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낭만이 사라진 필드-176화 (130/356)

< 낭만필드 - 176 >

“칼링컵 우승 트로피까지 넘겨줬는데, 이번에도 지면 안 되겠지. 홈에서도 무승부였으니까 원정에서도 최소한 비기자고.”

호날두에게 이를 가는 성배처럼 토트넘의 모든 관계자들은 맨유에게 이를 갈았다.

지난 시즌에 이어 2년 연속 우승 트로피를 차지할 수 있었던 칼링컵 결승전에서 패배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번 시즌 토트넘이 노릴 수 있는 유일한 우승 트로피가 좌절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최근 경기력이 예전 같지 않아서 그나마 안심했는데, 안타깝게도 조금씩 경기력이 살아나고 있다. 아쉬운 일이지만... 그래도 완벽하진 않겠지.”

이번 시즌 맨유는 모든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챔피언스리그에서도 4강에 진출했고, 칼링컵은 우승, FA컵도 4강까지 진출한 데다가 클럽 월드컵에까지 출전해야 했다.

클럽 월드컵에 출전했던 챔스 우승팀들은 모두 시즌 막판에 체력적인 문제로 경기력 하락을 겪었다.

맨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징글징글한 박인진마저도 지친 모습이 보이는데 다른 선수들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겠지. 체력이다. 우린 리그밖에 없고, 덕분에 체력은 충분할 거라 믿는다. 체력전으로 끌어들이는 게 첫 번째다.”

이걸 호재라고 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토트넘은 리그 일정 외의 다른 모든 일정들이 끝난 상황이었다.

얼마 전까지 세 개 대회를 병행했고, 클럽 월드컵, 칼링컵 등도 끝까지 치렀던 맨유와 비교하면 체력적인 우위를 가져갈 수 있었다.

“퍼거슨 경이 워낙 대단한 사람이라서 적절한 로테이션으로 팀을 다시 살려냈지만, 그래도 파고들 여지는 있다. 일단 지난 시즌과 비교하면 확실히 공격력이 떨어진다.”

선수들의 체력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결점은 있었다.

일단 공격진의 문제.

지난 시즌 31골을 기록하며 맨유의 에이스로 떠오른 호날두지만, 이번 시즌에는 15골에 그쳤다.

지난 시즌과 비교해 반 토막이 나버린 것이었다.

“루니가 뒤에서 열심히 받쳐주지만, 베르바토프는 천벌을 받고 있고, 테베즈도 지난 시즌 같지 않다. 즉, 맨유의 공격은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는 뜻이지.”

물론 지난 시즌보다는 부진해도 여전히 강력한 공격진이었다.

20골 이상을 넣어준 선수가 없고 10골을 넘긴 선수도 호날두와 루니, 두 선수에 불과했지만, 골 맛을 본 선수의 숫자는 무려 15명.

이 숫자가 맨유의 힘이었다.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핵심 공격수들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것은 토트넘에게 웃어주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수비진. 퍼디난드와 비디치로 이루어진 이 통곡의 벽이 심상치 않아. 기록이 깨진 뒤부터 뭔가 나사 하나가 빠진 모습이다.”

반 데 사르와 함께 맨유는 체흐가 가지고 있었던 1025분 무실점 기록을 깨고 역대 최장시간 무실점 기록을 세웠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이 기록이 깨진 뒤가 문제였다.

기록이 깨진 뒤, 모두가 한마음으로 노력해왔던 목표가 사라진 것이었다.

그 이후 맨유는 리버풀전 4실점을 시작으로 풀럼, 아스톤빌라, 선덜랜드, 위건전까지 5경기 연속으로 실점을 허용했다.

리버풀과 풀럼전 연패 이후 다행히 나머지 세 경기는 승리를 기록했지만, 모두 한 골 차이의 아슬아슬한 승리로, 맨유의 위명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토트넘의 허술한 공격진으로도 충분히 공략할 수 있겠는데.’

최근 맨유의 수비진을 보면 그리 강하지 않은 토트넘의 공격진으로도 골을 노릴 수 있어 보였다.

맨유 수비진은 분명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맨유의 단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포백을 보호해줄 미드필더의 부재다.”

맨유의 가장 결정적인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다.

하그리브스가 이탈한 이후, 맨유의 중원에는 포백의 앞에서 그들을 보호해줄 미드필더가 없었다.

캐릭이나 스콜스는 그런 유형의 선수가 아니었고, 안데르손은 비슷한 유형이지만 기량이 부족했다.

플레처는 다재다능한 선수지만, 다재다능할 뿐 특화된 선수가 아니었다.

박인진이 출전하면 특유의 활동량으로 그나마 보완이 가능했지만, 이번 경기에 박인진은 출전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노려야 할 공간이 바로 여기다.”

레드냅 감독은 상황판에 크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포백과 미드필더 사이의 공간이었다.

“내일 우리는 이 공간을 집중적으로 노린다. 맨유의 미드필더들이 헤맬 때, 이 사이 공간을 집중적으로 노려서 수비라인을 무너뜨리고, 득점을 노리는 것이 내일의 핵심 전술이다.”

미드필더와 수비 사이의 공간을 헤집어줄 선수는 토트넘에도 많았다.

베일과 레넌이 중앙 쪽으로의 움직임에 어색함을 보이는 건 아쉬웠지만, 이 역할을 수행할 능력 정도는 있었다.

모드리치나 투톱의 도움도 있을 것이기 때문에 충분한 위력을 보일 수 있었다.

“명심하고 또 명심해라. 포백과 미드필더 사이 공간, 여기서 승부가 결정 난다.”

레드냅 감독이 재차 강조했다.

토트넘이 장점이 측면 공격이고, 맨유는 레프트백 에브라는 최고의 활약을 보이지만, 라이트백이 취약했다.

베일을 활용해 맨유의 오른쪽 측면을 공략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레드냅 감독의 구상도 훌륭했다.

‘왼쪽은 내가 알아서 하면 되겠지.’

그렇다고 해서 맨유의 오른쪽 공략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정도는 자신과 베일, 그리고 자신의 움직임을 보면 바로 눈치채줄 모드리치까지.

세 명이면 충분했다.

***

“또 보네. 요즘 잘 나가더라?”

맨유와의 경기 직전, 호날두는 어디선가 또 나타나서 성배에게 친한 척 말을 걸어왔다.

“뭐. 덕분에.”

실제로 요즘 좋은 플레이가 이어지는 것은 호날두 덕분이었다.

지난 칼링컵 결승전에서 호날두에게 제대로 당한 뒤, 성배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던 벽 하나를 깰 수 있었다.

그 덕에 한 단계 더 발전했고, 좋은 활약이 이어졌다.

“그렇게 말해주면 민망하지만 고맙지. 하하.”

“그래서 오늘 다시 한 번 붙어보려고. 오늘은 지난번과 다를 거다.”

성배가 호날두에게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동안에는 호날두가 도발하는 쪽이었고, 성배는 그 도발에 몸을 낮추고 자신은 택도 없다며 엄살을 부리는 쪽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성배는 오늘 호날두를 한 번 꽁꽁 묶어볼 생각이었다.

“오, 웬일이야? 매일 그렇게 엄살을 부려대더니만.”

“상대가 안 된다는 생각은 여전하지. 다만, 굳이 그걸 겉으로 표현할 필요는 없는 것 같네.”

어차피 엄살을 부려도 넘어가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걸기 위해 억지로라도 자신감을 보이는 쪽이 나은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기대되는데?”

“기대해도 좋아. 지금 이렇게 떠들었던 게 쪽팔리기 싫어서라도 제대로 붙어볼 거니까.”

이렇게까지 떠들어놓고 또 한 번 거하게 털려버리면 쪽팔려서 죽어버리고 싶을 것이었다.

그렇게 되기 싫어서라도 어떻게든 막아내야 했다.

***

“플레처, 오른쪽으로 이어줍니다. 맨유의 에이스, 호날두에게 볼이 투입됩니다.”

경기 초반, 아직은 두 팀 모두 딱히 결정적인 장면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리고 맨유는 결정적인 장면을 만들기 위해 호날두에게 볼을 연결했다.

‘오늘은 절대 네 마음대로 안 돼.’

성배는 호날두를 앞에 두고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 칼링컵 경기가 떠올랐다.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된 경기였지만, 그만큼 씁쓸한 경기였다.

오늘은 절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늘도 진지하군.’

호날두는 오늘도 최선을 다해 성배와 맞붙었다.

안타깝게도 지난 경기에서의 완벽한 승리에도 불구하고 자만하거나 안일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은 안 돼.’

성배를 앞에 두고 호날두는 트레이드마크인 화려한 발놀림으로 간을 보면서 돌파 타이밍을 노렸다.

그 현란한 발놀림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 성배는 집중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호날두, 돌파 시도! 순식간에 가속합니다!”

타이밍을 엿보던 호날두는 성배에게서 빈틈을 발견하지 못했고, 오른쪽 측면에 붙어서 돌파를 시도했다.

성배도 그런 호날두의 옆에 딱 붙어서 몸싸움을 펼쳐주었다.

“백숏! 뒷발로 방향 바꿔 중앙으로!”

호날두의 전매특허 기술인 백숏이 나왔다.

뒷발 인사이드로 볼의 진행방향을 바꾼 호날두는 중앙쪽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호날두의 백숏을 계속해서 경계했던 성배는 이를 놓치지 않았고,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쉽게는 안 되지.’

성배의 계속된 압박에 호날두의 스피드도 떨어져 갔다.

옆에서 계속 몸과 어깨, 팔을 활용해 방해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 번 백숏!”

그러자 호날두는 연달아 백숏을 구사하며 성배의 허를 찌르기 위해 노력했다.

갑자기 진로를 바꿨지만, 자신을 놓치지 않은 성배가 살짝 안심했을 타이밍을 노린 것이었다.

‘이 정도는 예상 범위 안이라고.’

하지만 호날두가 연속적인 개인기로 상대 수비를 제치는 걸 선호한다는 것은 이미 유명했다.

한 번의 방향 전환을 따라잡았음에도 성배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덕분에 두 번째 방향 전환에도 방심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따라 움직일 수 있었다.

‘오늘 멀쩡히 돌아갈 생각은 버려.’

오른쪽 측면을 타고 올라가려는 호날두를 향해 몸을 들이밀었다.

어깨를 앞으로 내민 채, 파울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마음가짐으로 달려든 것이었다.

“호날두, 다시 사이드라인 쪽으로, 아! 주가 몸으로 부딪칩니다! 호날두, 중심을 잃고 옆으로 쓰러집니다!”

마음먹고 부딪친 성배의 상체 태클에 호날두는 버티지 못했다..

갑자기 날아든 태클에 중심을 잃으며 사이드라인을 넘어가 옆으로 쓰러졌고, 성배는 볼을 따낼 수 있었다.

“휘슬 울립니다! 주심, 파울을 선언합니다.”

안타깝게도 파울이 선언되었다.

어깨로 부딪치기는 했지만, 살짝 뒤에서 부딪쳤다는 것이었다.

‘아쉽네.’

호날두가 생각보다 빨라서 자신의 생각보다 좀 더 앞에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어깨로 어깨를 박았으면 파울이 되지 않았을 텐데, 어깨로 어깨 뒤쪽 등판을 박고 말았다.

‘뭐, 상관없나.’

성배는 오늘 호날두에게 열 개 이상의 파울을 하겠다고 마음 먹고 나온 상태였다.

호날두를 상대로 파울도 없이 완벽하게 막아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전혀 하지 않았다.

카드가 나오지 않는 한도 내에서 적극적으로 파울을 이용해 제 기량을 보이지 못하도록 하고 짜증도 돋구면서 빨리 지치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한 번 진탕 굴러보자고.’

성배의 목적은 평소 자신의 플레이 스타일과 어울리지 않는 진흙탕 싸움으로 호날두를 끌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자신도 어울리지 않았지만, 자신보다는 호날두가 더 어울리지 않았다.

화려하고 테크니컬한 플레이로 눈에 띄는 것을 즐기는 호날두에게 진흙탕 싸움이란 무엇인지 가르쳐 줄 생각이었다.

“캐릭, 오른쪽으로 볼 투입! 호날두가 달립니다!”

조금 전까지 왼쪽에서 나니가 볼을 잡고 있었기에 토트넘 수비진은 왼쪽으로 이동해 있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오른쪽에 공간이 날 수밖에 없었다.

맨유는 빠르게 방향을 전환했고, 호날두가 달릴 수 있게 빈공간 쪽으로 볼을 투입했다.

“호날두, 볼을 따라잡기 직전!”

‘그렇게 편히 잡을 순 없지!’

살짝 왼쪽으로 이동했던 성배도 어느새 달려와 있었다.

그리고 호날두를 향해 거친 태클을 시도했다.

“으악!!”

성배의 태클은 볼을 먼저 밀어내고 호날두의 발목을 덮쳤다.

호날두의 발목과 자신의 발등이 부딪히는 순간, 살짝 힘을 줘서 걷어찬 건 덤이었다.

“주의 멋진 태클! 정확히 볼을 먼저 걷어내는 멋지고 정확한 태클로 호날두의 돌파를 막아냅니다!”

성배의 태클에 걷어차인 호날두는 발목을 부여잡고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태클 이후 바로 일어난 성배는 호날두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주며 안부를 물었다.

“괜찮지? 뭐, 이 정도로 너무 아파하면 안 되는데... 오늘 준비한 게 좀 많거든.”

호날두는 성배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러면서 성배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고, 성배 역시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 낭만필드 - 176 > 끝

ⓒ 미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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