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177화 (131/356)

< 낭만필드 - 177 >

“호날두와 주의 대치가 계속 이루어집니다! 호날두, 주를 등지고 타이밍을 노립니다!”

데자뷰였다.

성배가 아약스 소속이었고, 호날두가 유망주에 불과하던 시절, 챔피언스리그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 모습이 재현되었다.

달라진 점은 맨유가 호날두에게 볼을 몰아주는 이유가 유망주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가 아니라 에이스에 대한 신뢰라는 것밖에 없었다.

‘한 번 끝까지 가보자고.’

성배는 자신을 등진 채 버티고 있는 호날두의 왼발 뒤꿈치를 교묘하게, 하지만 사정없이 밟았다.

왼발을 뒤로 빼고 오른발로 볼을 컨트롤하며 버텨야 하는 호날두였기에 발을 뺄 수도 없었다.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볼을 빼앗기는 힘들었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신나게 뒤꿈치를 밟아주었다.

‘계속 이러다 보면 스피드가 죽겠지.’

성배가 오늘 경기에서 노리는 건 하나였다.

호날두의 스피드를 죽이는 것만 노리고 있었다.

경기 초반부터 거친 플레이로 호날두를 계속 넘어뜨리는 것이나 발목을 노리는 것, 뒤꿈치를 밟는 것까지 모두 스피드를 죽이기 위한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불편해지면 결국 스피드는 떨어지게 되어있어.’

그렇다고 부상을 입힐 생각은 없었다.

그건 선수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소양이었다.

과하게 거칠지는 않았기에 호날두가 입는 피해는 크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몸은 생각보다 예민했고, 지금 정도의 플레이로도 약간의 불편함 정도는 충분히 느끼게 해 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약간의 불편함으로 아주 미세하게나마 스피드가 떨어지면 속도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호날두, 결국 주를 떨쳐내지 못하고 볼을 돌립니다.”

발로는 뒤꿈치를 계속 밟아주고 손은 앞으로 돌려서 상의 유니폼을 잡아당기는 성배 때문에 호날두는 결국 돌아서지 못했다.

짜증은 나지만, 위협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했던 성배의 견제도 쌓이니까 부담이 되었다.

“뭐야, 오늘 왜 이래? 왜 이렇게 질척거려?”

호날두는 성배에게 짜증 섞인 반응을 보였다.

지난 칼링컵 결승전 중간부터 갑자기 달라진 성배의 플레이는 호날두에게 부담이 되고 있었다.

“지난번에 보니까 거칠게 하면 좀 부담스러워하더라고. 이렇게라도 막아야지, 어쩌겠어. 네가 이해해라.”

호날두가 짜증을 내비친 순간, 성배는 속으로 웃었다.

원하던 반응이었다.

다혈질인 호날두가 짜증을 내기 시작하면 경기가 잘 풀린다는 뜻이었다.

***

“팔라시오스, 전방으로 볼 투입! 모드리치에게 연결됩니다!”

토트넘 선수들은 레드냅 감독의 지시에 충실했다.

데포와 킨, 모드리치가 번갈아가며 포백과 미드필더의 중간 위치를 헤집고 다녔다.

캐릭과 플레처는 포백을 보호하고 공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모드리치가 왼쪽의 베일에게!”

포백 바로 앞 공간에서 모드리치가 볼을 잡았고, 그런 모드리치의 양 옆으로 킨과 데포가 침투했다.

맨유 수비진이 중앙으로 모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맨유 수비라인의 폭이 좁아지자, 모드리치는 측면으로 볼을 벌렸다.

‘내가 올라갈 타이밍이네.’

그리고 성배도 출발했다.

베일이 볼을 잡은 순간, 맨유의 라이트백 하파엘은 베일에게 붙었다.

베일은 사이드 라인보다 위쪽, 페널티박스 시작 부근 정도에 있었기에 사이드 라인은 텅 비어 있었다.

“베일, 아래쪽으로 내줍니다! 주의 오버래핑!”

볼을 넘겨받은 성배를 텅 빈 공간이 반겨주었다.

완벽한 타이밍의 오버래핑이었다.

베일을 따라갔던 하파엘이 급히 달려왔지만, 성배의 간결한 킥 동작이면 하파엘이 도착할 때까지 크로스 두 번은 날릴 수 있었다.

“중앙으로 빠르게 크로스!”

예상대로 하파엘이 도착하기 훨씬 전에 성배의 크로스가 중앙으로 투입되었다.

벤트와 킨, 두 명의 단신 공격수를 세운 토트넘이었기에 성배의 크로스는 낮고 빠르게 올라갔다.

골키퍼와 수비수의 사이 공간을 향한 크로스에 맨유 선수들이 이리저리 뒤엉켰다.

“벤트! 벤트-으!!”

벤트가 빠른 스피드를 활용해 맨유 수비수들 사이로 튀어나왔다.

벤트의 움직임에 반 데 사르 골키퍼도 앞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건 닿겠다.’

옆에서 지켜보던 성배는 벤트가 먼저 볼을 따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물론, 반 데 사르가 워낙에 대단한 골키퍼이기에 그 정도 각도라면 막아낼 확률도 높았다.

“벤트가 먼저! 슈--웃, 골! 골입니다! 들어갔습니다! 토트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올드 트래포드에서 선취 골을 터뜨립니다!”

먼저 발을 가져다 대긴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반 데 사르가 무섭게 뛰쳐나왔기 때문에 섬세한 조절은 불가능했고, 발을 가져다 댄 것에 만족했다.

하지만 운이 좋게도 벤트의 발에 닿은 볼은 반 데 사르의 옆구리 높이, 손을 내려 막기도 힘들고 다리를 들어 막기도 힘들어 골키퍼가 가장 막기 힘들다는 그 높이로 통과했다.

반 데 사르의 옆을 스치며 날아간 볼은 그라운드에 천천히 세 번을 튕긴 뒤, 골망을 흔들었다.

“예상을 깨고 토트넘이 선취 골을 기록하네요! 맨유가 우세할 거라는 예상들 속에서도 최근 맨유의 불안한 경기력과 토트넘의 뛰어난 경기력이 변수라는 평가였는데요! 토트넘이 리드를 잡았어요!”

어느새 12호 골을 기록한 벤트였다.

열두 골은 이번 시즌 토트넘 선수들 중 최다 골 기록이었다.

중간에 합류한 데포와 킨의 이전 소속팀 득점 기록까지 더해도 벤트가 최다 골이었다.

시즌 초반에는 라모스 감독의 구상에 들지 못하면서 백업 멤버로 활약하고도 팀 내 최다 골을 기록했던 벤트는 레드냅 감독 부임 이후에도 딱히 주전 자리를 보장받지 못했지만, 여전히 팀 내 최다 골을 기록하고 있었다.

“토트넘이 선취골을 기록하며 한발 앞서 나갑니다. 힘들게 얻어낸 7위 자리를 지키기 위한 토트넘의 집념이 무섭습니다!”

“사실 토트넘도 7위 자리는 거의 확정이죠. 칼링컵 우승팀 맨유가 챔피언스리그 출전 티켓을 확보했고, 6위 에버튼도 FA컵 결승에 올라 챔피언스리그 진출이 확정된 첼시와 만나게 되면서 UEFA컵 출전권을 확보했어요. 즉, 7위 자리를 지키기만 한다면 토트넘에게까지 UEFA컵 출전권이 돌아오는 상황입니다.”

오늘 경기가 끝나면 시즌 종료까지 네 경기가 남는 상황이었다.

맨유는 2위 리버풀에 승점 6점을 앞서 있었고, 토트넘 역시 8위 웨스트햄에 승점 7점 차이로 앞서 있었다.

두 팀 모두 어느 정도는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절박함이 조금 덜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나마 따지자면 7위로 시즌을 마칠 경우 UEFA컵 3차 예선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6위까지 올라가면 플레이오프부터 시작할 수 있는 토트넘의 동기가 조금은 더 확실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마침 에버튼과 겨우 승점 1점 차이에 불과하거든요? 바로 그 이유가 선취 골이라는 결과로 나온 걸지도 모르겠네요.”

시즌 초반의 엄청난 부진이 아쉬울 정도로 토트넘의 후반기 기세는 훌륭했다.

초반 부진만 아니었다면 토트넘이 간절히 바라던 챔피언스리그 출전권을 확보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페이스였다.

이래저래 참 안 풀리는 토트넘이었다.

***

“팔라시오스, 왼쪽의 주에게 연결합니다.”

선취 골 이후, 토트넘은 기세를 올렸다.

맨유의 킥오프로 재개되었는데 딱 1분 30초 뒤, 토트넘이 볼의 소유권을 빼앗아왔다.

볼 소유권을 따낸 팔라시오스는 왼쪽에서 올라가는 성배에게 볼을 넘겨주었다.

‘확실히 미드필더들의 압박이 약해.’

상대 진영에서 보여주는 동료들의 움직임이 좋았다.

캐릭과 플레처의 장악력이 뛰어나지 못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들뿐 아니라 오른쪽의 호날두와 왼쪽의 나니도 수비가담 안 하기로 유명한 선수들이었다.

토트넘 선수들의 움직임이 자유로웠다.

“주, 빠르게 몰고 들어갑니다. 앞을 막는 선수가 없습니다.”

덕분에 성배도 마음 편히 볼을 몰고 상대 진영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호날두가 수비에 가담하지 않아서 캐릭이 밑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고, 안 그래도 두텁지 못했던 중앙 압박은 더욱 헐거워졌다.

‘그래, 그거지.’

캐릭이 자신에게 내려오는 순간, 성배의 눈에 패스 루트가 생겨났다.

최대한 캐릭을 끌어들인 성배는 빠른 패스로 전방의 동료에게 연결해주었다.

“모드리치에게 연결! 모드리치, 바로 오른쪽으로 벌려줍니다!”

성배의 패스는 모드리치에게 연결되었고, 모드리치는 곧바로 오른쪽의 레넌에게 볼을 밀어주었다.

레넌은 스피드를 살려 돌파해 들어갔고, 모드리치는 패스 직후 바로 박스 안으로 침투했다.

“스피드를 살린 레넌의 돌파! 그리고 크로스!!”

오늘 에브라의 벽에 막혀서 반대편의 베일에 비해 활약상이 저조한 레넌이었지만, 지금은 레넌의 스피드를 십분 발휘할 수 있을 조건이 충족된 상황이었다.

에브라가 따라붙기도 전에 돌파에 성공한 레넌은 중앙으로 날카로운 크로스까지 올려주며 주어진 역할을 다했다.

“반대편으로 길게 넘어갑니다! 수비수들 머리 넘기고, 반대편에서 베일!”

살짝 부정확한 크로스는 높게 떠서 날아왔다.

장신에 헤딩 머신인 비디치, 퍼디난드의 머리 위를 넘긴 크로스는 반대편으로 향했고, 베일이 왼발 발리 슈팅으로 연결했다.

“골!! 골!! 골!! 두 번째 골! 가레스 베일!! 선취 골 이후 3분 만에 추가 골을 터뜨리는 토트넘! 무섭게 몰아칩니다!! 2-0! 올드 트래포드에서 토트넘이 신을 내고 있습니다!”

베일은 속칭 ‘맞고 뒈져라’ 슛이라 불리는 가까운 거리에서의 강력한 슈팅으로 반 데 사르의 수비를 뚫어냈다.

그물은 거의 찢어질 것처럼 흔들렸다가 돌아오며 볼을 바깥으로 토해냈다.

“맨유가 순식간에 무너지네요! 3분 만에 두 골을 실점한 맨유! 급격히 흔들립니다! 맨유, 심상치 않은데요?”

베일과 레넌, 그리고 주성배를 앞세운 측면 공격의 위력이 장점인 토트넘을 상대로 수비 가담 능력이 떨어지고 수비 가담에 소극적인 호날두, 나니를 출전시킨 것이 실책이었다.

천하의 퍼거슨 감독도 실수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바로 오늘이 그 날이었다.

“맨유의 측면이 너무 쉽게 뚫리고 있네요! 측면이 계속 뚫리니까 중앙에서도 계속 기회를 내주고 있어요. 전술적인 변화가 필요할 것 같네요.”

수비에 구멍이 뚫려도 두 선수의 공격력으로 만회해 상대 측면 윙어들이 공격할 생각도 하지 못하는 상황을 퍼거슨 감독은 머릿속에서 그렸다.

그러나 호날두가 성배에게 꽁꽁 틀어막히고 나니도 촐루카에게 힘도 못 쓰고 제압당한 것은 치명적이었다.

***

[IN - 13. 박인진 / OUT - 17. 루이스 나니]

“맨유에 선수 변화가 있습니다. 나니가 빠지고 박인진이 투입됩니다. 퍼거슨 감독, 후반전 시작과 함께 선수 구성에 변화를 주면서 일찌감치 승부수를 던집니다.”

“측면 윙어들이 수비에 가담해주지 않으면서 계속 수세에 몰리고 있었거든요? 수비 가담 능력과 수비력이 뛰어나고 말도 안 되는 체력을 앞세워 엄청난 활동량을 보여주는 박인진을 투입해 측면 수비를 강화하겠다는 뜻으로 보이죠?”

하프 타임 이후 후반전 시작과 동시에 퍼거슨 감독은 나니를 빼고 박인진을 투입했다.

호날두의 파트너로 가장 이상적이라고 평가되는 선수였다.

공격력이 뛰어나지만, 그로 인해 수비에 잘 가담하지 않는 호날두를 대신해 자신의 위치는 물론 중앙, 심지어 반대쪽 측면까지 오가며 수비에 가담해주기 때문이었다.

“이제 마음대로 안 될 거야.”

“에이, 이미 늦었어요, 형.”

박인진이 성배의 옆을 지나가며 말했다.

박인진의 투입과 동시에 맨유와 토트넘의 후반전 경기가 시작되었다.

< 낭만필드 - 177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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