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75 (7권) >
벨기에 대표팀의 상황은 암울했지만, 그나마 토트넘의 상황이라도 괜찮은 것이 다행이었다.
토트넘이 리그에서 당한 마지막 패배는 21라운드 위건전이었고, 이후 9경기 7승 2무로 연속 무패 행진을 달렸다.
시즌 초반 8라운드까지 리그 최하위, 10라운드까지 19위에 불과했던 순위도 어느새 7위까지 올라오며 그나마 이름값과 스쿼드에 어울리는 위치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지난 31라운드 블랙번과의 경기에서 패배하며 9경기 연속 무패 행진이 끊겼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토트넘의 경기력은 여전히 훌륭합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의 2연전에서 팀원들의 부진으로 자신의 역할 이상의 것을 해주느라 체력 소진이 심했던 성배는 블랙번전에서 살짝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지구력과 활동량, 경기 내에서의 체력은 훌륭하지만, 내구성이 그리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는 성배였다.
국가대표팀과 클럽팀을 매번 오가고 경기 내에서도 맡은 역할이 많았기에 간혹 경기력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성배뿐만 아니라 모드리치를 비롯한 다른 몇몇 선수들도 부진했고, 결국 9경기 연속 무패 행진이 끊기고 말았다.
“모드리치, 왼쪽에서 치고 올라오는 주에게 패스합니다!”
하지만 그런 부진이 이어지진 않았다.
토트넘의 분위기는 이미 불이 붙어 있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부진이 장기화될 리 없었다.
선수들도 이미 팀 분위기와 함께 텐션이 올라와 있었다.
체력적인 문제는 잠시 왔다 지나갈 뿐이었다.
“주, 무섭게 치고 올라갑니다! 닐이 따라가질 못합니다!”
성배도 오늘은 웨스트햄의 수비진을 신나게 괴롭혔다.
리그를 제외한 모든 일정이 끝난 토트넘은 경기 사이의 휴식 기간이 길었다.
지난 경기에서의 피로는 쉬는 동안 모두 풀렸다.
“크로스가 바깥으로! 모드리치에게 이어집니다!”
성배가 골라인 근처까지 빠르게 돌파하는 동안 웨스트햄 수비진은 박스 안쪽으로 몰려들었다.
크로스의 가공할 정확도와 위력을 감안하면 당연한 움직임이었다.
다만, 그 덕에 상대적으로 박스 바깥에서의 수비가 헐거워진 것이 문제였다.
“모드리치, 그대로 논스톱 슈, 아니, 패스입니다! 로비 킨!”
그래서 성배가 박스 안쪽이 아닌 바깥쪽의 모드리치에게 크로스를 올리자, 웨스트햄 수비는 순식간에 붕괴해버렸다.
박스 안쪽으로 몰려들었던 수비수들이 급하게 바깥쪽으로 다시 돌아 나왔고, 이번에는 박스 안쪽의 스트라이커에 대한 수비가 헐거워졌다.
“그대로 슈팅! 가볍게 집어넣습니다! 리그 9호 골을 기록하는 로비 킨의 득점! 토트넘, 1-0으로 앞서나갑니다!”
비록 리버풀 이적 후부터 급격하게 떨어진 기량으로 비판의 대상이 된 로비 킨이지만, 순간적인 센스와 노련함은 여전했다.
빠져나가는 수비진 사이에서 볼을 받아 슈팅 찬스를 맞이한 킨은 로버트 그린 골키퍼의 움직임을 보고 가볍게 볼을 밀어 넣었다.
토트넘 합류 이후 4호 골, 리버풀 시절을 포함해 리그 9호 골이었다.
‘그래. 이거지. 공격이 이렇게 나와야지.’
모드리치의 움직임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자신의 생각보다 떨어지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최소한 자신의 기대만큼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높은 확률로 더 나은 플레이로 이어갔다.
호흡을 맞추면서 신이 날 정도였다.
‘에당이 빨리 성장해야 할 텐데.’
벨기에에도 저런 재능을 갖춘 선수들이 있었다.
아직 성장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아자르, 데 브라위너, 샤들리 등 훌륭한 재능을 갖춘 선수들이 성장해 합류하길 바랐다.
그렇게만 된다면 대표팀 경기에서도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이었다.
***
비록 9경기 연속 무패 행진은 중단되었지만, 웨스트햄을 잡아내며 1경기로 새롭게 무패 행진을 시작한 토트넘은 뉴캐슬을 화이트 하트 레인으로 불러들여 리그 33라운드 경기를 가졌다.
“뉴캐슬의 경기력이 괜찮습니다. 이대로라면 강등권 탈출을 기대해보는 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번 시즌, 뉴캐슬은 그야말로 최악의 시즌을 보내고 있었다.
선수 영입 관련으로 키건 감독과 와이즈 디렉터가 첨예하게 대립한 끝에 키건 감독이 사퇴했고, 뉴캐슬은 급하게 조 키니어를 임시 감독으로 선임했다.
그런데 임시 감독 키니어가 심근경색 수술을 받으며 임시 감독 키니어의 대행으로 수석 코치 휴튼이 부임했다.
임시 감독의 감독 대행이 부임하는 촌극이었다.
당연히 성적이 좋을 리 없었다.
전반기를 5승 7무 7패의 그저 그런 성적으로 마무리한 뉴캐슬의 후반기 성적은 12경기 1승 5무 6패.
30라운드 아스날전에서 패배하면서 18위, 강등권으로 떨어진 뉴캐슬은 키니어 감독을 해임하고 클럽의 레전드 중 레전드이자 프리미어리그 전체의 레전드인 앨런 시어러를 감독으로 선임해 위기 탈출을 노렸다.
시어러 체제에서도 별다를 바 없었고, 두 경기 1무 1패에 그쳤지만, 그나마 경기력은 올라오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데미안 더프, 주를 앞에 두고 돌파를 시도합니다!”
안더레흐트 시절, 챔피언스리그에서 만난 이후 두 번째로 더프를 만나게 된 성배였다.
하지만 그때와 비교하면 두 선수의 위상은 역전되어 있었다.
“더프, 화려한 드리블! 돌파 시도하지만, 간단히 가로막힙니다! 주, 중앙의 허들스톤에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좌 더프 우 로번 라인을 구축하며 프리미어리그는 물론이고 세계 최고의 조합으로 인정받았던 더프였다.
하지만 뉴캐슬 이적 후 급격히 추락해버렸다.
잦은 부상과 기복, 컨디션 난조가 겹치며 이제는 적당히 괜찮은 선수로 몰락했다.
그리고 그사이 성배는 리그 정상급 풀백으로 성장했다.
더프의 돌파는 위력적이었지만, 성배가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모드리치, 왼쪽으로 열어줍니다! 베일, 빠르게 달립니다!”
뉴캐슬의 경기력이 살아나는 중이라고는 하지만, 리그 19위치고는 좋은 경기력이라는 뜻이었다.
리그 7위까지 치고 올라오는 과정에서 경기력이 엄청나게 좋아진 토트넘에 비하면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시간이 지날수록 토트넘이 점점 경기 분위기를 잡아나갔다.
“베일, 엄청납니다! 베예가 이렇게 느린 선수였습니까!”
베일을 막고 있는 베예도 나름 빠른 선수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베일과 함께 달리니 상대가 되질 않았다.
실제로 축구를 해봤다면 알겠지만, 축구 선수들은 한 번에 달리는 거리가 그리 길지 않았다.
보통은 길어봐야 10미터, 정말 많이 달린다고 해봐야 20미터를 넘어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스피드이 차이가 있어도 수비수들이 공격수를 곧잘 막아내는 이유도 여기 있었다.
그 짧은 거리에서는 정말 어지간히 빠른 게 아니면 미리 자리 잡은 수비수를 추월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베일은 그걸 해내는 선수였다.
“기어이 볼을 따내는 베일! 중앙으로 치고 올라갑니다!”
뒤에서 출발했고, 앞을 막고 있는 베예의 피지컬이 좋았기 때문에 옆으로 빙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추월해냈다.
컴퓨터를 활용해 베일의 움직임만 빨리 감은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중앙 쪽으로! 테일러까지 제치고 오른발 슈팅! 바송의 몸에 맞고 나갑니다! 토트넘, 코너킥을 얻어냅니다.”
비록 마지막 수비수인 바송까지는 제쳐내지 못해 코너킥을 얻어내는 것에 만족해야 했지만, 득점 못지않게 인상적인 장면을 만들어낸 베일이었다.
베일의 최대 장점인 인간 같지 않은 스피드가 확실히 드러났고, 많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하! 저런 인간도 있구나.’
성배 역시 인상적으로 지켜보았다.
뒤에서 보고 있는데도 그 스피드가 느껴졌다.
혹시 엉덩이나 발바닥에서 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부스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어이없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확실히 저런 건 정말 부럽다.’
자주 보는 장면이었지만, 볼 때마다 부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축구 지능도 타고난 것이고, 16년의 경험을 가지고 회귀했다는 사실은 베일의 것보다 훨씬 더 불공평한 혜택이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그 대단함은 그야말로 사기 수준이었다.
그래도 사람인지라 자신에게 없는 것을 보면 부러웠다.
“주, 코너킥을 준비합니다. 이번 시즌 리그에서 아홉 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했고, 시즌 전체로 보면 열 개의 어시스트를 기록 중입니다.”
“그중 코너킥 상황에서의 어시스트는 두 개가 기록되어 있네요. 주의 킥은 오래전부터 토트넘의 주요 득점 루트였기 때문에 지금도 기대해볼 만해요.”
성배가 코너킥을 준비했고, 토트넘 선수들은 박스 안으로 몰려들었다.
도슨과 우드게이트, 허들스톤의 트리플 타워가 뉴캐슬 선수들을 압박했다.
‘후우... 공격 포인트 하나쯤 더 쌓을 때가 되긴 했지.’
지난 미들스브로 전에서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한 이후 네 경기 동안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풀백이 세 시즌 연속으로 두 자릿수 공격 포인트를 기록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었다.
하지만 성배가 토트넘에서 프리킥과 코너킥을 모두 도맡아서 처리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렇게 엄청난 건 또 아니었다.
“베르바토프의 이적과 돌아온 로비 킨의 기량 하락으로 지난 시즌의 공격력을 잃어버린 토트넘은 베일과 레넌의 양 날개와 모드리치, 주의 지원을 앞세워 여기까지 왔거든요? 주의 정확한 킥을 앞세운 세트피스도 상당한 위력을 자랑하죠. 뉴캐슬, 오늘 경기를 잡으려면 세트피스를 잘 막아내야 할 거예요.”
성배는 볼에서 조금씩 멀어지며 킥을 준비했다.
박스 안에 있는 동료들의 위치 역시 직접 조정했다.
“주심의 휘슬이 울립니다! 주, 볼을 향해 달려들고, 코너킥!”
성배의 코너킥은 빠르게 박스 중앙을 향해 올라왔다.
장신 숲 속에서 여러 명의 선수가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경합을 펼쳤다.
그리고 일제히 뛰어올랐다.
“허들스톤, 헤더!! 골! 골! 골! 측면에서 올라온 주의 코너킥을 머리로 강하게 받아서 득점으로 연결한 허들스톤! 멋진 득점입니다!”
성배의 코너킥은 허들스톤의 머리를 정확히 겨냥했다.
그리고 허들스톤은 장점인 강력한 힘을 활용해 뉴캐슬 선수들을 떨쳐내고 슈팅까지 이어갔다.
전매특허인 어마어마한 파워의 중거리 슈팅의 헤딩 버전이었다.
헤더임에도 불구하고 잘못 막다가는 골키퍼의 손가락이 부러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력했다.
“토트넘의 선취 골! 갈 길 바쁜 뉴캐슬을 상대로 선취 고을 터뜨리며 앞서 나갑니다! 뉴캐슬, 오늘도 지면 큰일 납니다!"
성배의 리그 열 번째 어시스트는 뉴캐슬을 조금 더 깊은 수렁으로 빠뜨렸다.
허들스톤의 선취 골을 마지막까지 지켜낸 토트넘은 뉴캐슬을 잡아내며 6위 에버튼에 승점 1점 차이까지 바짝 따라붙었다.
***
‘드디어 기회가 왔다.’
그리고 34라운드.
성배가 기다려온 그 날이 찾아왔다.
[프리미어리그 34R. Sat Apr 25, 2009. 5:30 P.M.]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VS 토트넘 핫스퍼, Old Trafford]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리그 34라운드 경기였다.
지난 칼링컵 결승전에서 호날두에게 빚을 지기도 했고, 도움을 받기도 했다.
이번 생에서의 성배는 은원을 정확히 갚아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대로 끝낼 수 없었다.
‘마지막 기회인가...’
호날두가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하는 마지막 시즌이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이번 경기가 아니면 언제 또 만날지 모른다는 뜻이었다.
‘마지막에 한 방 먹여주지.’
오랜만에 무력함을 느끼도록 해주고 싶었다.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최후의 승자라더라.’
경험 많고 노련한 자신이 흥분하고 심지어 이성까지 잃게 했던 호날두의 그늘에서 벗어나 최후의 승자가 되어줄 생각이었다.
< 낭만필드 - 175 (7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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