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79 >
“이야, 수고했다. 오랜만에 재미있었어.”
“...수고는 무슨.”
호날두가 먼저 성배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성배 역시 손을 내밀어 호날두의 손을 마주 잡아주었다.
“지난 경기까지만 하더라도 대책 없이 달려들어서 여기까지인가, 싶었는데. 그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완전 다른 사람이던데?”
사실 지난 칼링컵에서 거친 플레이로 호날두를 꽤 잘 막아냈던 성배였지만, 그때는 호날두가 부상이라도 당할까 걱정해 피했다는 느낌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오늘은 성배의 플레이가 호날두를 묶어놓은 것이 먼저였고, 호날두가 몸을 사린 건 그 다음 일이었다.
선후 관계가 바뀐 것이었다.
“덕분이지. 그날 이성을 잃게 해 준 덕분에 강하게 달려드는 법도 익혔으니까.”
“음... 이거 무서운 상대를 하나 키워준 거 아닐까 몰라.”
경기는 2-2로 종료되었다.
70분에 맨유의 동점 골이 터진 이후, 맨유는 계속해서 토트넘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하지만 토트넘도 더는 당하지 않았다.
성배와 베일의 왼쪽 측면에 모드리치의 경기 조율을 앞세운 토트넘은 밀리는 와중에도 몇 차례 퍼거슨 감독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역습을 전개했다.
“맞아. 내가 말했지. 나중에는 네가 나를 뚫었었다는 자랑을 하고 다니게 될 거라고.”
“입은 살았지. 지난번 경기에서 어땠는지 잊어버린 것 같은데?”
오늘 경기를 통해 성배는 자신감을 얻었다.
호날두가 마지막으로 부진했던 시즌이었지만, 어쨌든 자신의 수비가 호날두에게도 통한 것이었다.
호날두에게 통했다면, 다른 선수들에게도 통하는 것이었다.
“입은 산 건지, 아니면 입도 산 건지는 다음에 붙어보면 알겠지.”
“뭐, 그건 그렇지. 그럼 다음에 보자고.”
성배와 호날두는 다시 한 번 유니폼을 교환했다.
서로의 집에 서로의 유니폼이 시즌별로 보관되어 있었다.
시즌별로 모든 유니폼을 수집할 기세였다.
***
“치열한 6위 싸움을 벌이고 있는 두 팀의 경기답게 굉장히 재미있는, 수준 높은 공방전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비록 아쉽게 무승부로 끝나긴 했지만, 올드 트래포드에서 맨유를 상대로 무승부를 기록했다는 것은 나쁘지 않은 성과였다.
이번 시즌 맨유와의 상대 전적은 리그에서 두 번, FA컵과 칼링컵에서 각각 한 번씩 총 네 번을 만나 무승부로 기록된 승부차기 패배 포함 3무 1패였다.
좋은 성과였고, 선수단의 사기 또한 올랐다.
기세를 몰아 35라운드 웨스트 브롬과의 경기에서 승리를 거둔 토트넘은 구디슨 파크로 날아가 에버튼을 상대했다.
“35라운드까지 두 팀의 승점은 56점으로 동률을 이루고 있고, 그나마 골 득실에서 에버튼이 한 골 앞서며 6위에 올라 있거든요? 오늘 맞대결 결과가 6위 싸움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이네요.”
후반기부터 분위기를 끌어올린 토트넘은 무섭게 승점을 쌓아왔다.
그리고 지난 라운드에 드디어 에버튼과 승점 차이를 없애는 데 성공했다.
공격진의 득점력이 시원치 않고, 수비력이 뛰어나다는 것도 공통점이었다.
“두 팀 모두 수비력이 강하고 공격력이 비교적 빈약하다 보니 경기 자체도 그렇게 흘러가네요. 서로 상대의 수비를 뚫지 못하고 있어요.”
두 팀의 공방전은 주로 중원에서 이루어졌다.
EPL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하워드 골키퍼와 요보-레스콧의 떡대 센터백 듀오, 동생 네빌과 베인스의 양쪽 풀백을 앞세운 에버튼의 수비진은 굉장히 단단했다.
그러나 성배와 우드게이트, 킹, 촐루카까지 베스트 멤버가 출동한 토트넘의 수비력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양 팀 모두 수비진에 비해 공격력이 약해서 볼이 계속 중원에서만 돌았다.
“데포, 자기엘카에게 볼 빼앗깁니다! 자기엘카, 전방으로. 펠라이니에게 연결됩니다.”
비록 돈이 없는 클럽으로 유명하지만, 데이비드 모예스 감독의 수완 덕분에 에버튼은 나름 강한 전력을 유지해왔다.
지금 에버튼의 스쿼드도 돈이 없는 클럽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비록 공격진에는 문제가 많았지만, 케이힐, 자기엘카, 펠라이니, 피에나르, 고슬링에 유망주 로드웰이 버티는 미드필드진도 상당했다.
“펠라이니, 오른쪽의 고슬링에게!”
댄 고슬링은 분명 나쁘지 않은 선수였다.
하지만 호날두와 여러 번 맞붙으면서 한 단계 더 성장한 성배를 상대하기엔 무리였다.
“주가 태클로 저지합니다! 흐른 볼이 제나스에게! 제나스, 반대편 측면으로! 레넌에게 이어집니다!”
두 팀의 대결은 계속 이런 양상이었다.
볼이 최전방으로 투입되는 경우는 극히 적었다.
“모드리치의 슈팅! 하워드! 하워드가 날았습니다! 팀 하워드 골키퍼의 멋진 선방!”
전방으로 볼을 투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니 양 팀 모두 중거리 슈팅을 적극적으로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양 팀 골문을 지키는 하워드와 고메스의 선방 능력 역시 뛰어나기 때문에 득점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특히 맨유에서 탈출한 이후 극적으로 반등에 성공한 하워드의 선방 행진이 놀라웠다.
“토트넘이 코너킥 찬스를 맞이합니다. 주가 올라가고, 주와 함께 우드게이트, 킹, 허들스톤도 에버튼 진영으로 넘어갑니다.”
공격진의 활약이 미미하다면 결국 세트피스를 노려야 했다.
토트넘의 세트피스 공격력은 상당한 수준이기에 득점을 기대해봐도 좋았다.
물론, 떡대 수비수들과 자기엘카, 펠라이니를 앞세운 에버튼의 세트피스 수비력은 리그 최강이었다.
‘음... 우리 선수들이 이렇게 작았던가.’
신장은 둘째 치고 떡대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레스콧과 요보, 펠라이니는 말할 것도 없고, 센터백으로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자기엘카나 188cm의 장신 로드웰의 덩치도 상당했다.
우드게이트, 킹, 허들스톤의 삼각 편대가 이리 작아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꼭 정면 대결만 고집할 필요는 없으니까.’
성배의 손짓에 따라 동료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순식간에 완전히 다른 포지션으로 바뀌었고, 이를 따라가느라 에버튼 수비진의 대열이 흔들렸다.
“측면에서 코너킥 올라옵니다! 살짝 짧습니다!”
그리고 성배는 에버튼 수비진의 대열이 정돈되기 전에 빠르게 코너킥을 올렸다.
살짝 짧은 감이 있었지만, 의도한 대로였다.
“킹, 잘라 들어오면서 헤더! 하워드! 하워드가 또 막아냅니다! 엄청난 선방!”
킹이 가까운 쪽 포스트로 잘라 들어오는 것을 가정한 코너킥이었다.
약속된 코너킥 전술이었고, 성배의 킥도, 킹의 움직임과 마지막 슈팅도 완벽했다.
하지만 하워드의 선방 역시 완벽했다.
‘허, 이걸 막네.’
킹이 머리로 볼의 진로를 바꾼 순간, 성배는 득점을 확신했다.
하지만 다음 장면에서 하워드의 손끝이 볼을 바깥으로 걷어냈다.
감정 표현에 인색한 성배가 아쉬움에 땅을 걷어찰 정도로 엄청난 선방이었다.
“토트넘, 다시 한 번 코너킥을 얻어냅니다.”
“그런데 코너킥을 한 번 더 얻어낸다고 하더라도 하워드가 지키는 골문을 뚫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정말 엄청난 선방 퍼레이드를 보여주고 있거든요?”
하워드의 존재감이 굉장했다.
혼자서 골대를 꽉 채우는 하워드의 존재감에 성배마저도 살짝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
“결국 0-0으로 마무리됩니다. 6위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맞부딪힌 토트넘과 에버튼, 치열하고 수준 높은 중원 공방전 끝에 사이좋게 승점 1점씩 가져갑니다.”
“골이 터지지 않으면 경기 전체가 지루한 경우가 많은데, 오늘 경기는 골이 터지지 않아도 재미있는 경기를 펼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경기였죠?”
양 팀은 마지막까지 골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비록 골은 터지지 않았지만, 리그 6위와 7위의 대결에 어울리는 멋진 경기력으로 팬들을 만족시켰다.
“승점에서 여전히 동률을 이룬 두 팀입니다. 하지만 오늘 패배한 아스톤빌라가 승점 57점에 머물러 골 득실에서 밀리며 7위로 떨어졌고, 각각 한 계단씩 올랐습니다. 에버튼은 9위 웨스트햄과의 홈 경기, 8위 풀럼과의 원정 경기를 남겨놓았고, 토트넘은 10위 맨체스터 시티와의 홈 경기, 2위 리버풀과의 원정 경기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아스톤빌라는 19위 미들스브로와 18위 뉴캐슬과 만나는 일정이네요. 세 팀 중에는 가장 편한 일정이죠? 그리고 에버튼과 토트넘 중에는 에버튼이 조금 더 낫네요. 토트넘 입장에서는 리버풀과의 경기가 부담스럽겠어요.”
리버풀과의 경기를 남겨놓은 토트넘은 오늘 경기에서 승점 차이를 벌렸어야 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서 마지막 경기의 부담감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놈의 머리는 이제 완전히 자리 잡은 건가.”
“그럼. 어때? 멋있지 않아?”
경기 종료 후, 성배는 펠라이니와 대화를 나누었다.
에버튼에 합류한 펠라이니는 초반 17경기에서 10장의 카드를 수집하며 모예스 감독의 골머리를 썩이게 하는가 싶었지만, 곧 적응에 성공, 에버튼에 없어서는 안 될 선수로 자리 잡았다.
특히 특유의 제공권을 활용한 공격력을 활용해 수비적인 미드필더에서 공격과 수비 모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로 전향한 것이 큰 효과를 보았다.
이번 시즌 여덟 골이나 득점하며 케이힐과 함께 팀 내 최다 골을 기록하고 있기까지 했다.
“멋있기는. 확 밀어버리고 싶은 걸 참는 중이다.”
“아오, 그것만은 좀 참아줘. 이 머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오늘 못 봤어? 관중석에 이 가발 쓰고 온 팬들도 엄청 많아.”
그리고 뛰어난 활약 이외에 다른 부분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었다.
바로 크고 아름다운 헤어스타일이 그것이었다.
최소한 10cm는 더 커 보일 정도로 높이 띄운 아프로 스타일은 펠라이니를 상징하는 특징이 되었다.
“머리 참 빨리 자란다. 적어도 헤딩할 때 아프진 않아서 좋겠네.”
“하하하, 그럼! 어때? 너도 한 번 해봐. 나름 편하다니까?”
벨기에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곱슬머리를 길러 짧은 단발로 하고 다녔는데, 잉글랜드로 넘어온 뒤부터 머리를 기르기 시작해 어느새 폭탄 머리가 되어 있었다.
경기를 뛸 때 거슬리지 않게 적당히 짧고 깔끔한 머리를 선호하는 성배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뭐, 어쨌건 요즘 분위기 좋아 보여서 다행이다.”
“주도 요즘 잘 나가잖아? 뱅상도 잘 나가고, 토마스나 얀이나 다들 잘 나가는데, 뭐. 우리도 이번 월드컵은 나가야지 않겠어?”
이번 시즌, 벨기에 국가대표팀의 핵심 선수들은 대부분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각자 속한 리그에서 정상급으로 발돋움했다.
벨기에 축구 팬들은 이런 선수들의 활약을 지켜보면서 월드컵 진출에 대한 기대감을 키웠다.
“글쎄. 보스니아한테 두 번이나 진 게 너무 치명적이라.”
하지만 선수들의 활약이나 그런 기대감과는 별개로 현 상황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2승 1무 3패의 벨기에는 스페인, 터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이어 4위에 위치했다.
최소한 2위까지는 올라가야 플레이오프를 통해서라도 월드컵 진출을 노려볼 수 있는 상황인데, 그렇게 쉬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열심히 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네 경기 남았는데,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그래. 남은 네 경기에서 전부 다 이길 수만 있다면 간단하겠지. 쉽네, 쉬워.”
“왜 이렇게 부정적이야! 한 번 해보자? 응? 네가 에이스인데 이렇게 부정적이면 안 되지!”
글쎄.
남은 네 경기에 스페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 낭만필드 - 17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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