뭐라도 해줬다는 만족감을 얻으려 하는 행동이었다.
진심으로 아이들을 위했다면 직접 나서서 무슨 일이라도 했을 것이었다.
***
“어렵게 모셨습니다!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세 선수, 박인진, 윤기표, 주성배 선수입니다!”
[와아아아아!!!]
6월의 어느 날, 한 스튜디오에서는 방송 촬영이 한창이었다.
콘서트처럼 수백 명의 관객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고, 무대에는 몇 명의 연예인들과 세 선수가 자리해 있었다.
‘내가 어쩌다 여기에...’
성배는 입가에 억지로 미소를 띠우는 데 성공했다.
카메라와 관객들을 향해 인사를 하면서도 여전히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낯설다, 낯설어.’
수많은 카메라와 수많은 스태프들, 그리고 많은 연예인들까지.
전생이든 현생이든 연예인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어 잘 몰랐지만, 젊은 남녀 아이돌들도 있었다.
그리고 얼굴은 꽤나 낯이 익은 유명 배우도 있었다.
‘예쁘긴 예쁘네.’
그들에 대한 시선은 금방 거둘 수 있었다.
별로 관심도 없었다.
성배의 시선을 붙잡은 것은 관객석에서 선망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어린 선수들과 씁쓸한 분위기의 몇몇 젊은 선수들이었다.
< 낭만필드 - 18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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