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81 >
“발이 생각보다는 작은 편이시군요.”
“그렇습니까? 제 키에 이 정도면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데 말이죠.”
시즌은 끝났지만, 성배는 시즌보다 더 바빠졌다.
시즌 중에는 경기와 훈련, 휴식을 반복하기만 하면 되는 스케줄이었는데, 시즌이 끝나자 시즌 중에 미뤄놓았던 여러 스케줄들을 모두 수행해야 했던 것이었다.
“역시 볼과 넓게 닿는 축구화가 낫겠죠?”
“아닙니다. 너무 넓게 닿을 필요는 없습니다. 넓지도, 좁지도 않게 적당히 닿으면 좋겠고, 대신 면적을 좁힌 만큼 얇게 빼서 경량화시키는 게 좋습니다.”
오늘의 첫 번째 일정은 얼마 전, 성배와 후원 계약을 맺은 스포츠용품 기업 본사 방문이었다.
몇 달 전, 이전의 스포츠용품 기업과 후원 계약이 끝난 성배에게 동종업계의 수많은 기업들이 러브콜을 보냈다.
벨기에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이자 토트넘의 스타, 게다가 열정적이기로 유명한 맨체스터 시티 서포터들의 지지를 받고 있고, 거기에 더해 대한민국의 스타이기도 한 선수.
기업들이 어떻게든 후원을 해주고 싶어 안달이 나는 것도 당연했다.
“경량화 말입니까? 그런데 볼에 닿는 면적을 줄이면 킥의 정확도에 조금이나마 영향이 있을 텐데요.”
경쟁에서 승리한 기업은 세계 스포츠용품 시장 3위의 기업이었다.
이전에 계약했던 기업이 2위였던 것을 감안하면 다운그레이드라고 오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2위 기업의 흔한 모델 중 한 명에서 3위 기업의 주력 모델로 옮긴 것이었다.
당연히 후원 규모도 어마어마했고, 오직 성배만을 위한 축구화를 제작해줄 정도로 성배에게 지극정성을 보였다.
“그 정도는 감당해낼 자신 있습니다. 킥 하나는 자신 있으니까요. 킥 정확도를 조금 포기하더라도 스피드를 좀 더 낼 수 있게 하는 게 낫습니다.”
오늘 방문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시즌 중에 축구화를 바꾸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고, 시즌이 끝나자마자 바로 제작에 착수, 프리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그것 말고는 따로 부탁하실 건 없나요?”
“예. 없습니다. 확인해보니까 제 마음에 딱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하루라도 빨리 받아보고 싶어서 지금 미치겠습니다. 하하하.”
사실 1위, 2위, 3위 등 순위를 나누긴 하지만, 기술적인 차이는 미미했다.
물론, 점점 상향 평준화되는 선수들의 기량과 축구용품의 기술력 속에서 그 아주 미미한 차이가 진짜를 나타내는 것이긴 하지만, 성배는 일단 그런 것에 민감한 선수가 아니었다.
즉, 3위 기업의 축구화나 1위 기업의 축구화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런 기업에서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제작하는 축구화는 얼마나 대단할지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실망하지 않으실 걸요? 안 그래도 얼마 전에 드디어 신기술 하나가 일선에 적용되기 시작했거든요. 크게 만족하실 거라 자신 있게 말씀드리죠.”
이미 스폰서 계약이 체결되었던 몇 달 전부터 전문가들이 달려들어 성배의 플레이 스타일과 체형, 무게 중심 등 모든 정보들을 분석해 최적의 축구화를 디자인해 놓은 상황이었다.
마지막으로 성배의 요구 사항에 따라 세밀한 수정을 거쳤고, 이제 제작만이 남아있었다.
“이렇게까지 자신하시니 정말 기대됩니다. 다음 시즌에 장난 아니겠는데요?”
오직 자신만을 위한 축구화.
선수생활을 통틀어 처음으로 가져보는 것이었다.
장비에 민감한 편도 아니고, 욕심이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
“다음 스케줄은 뭡니까?”
“한 일주일 정도는 스케줄이 꽉 잡혀 있습니다. 음료 브랜드 세 곳, 정장 브랜드 다섯 곳, 면도기 브랜드 두 곳, 속옷 브랜드 세 곳, 아웃도어 브랜드 두 곳, 자동차 세 곳, 화장품에 전자기기, 음반 회사에...”
다음 스케줄을 물어본 성배의 말에 버크만의 대답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성배는 일단 말을 끊었다.
“아니, 그게 다 뭡니까? 저는 그냥 스케줄을 물었을 뿐인데요.”
“이게 다 스케줄입니다. 지금까지 주에게 들어온 광고, 후원 제의인데, 아직 반 정도 남았습니다. 마저 말씀드립니까?”
프리미어리그의 위력은 대단했다.
아약스 시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광고와 후원 제의가 물밀듯 쏟아졌다.
역시 전 세계의 자본이 모인다는 프리미어리그다운 영향력이었다.
“아닙니다. 그냥 알아서 데리고 다니세요. 조용히 있겠습니다.”
기분은 좋지만, 여기저기 불러 다니면서 계약하고 광고 촬영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속이 미식거렸다.
물론, 머리 아픈 협상들은 버크만이 알아서 하겠지만, 촬영하는 것만으로도 그런 중노동이 없었다.
전생에는 그렇게 부러워했던 일들인데, 막상 겪어보니 이만큼 피곤한 일도 없었다.
“그래도 이번 친선 경기 명단에 포함되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만약 일본까지 가서 A매치 참가하셨으면 올해 휴가는 없을 뻔했습니다.”
이제 막 벨기에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은 베우스만테른 감독은 그간 기회를 받지 못했던 선수들을 중용해 이번 친선 경기 2연전에 임했다.
성배와 콤파니 등 입지가 확실한 선수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만약 성배가 이번 친선 경기까지 치렀다면 휴가를 전혀 즐기지 못했을 것이었다.
“일단 불행 중 다행입니다. 하하...”
“일단 겹치지 않는 품목, 브랜드 이미지, 후원 규모 등을 감안하면 적게는 3개에서 많게는 6개까지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그렇게나 많습니까?”
혀가 자동으로 세상 밖을 구경했다.
성배의 예상보다 훨씬 많은 양이었다.
“음료, 자동차, 정장은 무조건 찍어야 할 것 같고, 속옷이나 아웃도어, 면도기도 단가가 괜찮습니다. 전자기기나 화장품 쪽도 나쁘지 않습니다. 어쩌면 더 많아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벌 수 있을 때 벌자는 게 성배의 지론이었지만, 듣고 보니 이게 만만치 않았다.
왜 몇몇 선수들이 유명세에 비해 대외 활동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지 바로 이해가 되었다.
“어떻게, 줄입니까? 어차피 협상이니까 우리 쪽에서 안 한다고 하면 그만입니다.”
솔직히 잠깐 흔들렸다.
한국에도 들어가 봐야 하고, 한국에 가서도 K.I.S FC 관련으로 며칠 정도 일을 봐야 했는데, 여기서도 그렇게 바쁘게 사는 건 꺼려졌다.
“아닙니다. 찾아줄 때 찾아가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적절하다 싶은 건 다 가져오세요.”
성배 개인의 기량과 스타성에 끌려 들어온 것들이 아니었다.
벨기에와 한국, 그리고 잉글랜드에까지 넓게 분포된 성배의 팬층 덕분이었다.
한국은 모르겠지만, 벨기에와 잉글랜드에는 성배를 대체할 스타가 수없이 많았고, 그들이 본격적으로 올라오면 이렇게 바쁘고 싶어도 바쁠 수 없을 것이었다.
“역시. 그러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미 광고 촬영이 잡혀있습니다. 오늘은 협상이 아직 남은 기업들에 방문하는 거고, 내일부터 광고 촬영 일정도 시작됩니다.”
“이런...”
“하하, 다 같이 좋자고 하는 일 아닙니까? 기쁘게, 기쁘게 웃으면서 하죠, 뭐.”
버크만의 회사인 알랭 에이전시의 대주주 중 한 명이 성배였다.
성배가 열심히 일하면 자신의 몫으로 떨어지는 금액뿐만 아니라 회사의 배당금으로 받을 금액도 늘어났다.
“에휴, 다 좋으니까 최대한 빨리 끝내고 한국에 들어가서 쉬고 싶습니다. 가족들이랑 좀 쉬어야 다음 시즌도 잘 치르지 않겠습니까.”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리고 들어가시는 김에 한국에서도 광고 두 개 정도 촬영하셔야 할 겁니다. 한국 쪽 기업에서도 제의가 많이 와서 말입니다.”
“음...”
한국에 들어가도 쉴 시간은 많지 않았다.
대충 잉글랜드에서의 일이 마무리되면 6월 초, 한국으로 들어가서 한국에서의 일이 마무리되면 6월 중순에서 말.
7월 초중순에는 다시 복귀해야 했기 때문에 쉴 수 있는 시간은 2주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오락 프로그램 섭외가 엄청난데, 일단 이건 다 거절했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오락 프로그램에 나갈 생각은 없습니다.”
언제나처럼 한국 방송계는 비시즌 중 스포츠 스타들을 섭외하기 위해 발 빠르게 나섰다.
축구, 야구, 수영, 리듬체조, 피겨 스케이팅 등 다양한 분야의 선수들이 각자의 이유로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그들도 무조건 좋아서 출연하는 건 아니었고, 성배도 굳이 그런 선수들을 비난할 마음은 없었다.
비난은커녕 그렇게라도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그들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자신은 굳이 방송 프로그램에 나갈 필요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방송 프로그램은 없는 것으로 하죠.”
버크만과의 대화를 마친 성배는 바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시즌은 끝났지만, 이제부터 강행군의 시작이었다.
이제 막 후원계약을 시작하는 시점이었기에 바쁠 뿐, 계약이 자리 잡는 내년부터는 바쁘지 않을 거라는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
‘엉망이군, 엉망이야.’
아직 잉글랜드를 벗어나지 못한 성배는 5월의 마지막 날, TV 앞에 앉아 있었다.
성배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아... 벨기에. 또 한 번 실점합니다. 야노 키시의 득점. 4-0, 일본에게 네 골 차로 끌려갑니다.]
[일본의 레프트백인 나가토모 유토 선수, 굉장히 좋은 선수네요.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합니다. 이 선수, 주목할 필요가 있겠는데요? 유럽에서도 충분히 통할 만한 기량을 갖추고 있어요.]
벨기에의 친선 경기 상대는 아시아의 일본이었다.
아직 나가토모나 우치다, 카가와 등 핵심 선수들이 유럽에서 활약하기 전이었지만, 그 재능만큼은 확실했다.
나카무라 슌스케, 혼다 케이스케, 하세베 마코토, 나가토모 유토, 우치다 아쓰토, 오카자키 신지, 카가와 신지 등 베스트 멤버를 모두 기용한 일본은 분명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일본한테 지니까 배로 기분 나빠.’
게다가 일본의 홈에서 벌어진 경기였고, 이틀 전 홈에서 칠레와 경기를 치르고 급히 날아와 다시 경기를 치른 벨기에 선수들의 컨디션도 엉망이었다.
주전 멤버가 아닌 백업 멤버들로 구성된 대표팀이기도 했다.
그러나.
변명리가 이렇게 많아도 0-4라는 치욕적인 스코어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확실히 스쿼드가 너무 얇아.’
베르마엘렌을 제외하고 성배와 콤파니, 반 바이텐, 베르통헨 등이 전부 빠진 벨기에의 수비진은 너무나 무력했다.
문제는 알더베이럴트, 스웨르츠, 포코뇰리로 구성된 지금의 수비진은 주전 바로 밑, 그러니까 1.5군의 선수들이라는 것이었다.
당장 주전 선수들이 부상이라도 당하면 국가대표로 경기에 나서야 할 선수들인데, 아시아의 일본에게 네 골이나 허용하는 졸전을 펼치고 있었다.
‘문제가 심각한데.’
이래서야 주전 한 명이라도 빠지면 사단이 날 수밖에 없었다.
주전이 빠졌던 지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의 2연전 결과가 그것을 증명했다.
마르텐스와 뎀벨레의 공격진도 딱히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아시아에서도 피지컬이 약하기로 소문난 일본의 수비진을 전혀 공략하지 못했다.
‘...2010년 월드컵도 포기해야 하나.’
어쩌면 이번 월드컵도 일찌감치 포기하고 리빌딩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더 나을지 몰랐다.
당장의 성적이 아니라 리빌딩을 이끌 수 있는 감독을 선임해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내실을 다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주전 선수들이 문제없이 가동될 수만 있다면 아직 가능성이 있었지만, 은근히 유리몸 기질이 있는 벨기에 주전 선수들이 과연 멀쩡하게 버텨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 낭만필드 - 18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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