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만필드 - 173 >
‘도대체 왜 이런 스쿼드가 나오는 거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의 월드컵 예선 5차전에 나설 선발 명단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그 명단을 살펴본 성배는 반더레이켄 감독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뱅상이 왜 없는 거지. 얀도 부상으로 빠졌는데 왜 뱅상을 안 쓰는 거냐고.’
콤파니가 명단에서 빠져 있었다.
베르통헨도 부상으로 빠졌고, 콤파니도 명단에서 제외되었으니 벨기에 수비진에 구멍이 뻥 뚫리는 것도 당연했다.
성배와 베르마엘렌, 베르통헨과 콤파니로 구성된 벨기에 수비진은 지난 유로 예선 막판에 벨기에의 약진을 이끌었던 검증된 라인이었다.
물론, 지난 두 시즌 동안 콤파니가 헤맸던 것도 사실이고, 그 사이 성배는 물론이고 베르마엘렌마저 콤파니보다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콤파니를 대체할 선수는 없다는 것이 가장 분명한 사실이었다.
‘티미가 아무리 좋은 선수라도 센터백 자리에서 뱅상을 대신할 순 없어.’
경기 전부터 불안해졌다.
안 그래도 허약한 공격진에도 큰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 뒤를 단단히 받쳐줘야 할 수비진마저도 구멍이 크게 뚫려버린 상황이었다.
벨기에의 장점인 강력한 수비력을 선보이기 힘든 상황이 되어버렸다.
‘오른쪽에는 스튜어트고 중앙에는 티미라... 양쪽 윙어도 전문 윙어가 아니고... 어렵겠군.’
90년대 유고슬라비아가 붕괴한 이후 92년 독립, 95년에서야 내전이 종식된 국가가 바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였다.
그 덕에 90년대 후반에야 세계 축구계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한때 세계 축구계를 지배했던 유고슬라비아의 혈통은 어디 가지 않았다.
‘잘 알려지진 않았어도 은근히 상대하기 까다로운 팀인데...’
볼프스부르크에서 맹활약하며 명실공히 분데스리가 최고의 공격수라 평가받는 제코를 비롯해 팀 동료이자 분데스리가의 압도적인 어시스트 1위 미시모비치가 나타나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호펜하임의 살리호비치와 이번에는 부상으로 빠졌지만, 전반기에만 열여섯 골을 터뜨린 이비세베치가 그 뒤를 받쳤다.
리옹에서 활약하는 유망주, 미랄렘 피아니치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선수였다.
‘과연 티미가 막을 수 있을지...’
보스니아의 에이스들은 모두 중앙에 포진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시몬스와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제코와 그의 파트너 무슬리모비치는 각각 193cm와 189cm의 장신이었다.
76년생으로 30대 중반에 접어들어 신체 능력이 많이 떨어진 시몬스와 180cm를 겨우 넘는 베르마엘렌에게는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제길... 이래서 뱅상이 필요한 건데...’
생각이 깊어질수록 콤파니의 빈자리가 아쉬웠다.
특히나 새로운 리그 적응에 애를 먹던 콤파니가 2009년을 기점으로 부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아쉬웠다.
***
“수비진영에서 스파히치가 정면으로 긴 패스 이어줍니다! 미시모비치, 돌파합니다!”
“미시모비치, 정말 좋은 움직임이에요! 스튜어트, 막아줘야죠!”
성배의 예상대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벨기에의 홈에서 벨기에를 압도했다.
“가볍게 돌아서면서 스튜어트를 제칩니다! 빠르게 올라갑니다!”
“위험해요! 빨리 따라가야 돼요!”
단순한 턴 동작 한 번에 스튜어트는 간단히 무력화되었다.
분데스리가의 어시스트 머신, 미시모비치는 스튜어트를 따돌린 뒤, 비어버린 왼쪽 측면으로 빠르게 올라갔다.
“멈춰놓고 합류를 기다립니다. 파고드는 제코에게!”
빠르게 달리다 멈춰 선 미시모비치의 움직임에 스튜어트는 또 한 번 나가떨어졌다.
스튜어트를 따돌린 미시모비치는 멈춰선 뒤, 뒤에서 침투하는 제코에게 패스를 찔러주었고, 제코는 시몬스를 따돌리며 만들어낸 공간에서 편안하게 볼을 잡았다.
‘도대체 뭐하자는 거야!’
성배가 화를 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직 벨기에의 전성기가 오지 않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겨우 두 명의 선수를 막지 못해서 우르르 무너지는 것은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심했다.
“박스 안쪽에서 파고들고, 슈팅! 스틴슨의 선방! 넘어지면서 막아냅니다.”
다행히 베르마엘렌의 백업 덕분에 각도를 잃은 제코의 슈팅은 스티넨의 선방에 막혔다.
하지만 왼쪽으로 날아간 볼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레프트백 보리스 판자가 잡아내며 공격을 이어갔다.
“판자, 중앙으로 크로스! 제코!!! 아! 골입니다. 실점하고 마는 벨기에 대표팀! 전반 7분 만에 선취 골을 허용하며 끌려가기 시작합니다.”
성배가 걱정했던 것이 현실로 일어나고 말았다.
레프트백 판자의 크로스가 날아오는 동안 제코를 전혀 견제하지 못한 벨기에 수비수들은 제코가 편하게 머리를 가져다 대는 동안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다.
“골대에서 멀었는데요, 저 위치에서는 헤더로 득점하기 어렵거든요? 수비수들이 너무 편하게 놔두었어요. 이건 아니죠.”
거의 페널티 스팟 근처에서 이루어진 헤더였다.
골대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머리로 득점하기 어렵다는 것은 상식이었다.
그런데 워낙 자유로운 상황이다 보니 제코의 헤더는 코스가 완벽했다.
‘하아... 중앙에 수비수가 몇 명인데 저걸 못 막아.’
베르마엘렌이야 또 다른 공격수 무슬리모비치를 마크하느라 정신없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제코의 주변에 있었던 무딩가이와 시몬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제코를 그렇게 편하게 놔두었는지...
‘뱅상이 보고 싶다.’
벤치 명단에도 들지 못해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콤파니 역시 자신만큼 답답할 것이었다.
***
“아, 벨기에... 패배가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오늘 경기의 패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후반 43분, 아직 경기가 끝나지는 않았지만, 중계진은 이미 패배를 기정사실화하고 패인을 분석했다.
스코어는 어느새 1-4.
추가 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따라잡기에는 버거운 점수 차이였다.
“아무래도 중앙 수비가 무너진 것이 가장 큰 요인이겠죠. 베르마엘렌은 분명 좋은 선수고, 신장에 비해 제공권이 아주 뛰어난 선수지만, 아무래도 키가 작아서 장신 공격수들과의 경합에서는 약점을 보일 수밖에 없어요. 시몬스는 그런 베르마엘렌의 단점을 보완해주기엔 역부족이었고, 피지컬도 너무 많이 떨어졌죠.”
선취 골을 기록한 제코는 물론이고 연달아 터진 야니치, 바라모비치, 미시모비치의 골 모두가 중앙에서 나왔다.
벨기에의 중앙 수비진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장점인 중앙 공격진의 위력을 이겨내지 못했다.
오른쪽의 스튜어트 역시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치진 못했다.
왼쪽에서 성배가 아무리 날고 기었어도 중앙과 오른쪽의 부진을 혼자 만회할 순 없었다.
“한 마디로 심각해요. 주, 펠라이니, 뎀벨레는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나머지 선수들은 전부 다 아쉬웠어요.”
벨기에에서 만족스러운 활약을 보인 선수는 위의 세 선수가 전부였다.
총체적인 난국이었다.
유로 예선 막판에서의 호성적과 베이징 올림픽 은메달을 통해 희망을 가졌던 벨기에 팬들이 다시 좌절할 정도의 암울한 경기력이었다.
“데푸르는 좋은 선수지만, 측면보다 중앙에서 빛나는 선수죠. 차라리 데푸르를 중앙으로 옮기고 악셀 비첼까지 투입해서 윙어가 없는 전술을 활용하는 것이 훨씬 좋아 보이거든요? 유로 예선 막판, 그런 전술로 좋은 모습을 보여놓고 왜 윙어 활용을 고집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유로 예선 막판에 여섯 경기 연속 무패 행진을 달렸을 때의 전술이 바로 윙어 없는 4-4-2 다이아몬드 전술이었다.
하지만 반더레이켄 감독은 그 전술로 재미를 봐놓고도 다시 윙어를 활용하는 전술로 돌아왔다.
뎀벨레와 데푸르를 측면에 두었는데, 데푸르의 장점은 활동량과 터프함으로 측면에서의 활약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쪽 측면이 완전히 죽어버리니 뎀벨레의 활약도 제한되었고, 양쪽 날개가 죽으니 중앙 공격수들도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아! 음라박의 거친 태클! 벨기에, 좋은 위치에서 프리킥을 얻어냅니다.”
후반 44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음라박이 펠라이니에게 거친 태클을 가하며 경고를 받았다.
벨기에의 마지막 기회였다.
“오늘 경기가 끝이 아니거든요? 며칠 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다시 한 번 경기를 치러야 하니까 지금 이 기회를 잘 살려서 다음 경기를 준비했으면 좋겠네요.”
며칠 뒤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로 원정을 떠나 월드컵 예선 6차전을 치르는 벨기에였다.
질 땐 지더라도 마지막으로 한 방은 먹여줘야 했다.
‘후우...’
프리키커는 당연히 성배였다.
경기 내내 다른 쪽에서 생긴 구멍을 메워주느라 고생해 힘이 하나도 없었지만, 마지막 기회는 꼭 살리고 싶었다.
‘2010년 월드컵은 좀 나가자.’
열심히 노력해서 네덜란드계와 프랑스계의 반목을 어느 정도 줄였다.
그 영향으로 전생에서보다는 좀 더 빨리 팀이 정상화되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 꼬라지를 보면 택도 없었다.
‘에휴... 월드컵 정도는 나가줘야 몸값도 뛸 텐데.’
다른 선수들처럼 명예욕 혹은 애국심으로 월드컵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축구 선수로 활약하는 이상 월드컵에서 활약하는 걸 바라지 않는 선수는 없었다.
그리고 월드컵에서 뛰어야 비로소 세계적인 선수를 꼽을 때 이견 없이 포함될 수 있었다.
‘오냐. 네놈들이 정신 차릴 때까지는 내가 이 악물고 뛰어준다. 나중에 무임승차만 하게 해달라고.’
천천히 심호흡하면서 프리킥을 준비했다.
찬란한 미래를 위해서라면 앞으로 1, 2년 정도는 더 굴러줄 수 있었다.
“프리킥을 준비합니다. 마지막으로 멋있게 하나 넣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라운드의 오른쪽, 즉, 왼발 각도에서 프리킥을 준비중인 성배였다.
성배의 왼발은 이미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만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비수들과 골키퍼는 한껏 긴장하고 있었다.
‘음... 준비가 잘 되어 있는데.’
상대 수비진에서 빈틈을 찾기가 어려웠다.
자신에 대한 분석이 잘 되어 있는 듯 했다.
‘그래도 내가 그렇게 쉬운 사람은 아니지.’
주심의 휘슬이 울리고, 성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볼을 향해 달려든 것은 아니었다.
발을 박차며 옆으로 두 걸음을 옮긴 성배는 어느새 오른발 각도에 서있었다.
“아! 오른발입니다! 슈-팅! 아! 골!! 고오오오올!! 주의 오른발이 터졌습니다! 두 번째 득점! 이걸로 한 골을 만회하는 데 성공합니다!”
“멋진 슈팅이네요! 경기에서 패배했지만, 팬들을 위로할 수 있는 멋진 슈팅이에요!”
성배의 슈팅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비벽의 바깥쪽으로 감겨서 가까운 쪽 골포스트를 공략했다.
수비벽을 믿고 먼 쪽 골포스트 쪽에 서 있던 수피치 골키퍼는 꼼짝도 못 했다.
“허를 찌르는 오른발 슈팅! 마지막까지 왼발로 때리는 척하다가 오른발로 바꿔서 상대 수비수들을 완벽히 속였습니다. 역시 주성배! 영리합니다!”
“정말 영리한 선수예요. 순간적으로 오른발로 바꾸는 저 센스. 저게 바로 주성배 선수를 지금 위치에까지 올려놓은 가장 큰 장점이거든요. 스포츠에서 신체능력의 불리함을 머리로 커버한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주성배 선수죠!”
성배의 멋진 프리킥 득점에 중계진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오늘 벨기에의 형편없는 경기력을 덮기 위해서라도 스타가 필요했다.
‘원정에서 보자.’
만약 원정에서도 콤파니를 출전시키지 않는다면, 감독과 한 판 붙을 각오도 하고 있었다.
이제 자신은 그 정도 위치에 올라 있었다.
자신의 위치를 자각한 성배는 입지가 불안한 반더레이켄 감독과 붙었을 때, 이길 자신이 있었다.
< 낭만필드 - 17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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