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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사라진 필드-178화 (132/356)

< 낭만필드 - 178 >

흔들리던 맨유는 후반전 들어 안정을 찾았다.

우선 박인진의 역할이 컸다.

양옆에서 뻥뻥 뚫리던 맨유의 수비를 안정시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박인진 특유의 활발한 수비가담과 엄청난 활동량은 맨유의 수비가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더 있었다.

확인된 것은 아니었지만, 심증은 확실했다.

“맨유 선수들, 하프 타임 때 퍼거슨 경에게 한 소리 들었나 봅니다. 움직임이 빠릿빠릿해졌습니다.”

“퍼거슨 경의 헤어드라이어는 유명하죠. 아무래도 전반전에 그런 경기를 펼쳤으니 헤어드라이어를 피할 순 없었겠죠.”

바로 퍼거슨 감독의 헤어드라이어 역시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추측일 뿐, 아무런 증거도 없지만, 경기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떠올렸을 정도로 퍼거슨 감독과 맨유가 가지고 있는 전가의 보도였다.

“레넌이 볼을 잡았습니다. 레넌, 에브라와 대치합니다. 뒤에서 박! 박이 뒤에서 달려와 볼 빼냅니다! 중앙의 캐릭에게! 캐릭, 오른쪽으로 크게 벌려줍니다! 맨유의 역습!”

박인진의 교체 투입된 뒤, 레넌이 가장 고생하는 중이었다.

에브라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는데, 나니와 달리 수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박인진까지 가세하니 도저히 버틸 재간이 없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최고라 손꼽히는 스피드를 가지고 있지만, 테크닉적으로 세련되지 못한 레넌으로서는 이 상황을 타개할 이렇다 할 무기가 없었다.

“캐릭의 패스가 호날두에게! 호날두, 주를 앞에 두고 타이밍을 노립니다!”

그리고 호날두에게 볼이 연결되었다.

아직까지는 성배를 상대로 마땅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호날두였다.

계속된 성배의 거친 플레이에 몸을 사리는 것도 있었다.

모든 선수에게는 몸이 가장 큰 재산이었다.

호날두 정도 되면 부상을 한 번 당했을 때의 손실이 수억에서 수십억에 달했다.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호날두, 중앙의 플레처에게 돌려줍니다. 일단 숨을 고르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그리고 다른 동료들이 있고, 그들을 믿기에 사리는 것이기도 했다.

자신이 팀의 에이스이긴 하지만, 다른 동료들의 기량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리그 최고였다.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너무 사리는 거 아냐? 천하의 호날두가.”

“뭐, 한 번 다치면 그 피해가 어마어마해서 말이지. 팀의 입장에서도 이게 더 좋을걸?”

경기 초반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호날두를 도발해봤지만, 역시나 넘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넘어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 타이밍에 나도 좀 쉬어야겠어.’

겉으로는 호날두를 훌륭하게 잘 막아내고 있었지만, 성배도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호날두의 화려한 드리블과 빠른 돌파를 따라가기 위해 매 순간 무리해서 움직여야 했던 것이었다.

“플레처, 왼쪽으로 이어줍니다! 박인진!”

박인진은 어느새 수비 진영에서 공격 진영까지 올라와 있었다.

사실 개인 전술만 따지자면 나니가 박인진보다 한 수 위라고 봐도 무방했다.

나니의 개인기와 드리블 등은 박인진보다 나았다.

다만, 박인진은 개인전술 ‘만’ 가지고 있는 나니와 달리 세계 최고 수준의 팀 플레이어였고, 맨유라는 팀의 전술 안에서 나니보다 훨씬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다.

맨유 미드필더 중 이번 시즌 리그에서 호날두, 긱스, 플레처, 캐릭에 이어 다섯 번째로 많은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박인진에게서 에브라에게! 에브라, 타이밍을 보다가 전방으로! 박인진이 침투합니다!”

개인 전술 면에서 부족한 점은 분명 있었지만, 공간을 활용하는 능력만큼은 리그 최고 수준인 박인진이었다.

이번에도 에브라와의 팀플레이로 촐루카를 가볍게 벗겨내고 돌파를 시도했다.

“박인진, 중앙으로 빠른 크로스! 캐릭! 아! 넘어집니다!”

박인진의 돌파에 이은 크로스가 중앙으로 낮고 빠르게, 날카롭게 연결되었다.

평소 크로스에 약점이 있는 박인진이지만, 이번 크로스만큼은 완벽했다.

토트넘 수비수들을 모두 뚫어내며 중앙으로 연결되었고, 2선에서 침투한 캐릭은 토트넘 수비수들의 이목을 속이고 고메스 골키퍼와 1대1 찬스를 잡았다.

“고메스 골키퍼에게 경고가 주어집니다! 페널티킥! 페널티킥입니다!”

그리고 한 번의 터치로 고메스 골키퍼를 따돌린 캐릭은 파울까지 유도하며 페널티킥을 얻어냈다.

볼이 옆으로 지나가면서 당황한 고메스 골키퍼의 팔이 캐릭의 발을 건 것이었다.

“와우. 역시 꼭 내가 다 해야 하는 건 아니라니까. 이렇게 나한테 기회를 만들어주잖아.”

성배의 옆에서 호날두가 얄밉게 웃었다.

맨유의 페널티킥 키커는 호날두였다.

“제길. 운도 지지리도 없네.”

성배도 혀를 차며 인정했다.

자신이 호날두를 오랜만에 잘 막아내고 있었는데, 페널티킥을 허용하면서 그에게 득점 기회가 생기고 말았다.

“토트넘 선수들에게 둘러싸였지만 단호하게 대처하는 하워드 웹 주심입니다. 침착하게 선수들을 설득하며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웹 주심이 유독 맨유 경기에서만 자주 논란거리를 만들어내는 것은 맞지만, 이번 판정은 정확했어요. 고메스의 팔이 캐릭의 발을 확실히 건드린 모습이죠.”

하워드 웹 주심은 맨유 팬들에게는 승리의 보증수표였고, 상대 팀 팬들에게는 저승사자와 같은 심판이었다.

맨유 팬 논란이 있을 정도로 맨유에게 유리한 판정을 내리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하워드 웹 주심이 경기를 진행할 때, 맨유는 빅4의 그 어떤 클럽에게도 단 한 번의 패배조차 당하지 않았다.

“다시 제 궤도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슬슬 토트넘 선수들이 박스 바깥으로 움직이고, 호날두가 볼을 들고 박스 안으로 들어섭니다.”

그렇지만 의외로 웹 주심은 선수들에게 평판이 좋았다.

능력만 봐도 맨유 경기만 아니라면 세계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뛰어난 주심이었다.

선수들에게 강압적으로 대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설득하는 등 장점도 많았다.

“맨유의 페널티킥 키커로는 역시나 호날두가 나섭니다.”

호날두는 캐릭이 얻어낸 페널티킥을 가볍게 성공시키며 만회 골을 터뜨렸다.

호날두의 득점으로 2-1의 한 골 차 경기가 되었고, 이에 따라 올드 트래포드의 분위기도 뜨거워졌다.

***

1-0과 2-1의 차이는 컸다.

리드를 잡고 있는 팀이 가장 큰 불안감을 느끼는 스코어라고까지 불리는 2-1의 스코어였다.

반대로 쫓아가는 팀이 가장 분위기를 끌어올릴 수 있는 스코어이기도 했다.

그 위명에 걸맞게 맨유는 조금씩 분위기를 끌어올려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섰고, 토트넘은 그런 맨유의 파상공세를 막아내기 위해 움츠러들었다.

“스콜스, 중거리 슈팅! 크로스바를 강하게 때리고 멀리 튀어나옵니다! 루니, 뒤쪽의 캐릭에게 돌려줍니다.”

맨유의 파상공세가 그칠 줄을 몰랐다.

박인진 한 명의 투입이 경기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버렸다.

극단적인 공격 성향을 가진 호날두의 파트너로 박인진이 중용되는 이유를 보여주는 경기였다.

혼자서 토트넘의 측면 공격을 무디게 만들고 약점인 포백 앞 공간에까지 도움을 주면서 맨유의 약점을 보완해주는 박인진의 플레이가 경기 분위기를 맨유 쪽으로 가져다주었다.

“캐릭, 오른쪽의 호날두에게 볼 투입! 주가 다시 그 앞을 가로막습니다.”

“호날두도 이제 하나 정도는 해줘야죠. 오늘 경기 내내 주에게 틀어막혀서 이렇다 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어요. 에이스라면 지금과 같은 중요한 상황에 뭐라도 해줘야 하거든요?”

맨유가 경기 분위기를 잡아나가는 동안에도 호날두는 이렇다 할 위협적인 장면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성배의 수비가 단단하기도 했고, 호날두 자신이 살짝 몸을 사린 이유도 있었다.

어쨌든 경기 분위기가 좋아지는 상황에서 에이스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왼발에서 오른발로 옮기고, 계속되는 헛다리!”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해볼 생각인 듯했다.

왼발 발바닥으로 볼을 잡은 호날두는 반대편으로 빠르게 굴렸다가 다시 오른발 발바닥으로 멈춰세웠다.

그리고 계속된 헛다리 페인트로 성배의 중심을 무너뜨리려 시도했다.

‘아오, 정신없어.’

그걸 지켜보는 성배가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빠른 발놀림이었다.

그래도 성배 역시 그런 현란한 움직임 속에서도 진짜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중앙으로 올라가는 호날두, 다시 멈춰놓고, 다시 움직입니다!”

제대로 마음 먹은 듯 호날두의 움직임이 다시 현란해졌다.

중앙으로 이동하는 듯하더니 다시 볼을 멈춰 세웠고, 성배가 따라서 멈추자 다시 출발했다.

빠르게 움직이다가 멈추고, 다시 움직이고를 반복하는 호날두의 움직임에 수동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성배의 반응이 조금씩 느렸다.

‘또 백숏인가.’

호날두의 오른발이 볼보다 앞으로 나왔다.

호날두가 가장 즐겨 사용하는 개인기, 백숏의 예비 동작이었다.

하도 많이 당해서 지긋지긋할 정도였기에, 성배는 속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뒷발로 패스! 하파엘, 빠르게 올라갑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개인기가 아니었다.

호날두는 백숏 자세에서 볼을 조금 더 강하게 때려 오버래핑해 올라온 하파엘에게 연결했다.

돌파라고 생각했던 성배의 반응이 한 박자 느린 것은 당연했다.

‘빌어먹을. 거기서 패스를!’

호날두가 세계 최고의 유망주라는 평가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로 올라선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전과 달리 개인 전술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을 적재적소에 이용할 수 있는 시야가 생긴 것이었다.

전형적인 브라질리언 풀백 하파엘의 스피드와 공격력만큼은 높은 평가를 받았고, 이를 무시할 수 없었던 성배도 반 박자 정도 늦었지만, 최선을 다해 따라붙었다.

“주의 태클, 하파엘, 뒤로 빼줍니다!”

‘망했다.’

열심히 하파엘의 뒤를 따라간 성배는 크로스를 막기 위해 크로스 타이밍에 맞춰 몸을 날렸다.

하지만 하파엘은 크로스를 시도하지 않았다.

크로스 할 것처럼 다리를 들어 올렸다가 땅을 먼저 찍으며 볼을 띄웠다.

슬라이딩한 성배의 몸 위로 볼이 통과했고, 그 볼은 페널티박스 바로 바깥에 자리 잡고 있던 호날두에게 연결되었다.

“호날두의 얼리 크로스!”

그리고 호날두는 지체하지 않고 박스 안쪽으로 볼을 투입해주었다.

호날두의 얼리 크로스가 토트넘 수비진과 고메스 골키퍼의 사이로 파고 들었다.

그리고 루니, 베르바토프, 박인진이 달려 들었다.

“일제히 몸을 날립니다! 루니이이!! 골! 골입니다! 루니의 골! 맨유의 두 번째 골! 2-2, 경기를 원점으로 돌리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많은 선수들이 동시에 몸을 날렸지만, 볼을 따낸 것은 맨유의 웨인 루니였다.

루니의 발에 닿은 볼은 몸을 날린 고메즈의 겨드랑이 밑으로 빠졌고, 데굴데굴 굴러서 골라인을 통과했다.

웨인 루니의 시즌 11호 골이자 이번 경기를 원점으로 돌려놓은 골이었다.

“맨유의 저력이 대단합니다! 결국, 동점을 만들어내네요! 경기 종료까지 20여 분 정도 남아있는 상황인데, 연속 두 골을 득점한 맨유가 이젠 확실히 유리해졌어요!”

이제 분위기는 맨유 쪽으로 확실히 돌아섰다.

올드 트래포드에서 맨유를 상대로 승점 3점을 따낼 거란 희망에 젖어있었던 토트넘은 이제 승점 1점이라도 따내기 위해 힘을 쏟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참, 나. 겨우 한 번 놓쳤을 뿐인데 그게 바로 실점이라니.’

성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70분 동안 호날두를 꽁꽁 틀어막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는데, 단 한 번 수비에 실패한 것 때문에 실점을 허용하고 말았다.

70분 동안 거의 처음으로 돌파당한 것 같은데 호날두의 오늘 성적은 1골 1어시스트.

그야말로 골과 공무원을 합친 골무원이라는 별명이 어울리는 선수였다.

‘아, 억울하다.’

자신이 오늘 보여준 플레이와 수비는 완벽했다.

호날두를 이보다 더 완벽하게 막아낼 수 있는 선수는 몇 안 될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은 호날두 봉쇄에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경기도 동점이 되어서 팀의 승리를 이끌어내기도 힘든 상황이고, 호날두는 맨유의 두 골에 모두 관여했다.

‘이런 게 세계 최고 재능의 특별함인가.’

선수가 가지고 있는 특별함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이런저런 방법들을 모두 동원하면 기량적인 부분을 따라갈 수는 있겠지만, 저런 특별함은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하아, 정말 여러 방법으로 날 골탕먹이는구나.’

결과론적으로는 호날두의 승리지만, 지금까지의 경기 내용만 본다면 자신의 판정승이라 평가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공격 포인트를 제외하면 호날두가 경기에 끼친 영향이 작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왠지 패배한 기분이었다.

< 낭만필드 - 178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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